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51화 (51/70)

[51]

“디트리히?”

“잠시만. 몇 초만이라도 이대로 계셔 주십시오. 누님.”

“이, 이런 건 에르마야가 있잖아?”

“그 여자 이름은 꺼내지도 마십시오. 잠시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가 으르렁거리며 그녀를 와락 껴안고 코를 목덜미에 비비었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누님뿐입니다.”

그 말에 시안나에게서 반항의 기운이 확 사라졌다.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이 들떴다.

가족처럼 소중하다고 말했었지.

커다란 쇠망치가 두들기는 듯한 심장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안겼다.

그렇게 두 사람은 행인이 지나다니는 인도 한가운데서 한참 동안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그들이 있는 골목의 맞은편. 커다란 담벼락 너머로 누군가 포옹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시안나는 알지 못했다.

***

다음 날.

첫날부터 디트리히와 함께 수사하기로 한 약속은 깨어지고 말았다. 디트리히는 오전부터 연병장에서 병사들의 훈련을 직접 지도하는 일정이 잡혀 있었다.

결국 시안나는 혼자 브라움의 집으로 향했다. 카릴이 이미 탐문을 완료했다지만 놓친 실마리가 있지 않을지 그녀 독단적으로 알아볼 생각이었다.

“어라?”

브라움의 집 앞에 마차가 다다랐을 때였다.

창문 커튼을 슬며시 젖힌 그녀의 시선이 브라움의 집 앞을 서성이는 남자에게 꽂혔다.

선선한 가을 하늘 아래로 태양처럼 밝은 금빛 머리카락에 화려한 장식이 수놓아진 하늘색 르댕 코트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은은한 하늘색으로 빛나는 코트는 척 봐도 비싸 보였다.

저런 귀족이 뒷골목에서 입에 궐련을 문 채 살인 현장을 배회한다면 수상쩍을 것이다.

“누구지?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그는 가늘게 찢어진 눈으로 살쾡이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안나는 마차에서 내린 뒤 남자에게 조심스레 접근했다.

“저기, 혹시 브라움 씨와는 아는 사이신?”

“히익!”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등이 유령이라도 만난 듯 흠칫 튀어 올랐다. 그러다 그녀를 발견하곤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이 채신머리가 없다고 여긴 건지 큼큼, 헛기침했다.

“누구…….”

시안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동공이 확장되었다.

“당신은 아슈토르가의 공녀?”

궐련을 바로 물던 남자의 눈빛이 그녀를 알아보곤 섬뜩하게 변했다. 알 수 없는 살기에 등에 오한이 들 정도였다.

‘나를 알고 있어? 무도회에서 본 적이 있던가?’

이윽고, 이전에 누군가가 주최한 정찬에서 남자를 소개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크라운 후작님 아닙니까.”

닐 크라운. 그는 헤이스의 가문과 비슷한 규모의 후작가로 왕정파 소속이었다. 유명 인사지만 속한 계파가 달라서 드문드문 인사만 나누는 사이였다.

친근함을 비치는 시안나와 달리, 닐의 얼굴은 더욱 두려움에 젖었다. 그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입에 물린 궐련을 빼냈다.

“공녀가 여기에 왜……! 나, 날 지금 죽이려고?”

“네?”

이건 또 무슨 소리람? 게다가 사람을 저리 귀신 보듯이 쳐다보다니.

이 남자가 브라움에 대해 큰 비밀을 감추고 있다고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대화로 풀어요, 우리.”

시안나가 남자를 진정시키려 손을 뻗었지만 역효과였다.

그는 오히려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제 손에 독이라도 묻어 있는 줄 알고 쳐다보았다.

겁에 질려 다리까지 벌벌 떠는 닐이 크게 소리쳤다.

“그따위 미래로 날 겁박할 수 있을 것 같아?”

“저기요? ……미래라고요?”

방금 엄청난 발언이 나왔던 것 같은데. 그게 뭔데요? 저도 좀 알려 줘요!

남자는 궐련을 든 손을 휘휘 저으며 그녀를 저지했다.

“더는 가까이 오지 마. 저리 가라니까! 옳지.”

시안나는 한 걸음 더 다가서려 했으나 이내 물렸다. 남자는 여전히 불신 어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더니 등을 휙 돌렸다.

“그딴 책 따위, 찢어 버릴 거니까.”

그리고 기다란 터널 같은 골목 끝을 혼비백산 줄행랑쳤다.

쌀쌀한 골목에 그녀의 그림자가 쓸쓸하게 기울었다. 뒤에 낙엽 한 장이 휘날렸다.

시안나의 움켜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니, 알고 있는 것만 묻는다니까!”

시안나가 불 뿜는 용처럼 외치자 담벼락에 앉아 있던 비둘기가 퍼드덕 날갯짓하며 날아갔다.

골목 끄트머리에서 사라진 닐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하아, 마음먹었던 대로 탐문 수사나 할까?”

하지만 별반 소득이 없었다.

이웃과 쥐꼬리만큼도 교류가 없었던 듯, 브라움이 누구냐며 왜 자기한테 묻냐며 신경질적인 고함만 되돌아왔다.

“게다가 난 치안대도, 아무것도 아니니 묻는다고 대답해 줄 리가…….”

닐 크라운이 했던 증언이라도 얻은 게 어디야.

그녀는 돌아가는 마차에서 ‘미래’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

아슈토르 가문에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식당으로 향했다. 탐문 수사를 하느라 목이 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얼음은 보관이 불편해 식당에 비치되어 있었다.

“휴.”

꿀꺽. 꿀꺽. 청량하고 차가운 물줄기가 식도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말라비틀어진 잡초 같던 몸에 활력이 돌았다.

더 마시고 싶어.

그녀가 다시 한 번 컵에 물을 따르는데, 누군가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올린 시안나는 낭패감에 휩싸였다. 식당에 입장한 남자는 디트리히의 결혼 문제 때문에 다투었던 헤이스였다.

멍하게 보느라 그만 컵에 물이 흘러넘쳐 버렸다. 그녀가 황급히 근처에 있던 냅킨으로 식수를 닦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헤이스는 스스럼없이 시안나에게 다가오더니 냅킨을 빼앗고 테이블 위로 쏟아진 물을 훔쳤다.

태연한 척하고 싶었는데 속내를 빤히 들킨 것 같아 창피했다.

“괜찮은데……. 고마워.”

시안나는 조금 볼멘소리를 내며 그가 가길 기다렸지만 헤이스는 테이블 위에 쏟아진 물을 전부 닦았음에도 식당을 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볼일을 마친 시안나가 자리를 피하려 하자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시안나 님. 잠시 시간 되십니까.”

미묘 복잡한 마음이 속에서 난동을 부렸다.

뿌리칠 수도 있었지만, 헤이스와 서먹해진 채로 있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긱스 때문에 힘들 때 어깨를 내어준 그였으니까.

결국 시안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두 사람은 잘 가꾸어진 푸릇푸릇한 잔디 위를 거닐었다.

원래는 정원을 가려고 했지만, 혹시나 디트리히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오해할까 싶어 뒤뜰로 향했다.

저택의 그늘이 드리운 뒤뜰에서 신선한 풀잎 향이 스몄다. 헤이스는 시안나의 발걸음에 맞추어 그녀가 뒤처지지 않게 배려했지만 그럼에도 불편한 자리였다.

먼저 말을 꺼낸 건 헤이스였다.

“어디에 다녀오신 것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냥, 산책 좀 했어.”

무성의하고 급조한 대답은 퍽 허술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쏴아아…… 나무 흔들리는 소리만이 지나갔다.

헤이스가 도무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멈춰 서서 그녀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시안나 님. 에르마야 님께 결혼해 달라고 부탁드렸던 것, 백번 잘못했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는 그녀의 냉대를 받고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었다. 근 며칠간 잿빛에 잠긴 세상에서 서서히 죽어 가는 기분이었다.

헤이스의 주황색 정수리를 보며 시안나는 속으로 끙끙 앓았다.

사실 언제까지 헤이스와 척질 수도 없었다. 헤이스와는 대외적으로는 약혼 관계였고, 모든 걸 거부하고 싶을 만큼 원망스럽진 않았다.

결혼은 어차피 긱스가 밀어붙이는 사안이라 이루어졌을 게 뻔했다.

한 번쯤 용서해 주는 건 괜찮겠지.

“하아, 알겠어. 다음부턴 날 속이지 마.”

“……!”

헤이스는 제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숙였던 허리를 꼿꼿이 편 그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시안나를 확 끌어안았다.

“시안나 님! 사랑합니다!”

“숨 막혀!”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 한동안 못다 한 회포를 풀었다.

당연히 어제 있었던 일도 포함이었다. 전부 들은 헤이스는 자못 심각한 얼굴로 자리에 섰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살인 사건에 휘말리셨다고요?”

“뭐, 요약하자면 그렇지.”

다행히 냉랭했던 공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태평하게 대꾸하지 마십시오.”

촐랑거리는 강아지 같던 것도 잠시.

격분으로 얼굴을 구긴 그가 시안나의 팔목을 끌어당겨 제게 안기게 했다. 시안나가 바동거리는 와중에도 헤이스는 덩굴처럼 그녀를 옭아맸다.

둥근 가슴을 짓누르는 두꺼운 가슴팍에서 따뜻한 체온이 전염되었다.

헤이스는 고개를 내리고 시안나의 정수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제길. 제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시안나 님께선 위험에 처해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저는.”

시안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가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데에 죄책감을 하등 느낄 필요가 없었다.

“헤이스가 내 호위도 아닌데 뭘.”

어깻죽지를 부드럽게 쓸며 헤이스를 타일렀다. 다만 그건 헤이스의 심장을 더욱 조이는 일이었다.

“저는 시안나 님의 약혼자입니다.”

그의 안면은 단호했다. 시안나는 조심스럽게 거절을 표했다.

“약혼 말고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야. 디트리히가 있으니 헤이스가 도와줄 필요 없어.”

디트리히, 디트리히. 그녀는 항상 그의 이름만 입에 올렸다.

그의 호위 기사답지 않게 발끈한 헤이스의 눈이 불타올랐다.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를 호위로 대동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아니,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셔도 따라갈 겁니다.”

카릴에 이어 디트리히, 이젠 헤이스까지 수사하겠다고 달려들다니, 곤란했다. 왜 다들 나랑 같이 다니려 안달이람.

“사실…… 이건 비밀인데, 카릴 왕께서 이번 수사에 대동하시기로 했어.”

카릴이라는 이름에 헤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왕과 함께시라고요? 어째서……. 설마 왕께서 시안나 님에게 눈독이라도 들이시는 겁니까?”

왜 이야기가 또 그렇게 흘러가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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