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55화 (55/70)

[55]

두근두근. 새롭게 떠오르는 가설에 심장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뜀박질 치기 시작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제 방에 돌아간 시안나는 오래간만에 푹 숙면을 취했다.

그렇게 안심하는 와중, 생각지도 못한 전보가 날아들었다.

***

다음 날. 시안나는 일어나자마자 카릴의 서신을 받았다. 실링 왁스를 뜯어낸 편지에는 간단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닐 크라운이 죽었다.’

두둥. 크게 뜨인 시안나의 눈이 파르르 경련해 댔다.

닐 크라운이 간밤에 죽었다고?

“괜찮으세요? 시안나 님.”

휘청거리는 시안나를 미셰리가 지탱해 주었다. 그럼에도 진정되지 않아 시안나는 냉수를 벌컥 들이켰다.

‘하아, 닐이 그렇게 불안해하던 거 알고 있었잖아. 왜 막지 못한 거야.’

자신을 싫어하는 남자였지만 불안에 떠는 모습이 기억나자 자책이 차올랐다.

지금쯤 아마 닐의 저택을 수사하고 있겠지.

그녀는 당장 나갈 채비를 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눈썹이 휘날릴 정도로 뛰고 있던 탓에 그녀는 계단 모퉁이를 돌자마자 반대편에서 올라오던 헤이스와 부딪쳤다.

“아야야. 미안해, 헤이스.”

헤이스는 시안나가 빠르게 가는 길을 보고 심각한 사안임을 눈치챘다. 그는 다시 계단을 내려가려는 시안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시안나 님? 급히 어딜 가시는 겁니까?”

순간 헤이스에게 사건에 대해서 전부 털어놓기로 한 일이 생각났다.

시안나는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크라운 후작가에 변고가 들려와서…… 아, 그러고 보니…….”

헤이스는 예언서에 대해 아는 게 있지 않을까?

그녀는 딱히 기대를 걸지 않은 채 물었다.

“헤이스, 혹시 예언서라는 거 알아?”

“예언서요?”

헤이스의 갈색 눈썹 주변이 우그러졌다. 그러더니 그의 시선이 의미심장하게 바뀌었다.

헤이스가 알 리가 없나?

시안나가 다시 바삐 걸음을 재촉하려는데 그의 말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저도 처음에는 놀랐습니다. 미래를 예언하는 책이라는 게 실존하는 줄이야.”

***

어느새 해가 산 중턱이었다. 오늘도 디트리히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른 아침부터 영지 개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현장을 시찰했고, 점심을 먹은 후엔 개간하고 있는 공터를 확인해야 했다.

밖에서는 빵으로 버텨야 하기에 점심 식사는 필수였다. 디트리히는 시안나를 볼 수 있는 점심시간을 좋아했다.

분명 그녀를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하루 피로가 싹 날아갈 게 확실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그가 정문에 다다랐을 때, 시안나가 탄 마차가 유유히 성문을 빠져나갔지만 디트리히는 알지 못했다.

그는 곧장 시안나의 방문을 노크하고 들어갔다.

“누님, 계십니…….”

말을 하던 디트리히가 얼어붙었다.

방은 도둑이 든 것처럼 어질러져 있었다. 벽에 붙은 액자들은 모조리 떼어져 한편에 놓여 있었고, 부랴부랴 짐을 싼 듯 옷가지들이 차곡차곡 개어져 있었다.

멀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 같은 방구석에 디트리히가 복도로 나와 시종을 부르려다 미셰리와 맞닥뜨렸다.

디트리히가 미셰리에게 조용한 분노를 태웠다.

“마침 잘됐군. 지금 이 난장판은 어떻게 된 거지? 가뜩이나 누님께서 어제 비에 맞아 몸도 안 좋으실 텐데. 이래서야 나중에 추천서도 써 주기 힘들겠군.”

미셰리는 시안나가 아슈토르 저택을 떠난다고 선언한 직후부터 디트리히가 원망스러웠다.

갑자기 집을 떠나시겠다니. 그가 시안나에게 나가라고 윽박이라도 지른 게 분명했다.

하나 원망스러운 마음에든 것도 잠시, 미셰리는 차가운 눈빛에 몸서리쳤다.

그녀가 턱을 달달 떨며 대답했다.

“이, 이제 와서 왜 백작님을 붙잡는지 모르겠습니다.”

“백작?”

디트리히의 눈동자가 바늘처럼 따가워졌다. 미셰리는 소심하게 그를 책망했다.

“디, 디트리히 님께는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까? 시안나 님께선 아슈토르가를 떠날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슈토르가를 떠나? 누님께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다그치려고 하는데, 며칠 전 수도 거리에서 스치듯 지나간 음성이 떠올랐다.

‘디트리히. 나 거취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데…….’

그러나 손끝에 닿는 열기 때문에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하하…….”

디트리히는 얼굴에 손을 짚었다.

설마 그를 떠날 생각 따위를 하고 있었을 줄이야.

미셰리는 갑자기 방 안에 불어 닥친 한기에 몸을 떨었다. 메마른 웃음이 어찌나 차갑던지, 온몸이 얼음 성처럼 꽁꽁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대로 떠나게 내버려 둘 줄 알았습니까?”

분한 듯 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대체 그를 떠나서 무엇을 하려는 걸까.

설마 왕께 가려는 건…….

손가락 사이로 비치는 금안이 사납게 일렁였다.

디트리히가 미셰리에게 취조하듯이 물었다.

“누님은 이른 시각부터 어딜 가신 거지?”

서릿발 같은 사내 앞에서 미셰리는 뻐팅길 수 없었다.

“……닐 크라운 후작가로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의심은 순식간에 확신으로 변했다.

닐 크라운은 카릴의 측근 중 한 명이었다.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택을 빠져나온 디트리히가 말에 올라탔다.

***

하얀 대저택 정문으로 각진 제복을 입은 수사관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정문 왼편엔 시종인들이 모여 있었다. 어떤 이는 눈물을 훔쳤고, 어떤 이는 후작에 대해 수군거렸다.

늦은 밤까지 서재에 불이 꺼지질 않더라. 일부러 잠을 자지 않으려 노력하다 아침 해가 떠서야 침대에 눕더라.

시종들은 요 며칠 후작이 이상했다고 증언했다.

웅성거리는 군중들 뒤로 이힝, 말 울음과 함께 말발굽 소리가 다가왔다. 아슈토르가 인장이 박힌 마차였다. 마차에서 내린 시안나는 침통한 표정의 시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왕께서 방문하셨습니까?”

“네. 한 시간 전에 도착하셨습니다.”

시안나는 제복을 입은 수사관들을 헤치고 후작의 방이 있는 안으로 성큼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시안나를 발견한 수사관이 앞을 가로막았다.

“여긴 살인 현장이니 들어오면 안 됩니다!”

“왕께 중요한 볼일이 있다니까요!”

“전해 들은 바가 없으니 돌아, 아, 안된다니까!”

남자가 무시하고 지나가려는 그녀를 얼른 끌어안았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멀리서 뚜벅뚜벅 발걸음이 다가왔다. 굳은 얼굴을 한 카릴이었다.

남자의 모습은 마지막 봤을 때와 별다른 바 없는데도 시안나는 유난히 한기가 들었다.

“이만 물러서.”

복도 끝에서 나타난 카릴이 병사에게 떨어지라는 명령을 내리고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병사는 시안나로부터 반걸음 떨어졌다.

그녀는 카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간 후 눈을 홉떴다.

“왕이시여……. 제게 무엇을 숨기는 겁니까?”

“숨긴다니?”

모든 사실을 알고 왔건만 카릴은 얄미울 만치 시치미 뗐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아올랐다.

“예언서! 왕께서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예언서에 대해 아느냐는 질문에 헤이스의 입에서 믿기지 않는 대답이 돌아왔다.

‘저도 처음에는 놀랐습니다. 미래를 예언하는 책이라는 게 실존하는 줄이야.’

허점을 찌르는 듯한 대답에 시안나가 헤이스를 재촉했다.

‘미래?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말 그대롭니다. 차라리 직접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예언서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

까무러치는 시안나에 헤이스가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더니 여상히 대답했다.

‘네. 사실 긱스 공작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왕께서 빌려준 책이 있다며 책 하나를 가져다 달라고 하셨습니다. 책 표지에 에르마야 님의 일기라고 적혀 있어서, 저번에 왕께서 에르마야 님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을 때 납득이 가더군요. 일기라는 말에 전 펼치진 않았지만…… 왕께 전달해 드리니 예언서라고 하셔서 깜짝 놀랐죠.’

이럴 수가. 서재에 책이 없어진 이유가, 헤이스가 카릴에게 건넸기 때문이라니.

‘고마워! 그럼 이만. 나 잠깐, 어디 갈 곳이 있어서!’

‘시안나 님? 대체 그 책에 뭐가 적혀 있길래…….’

헤이스가 계단 아래로 사라지는 시안나의 뒷모습을 보며 뺨을 긁적였다.

시안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카릴을 쏘아보았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게 딱 그녀 꼴이었다.

“긱스 공작님께서 본 정체불명의 책, 그리고 이때까지 죽었던 사람들이 말하던 미래. 전부 예언서를 본 거죠?”

‘절대로 미래대로 흘러가게 두지 않겠다!’

‘그따위 미래로 날 겁박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딴 책 따위 찢어 버릴 거니까!’

브라움과 닐 크라운의 입에서 나온 미래라는 단어. 그리고 책.

긱스를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었던 예언서가 확실했다.

그녀의 폭로에도 카릴은 뒤통수만 긁적일 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허 참, 헤이스 경이 그렇게 입이 가벼울 줄이야.”

시안나가 듣기에 기도 차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며 그가 코트 안쪽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두툼한 외투 안에 넣고 다니면 티가 나지 않을 정도인 게 꼭 다이어리 같았다. 시안나는 책을 휙 낚아채면서도 계속 카릴을 빤히 응시했다.

“당신, 닐이 죽을 걸 알고 있었어요.”

분노로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버릇없는 말투에 병사가 제지를 가하려 하자 카릴이 손을 들어 멈추게 했다.

그녀가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크라운 후작은 며칠 전 왕께 매달렸잖아요. 어째서 그를 구해 주지 않은 거죠?”

카릴은 픽 웃음을 흘리곤 그녀가 품에 낀 가죽 책을 가리켰다.

“그 책을 읽으면 모든 걸 알게 될 거야. 백작이 궁금해하는 것 전부.”

“그럼 왕께서 저를 속인 이유도 알려 주나요? 처음부터 이상했어요. 저에게 수사하자고 권유했으면서 정보도 공유해 주지 않고, 사건 현장에만 데리고 다녔죠.”

카릴의 태도는 처음부터 모호했다. 그는 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대체 무슨 연유로 그녀를 이리저리 끌고 다닌 걸까. 사건의 중심에 휙 던져 놓고 무얼 바란 걸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