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
그날 밤. 시안나는 베개에 머리를 누일 때까지 생각을 거듭했다.
그녀가 읽은 소설 속에서 예언이라고 불릴 만한 게 있었는지, 혹시 소설 속에서 관련된 단서가 있었는지 머릿속을 훑었다.
불행하게도 아침이 되어서까지 예언서에 관한 비밀은 풀 수 없었다.
애초에 예언서가 정말 존재하는 걸까? 이 세계에 미래를 예측하는 건 신의 예언뿐이었다.
성녀인 에르마야만이 들을 수 있는 바로 그것 말이다.
“지금 에르마야와의 관계가 최악이라 물을 수도 없고……. 차라리 건국 신화나 고대 신화를 찾아볼까?”
시안나는 턱에 주름이 잡힌 채 스튜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왕궁 도서관을 떠올렸다.
수도 중심부에 위치해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왕궁 도서관은 고대로부터 내려왔다는 책도 비치되어 있었다. 별명이 박물관일 정도다.
“도서관에 들를 채비를 해야겠어.”
그렇게 방을 나서 계단을 내려가는데, 계단을 올라오는 디트리히와 떡하니 맞닥뜨렸다.
모자에 단정한 크림색 드레스를 입은 시안나의 차림에 디트리히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또 브라움, 그 평민의 집에 가시는 겁니까?”
“아니. 도서관에서 찾아볼 게 있어서…….”
디트리히의 무심했던 얼굴이 거짓말처럼 일그러졌다. 그가 돌연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애끓는 목소리를 냈다.
“제발……. 혼자 다니시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누님께서 다시 사라지기라도 하면……. 저를 미치게 만들 작정입니까?”
다시 사라져?
시안나의 의문은 어깨를 짓누르는 악력에 산산조각이 났다.
억센 힘에 짓눌리며 검은 머리칼 아래로 찬연한 황금색 눈동자가 광기로 일렁이는 게 보였다. 시안나는 두려움이 치솟았다.
“부디 제게 누님과 함께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십시오.”
정중한 말이었지만 얼굴 근육은 뻣뻣하게 굳은 채였다. 손아귀의 힘 또한 살이 찢어질 듯 따가웠다. 눈물이 핑 고였다.
“읏, 디트리히, 아파, 떨어져!”
팔 관절이 부러질 것 같아 소리치자 그는 사로잡힌 무언가에 깨어난 것 같았다.
그가 신음을 흘리며 손수건으로 시안나의 눈가에 맺힌 이슬을 푹푹 찍어 냈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겁박할 땐 언제고 지금은 온순한 강아지 같았다. 안색을 살피며 전전긍긍하는 꼴이란.
그 모습이 애처로워 시안나는 화를 내야 할지 괜찮다고 만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어깨가 한숨으로 들썩였다.
“하아, 다신 그러지 마.”
“죄송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누님마저도 어떻게 되어 버리면……,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자꾸만 가족이 단 하나만 남았다고 내세울 건 뭐람. 디트리히는 어떻게 자신을 공략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젠 도리어 시안나가 까만 머리칼을 쓸며 침울해 보이는 디트리히를 달랬다.
“이젠 아프지 않아. 그런데 난 자료를 찾으러 도서관에 가는 거거든. 애먹을 것 같으니 시간 괜찮으면 같이 가든가.”
그녀의 승낙에 음울했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녀 말고는 어떤 이도 그에게서 이런 웃음을 끄집어낼 수 없을 것이다.
시안나는 괜스레 이마가 뜨끈해졌다.
“없는 시간도 만들어 내겠습니다.”
디트리히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이젠 온몸이 쿠키처럼 바싹 구워지는 것 같았다.
“늦겠다. 어, 얼른 가자!”
시안나는 누가 봐도 사과 같다고 느낄 만한 얼굴로 마차에 올랐다.
살인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러 가는 게 무색하게 하늘은 화창하고 나무는 춤을 추는 듯 흔들렸다.
시안나는 피를 본 현장의 현실감이 붕 떠 현실감을 붙잡으려 안간힘썼다.
그러다 문득 디트리히에게 예언서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디트리히. 혹시 예언서라는 걸 아니?”
“예언서라고요?”
디트리히의 무덤덤한 미간이 틀어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구나. 사실 예언서라는 책이 있는지 찾을 거거든.”
시안나는 기대하지도 않았건만 그의 대답을 듣곤 축 늘어지는 어깨에 애써 힘을 주었다.
***
마차는 빠르게 수도 중앙에 다다랐다.
보도블록이 깔린 큰 도로가 모습을 드러내고 양옆으로 줄 세워진 상점과 스테인드글라스가 보이는 건물이 나타났다.
드레스 상점 앞에서 양산을 든 채 구경하는 귀부인, 거리를 청소하는 청소부, 그 옆을 지나가는 짐을 잔뜩 인 당나귀 등…… 수도 중앙부답게 거리는 행인들로 북적였다. 활기찼다.
복잡한 군중들 너머로 교회 첨탑만큼 우뚝 솟은 아치형 도서관 지붕이 보였다.
“와아, 엄청 커다랗구나.”
디트리히와 도서관에 발을 들인 시안나는 감탄을 내질렀다. 과히 고대 박물관이라는 별명을 지닌 도서관다웠다.
아기 천사와 벌거벗은 남자가 그려진 아치형 천장, 끝을 알 수 없이 무수히 많은 책장이 금빛을 받아 반짝이는 게 꼭 신성한 교회 같기도 했다.
감탄은 잠시, 넓은 도서관에서 자료를 뒤질 생각을 하니 정신도 아득해졌다. 일주일은 족히 걸릴 것이다.
“사서에게 건국 신화와 관련된 책을 물어야겠어.”
“제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저만 따라오십시오.”
어라? 디트리히가 어떻게 왕궁 도서관을 꿰뚫고 있는 거지?
혹시 저주에 풀린 후에 다녀간 적이 있는 건가?
반신반의하며 따라갔는데, 정말 그녀가 찾는 책이 꽂힌 책장에 떡하니 도달했다.
시안나는 두 팔 가득 안아야 할 정도로 커다란 책을 들었다.
그렇게 뒤뚱뒤뚱 걷고 있는데 갑자기 책이 가벼워졌다. 어라?
“제발 제게 부탁하십시오. 저는 장식입니까?”
디트리히는 시안나가 끙끙 싸매던 책을 가볍게 한 손으로 쑥 들어 올렸다.
그녀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잘못하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저에게 맡기십시오.”
저주가 풀리고 나니 정말 그는 훨씬 어른인 남자 같았다. 이렇게 힘의 차이를 느끼니 특히 그랬다.
누가 보면 디트리히가 저보다 연상이라 착각할 것 같았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시안나는 묘한 설렘을 꾹 누르며 착석한 후 책과 씨름했다.
한참 뒤, 시안나는 두꺼운 책을 퍽 덮었다. 그녀가 작게 꿍얼거렸다.
“하아……. 전부 고대 신이 열 명의 병사로 백만 장정을 무찔렀다, 이런 이야기밖에 없잖아. 게다가 예언서에 관한 단서도 없고.”
건국 신화에는 흔한 사랑, 질투, 수도가 번창하게 된 이유 등이 적혀 있을 뿐, 예언하는 책이나 살인 사건과 결부 지을 이야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소설 속 내용도 단 한 가지도 없고.
등허리를 펴는 시안나를 지켜보던 디트리히가 시안나가 보던 책을 제 앞에 끌어당기며 걱정스레 타일렀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응? 이제 겨우 책 한 권 본 건데…….”
“요즘 자주 출타하셔서 그런지 고단해 보이십니다. 걱정되니 제게 맡겨 주십시오.”
뜨끔. 괜히 카릴과 밖으로 나간 게 걸릴까 봐 시안나는 호의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디트리히마저 팔을 걷어붙였음에도 단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 예언서라는 걸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습니까?”
순간 닐 크라운과 에르마야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게…… 알 만한 사람은 날 싫어하는 데다 책 행방이 묘연해서. 원래는 긱스 공작님 서재에 있었는데 연기처럼 증발한 거거든.”
“……저택에 있는 쥐새끼가 그 책을 가져갔다는 소리군요.”
디트리히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결국, 두 사람은 별 소득도 없이 폐장 시간에 쫓겨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헉,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잖아?”
두 사람이 도서관을 들를 때만 하더라도 쾌청했던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시안나의 어깨를 주물러주던 디트리히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그녀에게 제안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함께 수도 구경을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구경? 곧 비가 내릴 날씨인걸?”
곧 먹구름 낀 하늘처럼 디트리히의 잘생긴 얼굴에도 그림자가 졌다.
“최근 누님과 둘만의 시간을 가진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주에 풀린 뒤, 디트리히는 시안나에 관해서 청할 땐 과장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녀가 무어라고 햇빛을 모아 조각한 것 같은 황금색 눈동자가 풀이 죽느냐 말이다.
“싫습니까?”
눈꺼풀을 내리고 처연하게 되묻는 모습이 치명적으로 아름다웠다.
푸시시. 결국 시안나는 붉어진 고개를 조금 내렸다.
“그럼 기분 전환 겸 다니는 것도 좋겠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디트리히는 그녀만 있으면 전부 필요 없다는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가실까요? 누님?”
나중에는 아예 연애하는 것같이 자신의 팔에 팔짱을 끼게 만들었다.
으윽, 안 되는데! 코피 터진다고!
주변은 금세 어두워졌다. 오른쪽 상점들에서 나오는 황금색 빛들과 단단한 팔뚝의 감촉.
그는 이 수도 한복판을 성의 무도회장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시안나는 가슴이 세차게 뜀박질 치는 걸 애써 무시했다.
“그, 그럼 드레스 구경이나 할까.”
시안나와 디트리히는 무수한 행인을 헤치며 가게를 둘러보았다.
아르네 영애가 추천한 부티크도 들렀고, 건국제에 무시당하지 않으려 새하얗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도 하나 장만했다.
물건을 산 것보다 디트리히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덕에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몸에 충만감이 가득 차오르는 가운데, 문뜩 할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아슈토르가를 떠난다는 이야기였다.
“디트리히. 나 거취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데…….”
수도는 북적거렸다. 자꾸만 피해서 걷는데도 군중과 어깨가 부딪쳤다.
거치적거려 시안나가 옆으로 한 걸음을 옮겼는데, 손끝이 스쳤다. 디트리히의 손이었다. 그녀는 어느새 디트리히의 손을 잡고 있었다. 팔짱이 너무 친근했던 탓이었다.
그 작은 깨달음만으로도 시안나는 전신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고 보니 디트리히의 손은 헤이스처럼 굳은살이 없구나.’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 손가락을 좀 더 밀어붙였다. 깊숙이 찔러진 손바닥 사이의 상처가 손끝에 닿았다. 자객과 싸웠을 때 생긴 검상이었다.
옆에 있던 디트리히의 팔이 부자연스럽게 움찔거렸다. 시안나의 손가락이 눈치 없이 그의 검상 위를 더듬었다. 길게 찢어진 상처에 두꺼운 새살이 올라와 있었다.
‘아팠겠다…….’
순간 시안나는 자신이 성녀 에르마야로 빙의하지 않은 게 못내 원망스러웠다.
그녀가 방심한 사이 덥석 손이 잡혔다. 먼저 움켜쥔 주제에 덜덜 떨리는 손은 뜨거웠다.
“디트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