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52화 (52/70)

[52]

오해였다. 헤이스가 그녀의 어깨를 마구잡이로 흔들자 시안나가 소리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왕께서 좋아하는 사람은 에르마야라고!”

“그렇, 습니까? 왕께서 에르마야 님을…….”

헤이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을 읽었던 자신은 카릴이 에르마야에게 첫눈에 반한 게 당연한 일일지라도 결국 결혼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소리가 놀랄 법하건만 퍽 태연한 반응이었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지 그가 다시금 손을 힘주어 잡았다. 꼭 거미줄이 접착제처럼 달라붙는 것 같은 압력이었다.

“기억나십니까? 와인 창고에서 제가 시안나 님을 처음 찾아냈을 적 말입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시안나는 가만히 뜀박질치는 역동적인 가슴을 느끼며 과거를 회상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먼지가 내려앉은 새까만 와인 창고. 누구도 발걸음 하지 않는 그곳에서 문이 열리고 가느다란 빛줄기가 시안나의 얼굴 위로 나타났다.

이윽고 눈을 덮치는 무수한 빛 속, 찬란한 주황빛 머리칼의 헤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놀라운 건 우연이 아니라 헤이스가 그녀를 찾아 헤매었다는 사실이다. 처음 안겼을 땐 소년의 체격을 벗어나지 못한 가슴팍이 지금은 단단하고 커다랬다.

멀리서 찌롱찌롱, 새 울음이 울렸다. 헤이스는 시안나의 뺨 위에 손을 포개고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왕께서 함께시라면 저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다만 앞으로 일어나는 일은 사소하더라도 전부 의논해 주신다고 약속하십시오.”

헤이스는 당신을 보지 못한 시간 동안 심장이 파괴되는 것처럼 아팠다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그녀가 부담스러워 달아나지 않을까 불안했다.

계약 약혼을 파기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도 조마조마하며 겨우 내뱉지 않았나.

헤이스의 눈동자가 애절하게 흔들렸다.

시안나는 어마한 악력에 손이 뽑혀 나갈 것 같았다.

“……윽, 알겠어.”

마지못해 대답하자 그제야 그가 풀어 주었다. 헤이스와 떨어진 손목을 확인하니 시뻘건 자국이 맺혀 있었다.

시안나가 붉게 달아오른 손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일이 있으면 말할 테니까…… .”

“시안나 님!”

그때, 멀리서 미셰리가 치맛바람을 나부끼며 달려왔다. 헉헉 숨을 몰아쉰 그녀는 전보를 건네주었다.

무려 왕가의 인장이 박힌 편지였다.

***

다음 날, 그녀는 예정에 없는 밖에 나갈 채비를 했다.

‘갈 곳이 있다. 준비하고 기다리도록.’

편지는 카릴이 적은 두 문장으로 끝이었다.

어차피 브라움의 집에 가 봤자 수확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아 흔쾌히 따라나서기로 했다.

저택 정문에 나온 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왕가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가 햇볕이 내리쬐는 정원과 수면에 물빛이 반짝이는 분수대를 지나 그녀 앞에 멈추었다.

창문에 처진 커튼 사이로 카릴의 옆얼굴이 보였다.

마차 문이 열리고 시안나가 탄 후 착석하자 다시 마차 바퀴가 굴러갔다.

그녀는 예의를 갖춰 거만하게 턱을 괸 채 앉아 있는 카릴에게 인사한 뒤, 곧바로 궁금한 점을 물었다.

“혹시 그동안 수확은 좀 있으셨나요?”

“아니, 목격자도, 다른 흉기도 없고 수사가 영 난항이야. 백작은?”

“브라움의 집 근처에서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어요. 닐 크라운 후작이요.”

시안나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지자 그가 계속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저를 보자마자 유령이라도 본 얼굴로 겁에 질려 도망가더군요. 브라움이 그렇게 된 데에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였어요. 그를 추적해야 해요!”

그녀의 말을 경청하던 카릴의 한쪽 입매 끝이 치솟았다.

“마침 잘됐군. 나도 그를 보러 가는 중이거든.”

두 사람의 목적지는 그녀가 말한 남자, 크라운 후작가였던 것이다.

“크라운 후작가는 왕가와 친분이 두텁기도 하지. 그는 믿음직스러운 내 수족이거든. 그런 그가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고 전보를 부쳤더군.”

“이상한 일이요?”

“가 보면 알게 되겠지.”

그녀를 보고 다리를 절던 닐의 속마음을 알아낼 절호의 기회였다. 시안나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출발한 지 한 시간쯤 지난 시각. 마차는 커다란 돌부리에 걸리는 일 없이 무사히 크라운 후작가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자 아슈토르 공작가 못지않게 커다란 하얀 대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택 앞마당에서 닐과 고용인들이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주군을 뵙습니다.”

어제 시안나를 보고 까무러치던 닐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것도 잠시, 시안나를 발견하자 반듯했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그는 카릴에게 어째서 그녀를 데려온 건지 눈빛으로 물었다.

“그녀는 내 곁에 있어야 하거든.”

카릴이 모호하게 대답했지만 닐은 그것만으로도 알아들었다는 듯 표정을 고쳤다.

시안나도 조금 무례한 자라고 여겼지만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 사건의 진상을 아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세 사람은 저택으로 들어갔다. 화강암으로 된 바닥에 구두 굽이 탁탁 맞닿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곳곳에 유칼립투스가 산재해 정원을 연상시키는 산뜻한 응접실에 당도했다.

바닥에 박제된 곰 가죽을 밟고 들어온 시안나는 닐의 맞은편에 있는 푹신한 가죽 소파에 앉았다. 곧 시녀가 은은한 캐모마일 향기가 나는 차를 따라 주고 물러났다.

잠시의 침묵 후, 그가 공포에 떨며 울먹임 비슷하게 말했다.

“그자, 그자가 찾아왔습니다…… 그 남자가.”

참담한 얼굴을 한 닐이 시안나와 눈을 마주치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는 비정상입니다. 아무리…….”

흘긋, 또다시 닐의 떨리는 동공이 시안나와 맞부딪쳤다.

“왕이시여. 부디 단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시안나는 퍽 샘이 올랐다.

대체 왜 내 눈치를 보는 건데?

카릴은 이번엔 ‘흠……’ 하는 소리를 작게 내뱉더니 특유의 거만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어 문을 가리켰다.

“백작. 후작이 많이 불편한가 봐. 잠시 자리를 피해 주면 고맙겠군.”

그럴 수가…….

시안나의 입꼬리가 끝을 모르고 아래로 내려가는 걸 보면서도 카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시안나는 차 한번 입에 대지 못하고 응접실에서 쫓겨났다.

그녀가 응접실 문을 쾅 닫고 쭈그려 앉은 것도 잠시, 그녀가 허공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내가 이대로 포기할 것 같아?”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악에 받치는 법. 시안나는 얼른 응접실 문에 귀를 갖다 댔다.

문과 테이블 간의 거리가 있는 탓인지 회화가 웅얼거렸다.

“그 남자가…… 경고…….”

뭐라고 하는지 안 들리잖아. 그녀는 귀를 문에 꾹 눌렀다.

드문드문한 말이 약간 선명해졌다.

“앞으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예언서…… 접근하지 말라는…….”

예언서?

순간 시안나의 부유하는 기억 속 파편 한 조각이 붕 떠올랐다. 예언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았다.

“모든 건 그 책대로 예언이 맞다면…….”

진상에 다가가는 기분이었지만 그 이후로는 문 뒤로 정적이 흘렀다. 그녀가 뚫고 들어갈 듯 귀를 바짝 대는데, 문이 휙 하고 젖혔다.

“으악!”

문에 어깨를 기대고 있었기 때문에 시안나의 무게 중심이 휘청거렸다.

이대로 지면에 넘어진다!

눈을 찔끔 감았는데, 배에 단단한 무언가가 그녀를 받들었다.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안나가 대리석 바닥과 입을 맞추기 전, 카릴이 그녀를 붙잡은 것이다.

그의 입에 짓궂은 웃음이 맺혔다.

“문에 쪼그려 앉아서 뭘 하고 있던 거지, 백작? 설마 엿듣기 같은 치졸한 짓을 벌이고 있던 건 아니겠지?”

“그, 그게.”

“문이 두꺼워서 잘 안 들렸을 테지만 말이야. 크라운 후작가의 응접실은 비밀 이야기를 나누기 딱 좋거든.”

카릴이 그녀의 꾀를 꿰뚫고 있었다는 듯이 눈썹을 까닥거렸다.

이럴 수가. 카릴에게 놀아난 거였다니.

시안나는 본의 아니게 패배감에 휩싸였다.

용건을 마친 후, 두 사람은 마차에 올랐다. 카릴의 맞은편에 앉은 시안나는 퍽 불만스러웠다.

“응접실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신 것인지 여쭈어도 되나요?”

카릴이 곤란하다는 듯이 잘생긴 눈썹을 긁적거렸다.

“미안. 닐이 꼭 다른 이에겐 비밀이라고 신신당부해서 말이지.”

시안나는 기가 찬다는 듯 카릴을 보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뭐야? 이렇게 비밀을 만들 거면 날 왜 불러들인 거야?

‘그럼 나도 알게 된 사실을 비밀에 부쳐야지. 흥.’

사실 시안나는 마차에 오르기 전까지 예언서에 대해서 골몰했다. 그리고 빛바랜 옛 기억 하나를 끄집어 올렸다.

단검에 찔려 죽어 가는 긱스가 중얼거린 책. ‘예언서’란 그 책이 아닐까?

책을 읽자마자 악마적인 힘에 홀려 반드시 디트리히는 저주에 걸려야 한다고 말했던 긱스. 그리고 방금 나왔던 예언서라는 단어.

‘미래’라는 단어를 넣으니 두 연결고리가 하나로 묶였다. 긱스를 미치게 만들었던 책은 미래를 예언하는 내용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예언서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째서 미래의 일이 적혀 있는 걸까?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아슈토르 공작가였다.

“그럼 다음에 보지.”

카릴은 시안나를 아슈토르 공작 저에 내려 주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혼자 남은 마차 안. 소파에 느른하게 등을 기댄 카릴이 낮게 중얼거렸다.

“미안하군. 백작을 끌어들일 예정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자꾸 눈앞에서 얼쩡거리면 이용하고 싶어지잖아.”

그의 시선이 현관으로 들어가는 시안나에게 걸렸다. 입매를 씩 당기자 험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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