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두 사람이 무수한 행렬 가운데서 멈추어 섰다. 주변에 발걸음 소리가 다닥다닥 이어졌지만 디트리히는 시안나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강렬한 눈빛 때문에 비가 오는데도 그녀의 몸만은 여름처럼 후덥지근했다.
“누님.”
어두운 보라색 빛깔의 하늘 아래 지상엔 저만을 바라보는 해가 존재했다. 디트리히의 황금색 눈동자가 저만을 담고 있었다. 다른 건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 열렬하게…….
열망 가득한 시선이 배 안쪽에 들러붙는 것만 같았다.
“읏…….”
그의 관심이 슬금슬금 아래로 향하더니 시안나의 작게 벌려진 입술을 탐색했다.
“아!”
입술 위를 기어 다니는 디트리히의 시선에 시안나의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저주에 풀리고 나서 풍기던 쉽게 범접할 수 없던 느낌과 다른 의미로 위험했다.
심장이 고장 난 듯 쿵쿵거렸다.
그 이상야릇한 기분에 시안나가 디트리히를 퍽 밀쳤다. 돌처럼 단단한 디트리히는 밀려나진 않았지만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풀렸다.
시안나는 저도 모르게 인파 속으로 뛰쳐나갔다.
“누님?”
시안나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사라졌다.
아…….
디트리히는 갈증이 이는 얼굴로 으득 주먹을 쥐었다. 잡히는 건 공기뿐이라 그의 마음이 차갑게 술렁였다.
또 놓치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그녀와 헤어지기 싫었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꺾일 듯한 가녀린 팔목을 당장 붙잡고 싶었다.
디트리히가 곧바로 그녀를 쫓으려 할 때였다.
콰앙!
무서울 만치 새까만 하늘이 사납게 진동했다.
그 순간, 디트리히는 급소라도 맞은 사람처럼 자리에 주저앉았다.
***
“헉, 헉…….”
얼마나 뛰었을까. 멈춰선 시안나는 무릎에 손을 올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본능적으로 울리는 머릿속의 사이렌에 그만 달음박질치고 말았다.
숲에서도 그렇고, 디트리히가 자신을 사냥하는 맹수처럼 느껴졌다. 희한한 일이었다. 도서관에서 그녀가 넘어질까 봐 책을 들어 주던 디트리히가 자신을 지켜 주면 지켜 주었지, 해칠 리 없었다.
톡. 톡. 뺨에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비가 오려는 건가?”
대지가 어두운 그림자로 뒤덮였다. 투명한 보석 알 같은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더니 곧 바닥의 틈 사이가 고여 흘러넘칠 만큼 억세게 쏟아졌다.
쏴아아.
차가운 비가 그녀의 정신을 일깨웠다.
“아…….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잖아. 디트리히는 천둥을 무서워하는데!”
폭풍우가 칠 때마다 베개를 꼭 끌어안은 채 그녀의 방을 방문한 디트리히가 그려졌다.
아니지. 이제 저주에 풀렸으니 그런 어린아이 같은 면모는 없겠지?
왠지 아쉬움을 느끼면서 시안나는 왔던 길을 뒤돌아갔다.
“디트리히!”
그를 찾아가는 사이, 드레스며 연둣빛 머리카락이 점점 암청색으로 물들었다. 스스로도 이 길이 맞는지 알 수 없었다.
인파가 많은 나머지 비를 피하는 사람들과 그녀의 몸뚱어리가 철퍽 부딪쳤다. 그녀는 한참을 사람들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두 사람이 헤어졌던 곳에 도달했다.
상점에 진열되어있는 꽃과 나비가 그려져 있는 찻잔, 고딕 스타일의 촛대, 금빛으로 빛나는 보석 보관함.
상점에 진열된 반짝이는 불빛이 바닥에 웅크려 심장 부근 옷깃을 움켜쥔 디트리히를 비추었다.
“디트리히, 설마, 완전히 트라우마가 되어 버린 거야?”
시안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디트리히가 어린 시절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안일하게 여기다니. 이렇게 비가 올 것 같은 날씨면 잽싸게 저택으로 돌아갔어야 했다.
그녀가 숨도 못 쉬고 그에게 발을 뗐다. 새까맣게 젖은 어깨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걸 발견한 순간, 차가운 빗소리에 섞인 호흡이 귓가에 흘러들었다.
“하아, 하…….”
깜짝 놀란 시안나가 흔들리는 어깨를 짚었지만 고개 숙인 디트리히는 여전히 패닉 상태였다.
“디트리히, 숨 천천히 쉬어. 진정해. 다 괜찮으니까.”
시안나는 아연실색했다.
고용인들 사이에선 그의 일 처리 능력이 정평이 나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이 일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빨랐고 실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서질 것처럼 자신을 끌어안은 채 덜덜 떠는 모습이 더욱 충격이었다.
책임감이 든 그녀는 빗물로 차가워진 뺨에 손을 올리고 저를 보게 만들었다. 비에 젖은 얼굴이 그녀를 향하자 생기가 돌아왔다.
“읏, 하아, 누님……. 하아…….”
“정신 차려, 날 똑바로 보고 숨 좀 느릿하게 쉬어 봐. 그래. 그렇게.”
피부에 달라붙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금빛 눈동자가 움직였다.
곧 빗물에 번진 듯한 흐릿한 형체가 또렷해지더니 연둣빛 머리카락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여성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주변은 온통 새까만데 그녀만이 찬연했다.
“괜찮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웅웅 울리던 목소리도 생생해졌다.
디트리히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 안았다.
따뜻했다. 세상에 둘만 존재하는 것처럼 차가운 빗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뛰어온 것인지 흙탕물이 마구 튄 드레스 프릴. 산발이 된 머리카락. 눈가는 왜 또 불그스름한지.
비 때문에 꼭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다.
디트리히의 보라색으로 질린 입술이 시안나의 눈두덩에 안착했다.
“읏?”
디트리히가 드레스 어깨선 위로 손을 올리고 얼굴을 바짝 붙였다. 이윽고 눈가에 따뜻한 체온이 번졌다.
그의 입술이 달라붙었다는 사실을 시안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디…… 트리히?”
목 안이 바싹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부드러운 입술은 눈두덩이를 가볍게 누르더니 빗물을 들이마셨다.
여린 살이 디트리히의 입술 틈새로 들어갔다. 말랑말랑하고 야릇한 감각이었다.
“읏…….”
세기가 더 강해졌다. 그냥 입을 맞추는 게 아니라 입술에 힘을 주는 감각.
열꽃이 피는 것만 같은 생소한 감촉에 눈 주변이 불로 지진 듯 뜨거웠다.
얼마나 지난 걸까. 그가 정신을 차린 듯 얼굴을 떼어 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들은 행인들 무리에서 외딴 섬처럼 존재했다. 시안나의 시선이 다시 몽롱한 디트리히에게 닿았다.
“디트리히. 우리가 여기 왜 있는지 기억나니?”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으려고…….”
디트리히가 잠긴 목소리로 떠듬떠듬 대답을 돌려주었다. 이제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봐.”
시안나는 휙 일어서더니 두 사람을 배경으로 서 있는 선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디트리히의 손이 그녀를 붙잡으려 쭉 뻗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놓쳐 버렸다.
그가 허공을 잡은 손을 느릿하게 쥐었다 펴락 하는데, 딸랑 소리가 울렸다.
시안나는 손에 토끼 인형을 들고 있었다. 반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그에게 토끼 인형을 건네주었다.
“어릴 때처럼 토끼 인형을 가지고 있으면 좀 괜찮아질까 싶어서. 아니면 나라고 생각해도 되고.”
디트리히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고작 토끼 인형 가지고 안정을 되찾을 리 만무했다.
그래도 눈앞에 있는 여성이 우울해하는 모습도 싫었기에 그는 토끼 인형을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축축하고 보들거리는 감각이 심장 부근에 닿자 기분이 묘해졌다.
자세히 보니 눈도 커다랗고 까만데다 코랑 입도 작고 오밀조밀해서 그녀가 연상되기도 했다. 인형이 조금 특별해 보였다.
“어때? 괜찮아?”
“……몸에 기억이 남은 탓인지,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시안나가 일어섰다.
“그럼 이제 가자. 우리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두 사람은 더는 손을 잡지 않았다. 둘 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분히 정리하니 목 뒤가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
그날 밤.
“어떻게 아슈토르 저택에 돌아왔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잠시 산책하러 나갔던 시안나는 식을 줄 모르는 제 뺨을 꾹꾹 누르며 1층 계단을 올라갔다. 비를 맞은 몸이 차게 식기는커녕 후끈거려서 더울 지경이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디트리히의 온기를 더듬듯 눈썹 아래를 지분거렸다. 침대에 누울 때까지도 샐쭉 올라가 있던 입술이 곧이어 내려갔다.
“디트리히. 분명 천둥 치는 날, 무슨 일이 있던 게 분명하지?”
그녀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빗속에서 몸 전체를 벌벌 떨 정도로 헐떡이던 디트리히. 공황에 빠진 모습 위로 태풍이 내리칠 적 침대 위에 올라오던 디트리히가 겹쳐졌다.
“어릴 적엔 단순히 천둥을 무서워한다고 여겼는데…… 저주에 풀리고 나서도 트라우마는 지워지지 않는 건가?”
하지만 상념은 다시금 떠오르는 눈꺼풀에 닿는 입맞춤에 사라졌다.
화르르. 자꾸만 디트리히의 커다란 손의 감촉과 숨결이 제멋대로 재생되었다.
“디트리히는 에르마야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
이혼도 하지 않고,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해 주겠다고도 했잖아. 그런데 왜 내게…….
그때, 서러운 여성의 음성이 시안나가 올라가는 복도의 적막을 깨뜨렸다.
“공작님, 주무세요?”
어두운 복도, 여성이 들고 있는 등잔불이 불처럼 타오르는 머리칼을 비추었다. 에르마야였다.
그녀는 엉덩이와 가슴이 부각되어 육감적으로 보이는 슈미즈를 입은 채 디트리히의 방문을 노크 중이었다.
“지금 들어갈게요, 어라?”
에르마야가 애처롭게 문고리를 돌렸지만 열리지 않았다. 안에서 잠근 듯했다.
결국 에르마야는 입술을 사리물더니 옆방으로 걸어갔다.
탁. 문이 닫히고 계단에서 삐죽 둥그런 연둣빛 정수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안나는 문이 닫힌 에르마야의 방문을 응시했다. 그녀는 괜한 기대감이 가슴이 쿵쿵거렸다.
“혹시나 디트리히는 에르마야에게 관심이 없는 게 아닐까? 에르마야에게 여주인의 업무를 맡기지 않는 게 그녀를 밀어낸다는 증거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