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48화 (48/70)

[48]

시안나는 결국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이유와 그녀가 그를 죽일 거라고 여긴 이유를 가슴속에 묻었다.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이 행복이 산산이 조각날 것 같아서.

시안나가 화제를 돌렸다.

“그럼 앞으로 디트리히가 어떻게 할 건지, 기억은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해. 이건 빠짐없이 이야기해 줘.”

디트리히의 마음은 잘 알겠다. 하지만 더 이상 그녀에게 그 무엇도 숨기는 건 없어야 할 것이다.

시안나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눈에 힘을 주었다.

디트리히가 잠시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제가 누님을 너무 오래 세워 두었군요. 차를 대접하게 해 주십시오.”

부탁한 건 시안나인데 목소리가 꼭 간청하는 사람처럼 그녀에게 매달렸다.

***

디트리히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결과, 그는 저주에 걸렸을 적 기억이 온전했다. 심지어 그녀가 의식하지 못한 사실조차 자세히 증언했다.

“누님께선 확실히 해산물을 좋아하셨습니다. 제가 먹질 않아서 억지로 먹었다고요? 그런 주장을 하기엔 항상 생선과 달팽이 샐러드로 가는 포크질이 잦더군요.”

“내가 달팽이를 좋아한다고?”

“모르셨습니까?”

두 사람 사이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디트리히가 놀리는 듯 이야기하자 그녀는 심장이 다 화끈거렸다.

시안나는 볼을 문지르며 열기를 식혔다.

“이제 기억에 대한 이야기는 됐어! 네 기억력이 나보다 좋다는 걸 잘 알겠으니까. 그런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잖아.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그렇죠.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았죠.”

시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중요한 일. 그것은 긱스를 죽게 만든 원흉, 카릴에게 복수하는 것일 터다.

긱스는 카릴에 의해 그의 명으로 사람을 죽인 것까지 모든 죄를 뒤집어쓴 채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 아마 이 뒤로는 소설 속처럼 두 남자가 에르마야를 두고 다투는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그런 시안나의 예상은 어김없이 빗나갔다.

“숲속에서 누님을 덮친 범인을 잡을 겁니다.”

“엉?”

“누님을 헤치려는 무리가 존재해서는 안 되니까요.”

물론 그 일도 중요하지만 아버지의 복수가 절실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시안나를 죽이려 한 당시 상황을 떠올리는지 뿌득 이를 갈고 있었다.

명백히 그녀가 우선이라는 태도였다.

“아, 사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일은 하나 더 있습니다.”

드디어 카릴에 대한 복수가 나올 모양이었다.

찻물에 비친 디트리히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이 흑진주처럼 번뜩였다.

“누님과 헤이스의 약혼을 파기시킬 겁니다.”

“뭐……? 그게 왜 암살자를 색출하는 것보다 중하다는 거야? 게다가 갑자기 파혼이라고?”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시안나의 어깨가 휘청거렸다. 왜 여기서 약혼으로 이야기가 방향을 튼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와중에도 디트리히는 여전히 단호한 낯으로 엄포했다.

“저는 이제 아슈토르의 가주입니다. 또 누님께선 누가 뭐래도 제 가족이십니다. 그러니 아슈토르가와 걸맞지 않은 한미한 가문과 맺어지는 건 공작으로서 허락할 수 없습니다.”

“허!”

시안나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기가 찬다는 웃음을 흘렸다.

자신을 아슈토르가의 일원으로 여겨 주는 건 고맙지만 왠지 그의 입맛대로 다루려는 묘한 압력이 느껴졌다.

“발루아로 가문을 남루하다 여기는 건 디트리히가 유일할 거야. 알아?”

발루아로 가문이 어떤 가문인가. 해상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는 데다 왕국에 몇 없는 후작가라 아슈토르가와 비교할 땐 작아 보이는 것뿐, 절대적으로 악평을 들을 만한 수준이 아니다.

명예도 있지, 돈도 잘 벌지. 사교계에서 1등 신랑감인 그를 주변에서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발루아로 가문이 작다면 결혼할 수 있는 가문이 퍽 많이 줄겠구나.”

“주는 게 아닙니다. 아예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 제가 마음에 차는 남자가 나타날 때까지 혼담은 거절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디트리히가 능청스럽게 대꾸하자 시안나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디트리히가 이렇게 농담을 하는 성격이었나? 소설 속이랑 별개의 인물 같잖아.’

눈매를 굳히고 그녀를 보는 통에 진담인지 농인지도 구별이 되질 않았다.

시안나의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너, 나를 평생 아슈토르가에 매어 둘 생각이니?”

“사실 본심은 그렇습니다. 마음 같아선 아침마다 누님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싶으니까요.”

이미 결혼한 남자가 외간 여자에게 내뱉을 말은 아니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디트리히는 이미 에르마야랑 결혼까지 했잖아?

“네 말대로라면 넌 이제 결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이혼하는 불운한 사람이 되는 거구나. 에르마야 부인도 네 성에 차지 않을 것 아니니?”

“이혼은 차차 생각할…… 예정입니다.”

디트리히가 난처해하며 입술을 문지르자 시안나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뭐? 차차 새앵각? 그럼 자기는 결혼해 놓고 왜 남의 연애에는 훼방인 건데?

자꾸 자신을 멋대로 주무르려 하자 화가 치밀었다.

“너무 제멋대로인 거 아니니? 설마 네가 말하는 가족은 구속하려는 구실이니?”

“토라지신 겁니까?”

“네가 남의 혼사를 멋대로 들쑤시는 폭군일 줄 몰랐어.”

그녀가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두어 번 내려쳤다. 씩씩거린 그녀가 소파에 등을 묻었다.

아무리 디트리히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에게 휘둘리는 건 사양이다.

그녀에게 덫으로 다가간 이유도 설명하지 않지 않았나.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차가 내뿜는 향긋한 향기가 채워졌지만 도저히 차에 입을 댈 상황이 아니었다.

‘하아. 이렇게 입씨름할 게 아니라 산재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잖아.’

먼저 입을 연 건 시안나였다.

“내 생각엔 나와 헤이스의 약혼보다 우릴 죽이려 했던 암살자가 최우선인 것 같은데, 어떻게 대처할 거니?”

결국 그가 한발 물러섰다.

약혼 파기는 진행할 거지만 겨우 대화를 시작했는데 여기서 사이가 틀어지는 건 곤란했다.

디트리히가 등을 앞으로 기울였다.

“자객의 목적은 누님이었습니다. 오늘부터 방을 비워 두십시오. 정말 시안나 누님이 목적이라면 그는 곧 아슈토르가를 방문할 겁니다. 그러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시안나가 싱긋 웃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내게 더 좋은 생각이 있거든.”

***

덜컹, 덜컹.

마차가 크게 흔들렸지만, 시안나는 무감한 얼굴로 차창 밖 풍경을 응시했다.

복작복작한 인파들을 배경으로 빽빽하게 늘어선 빨간색, 파란색 지붕들. 바람에 끼익하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빵 가게 간판. 술래잡기라도 하는지 고함을 지르며 뛰어다니는 아이들 옆으로 그녀를 태운 마차가 지나갔다.

활기가 넘치는 이곳은 상업이 발달한 로드브뤼셀의 수도, 이랄카르드였다.

“아직 가려는 곳은 먼 걸까?”

미셰리는 이틀 만에 쪽지에 적힌 이름을 발견했다. 딱히 신분도 높지 않고 흔한 이름이라 찾기 쉽지 않았을 텐데, 과히 아슈토르가의 정보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시안나는 재력을 과시하려 오팔 반지를 끼고 보트 햇을 꾹 눌러쓴 채 마차에 올랐다.

다행히 어지러운 수도 한복판에서 길을 잃지 않고 그의 집에 당도했다. 마차에서 내리자 고소한 귀리죽 냄새와 뒷골목 특유의 꿉꿉한 냄새가 코를 확 찔렀다.

그녀는 목적지인 남자의 집 앞에 섰다. 쥐색 벽돌집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는 걸로 보아 요리 중인 게 틀림없었다.

시안나는 나무 문에 손을 내렸다.

“계신가요? 브라움 씨?”

브라움. 그가 바로 그녀를 살해하려고 했던 숲속의 자객이었다.

그의 정체를 눈치챈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이름이 소설 속 에피소드에서 나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브라움. 카릴의 심복으로 그의 비공식적인 그림자 기사단 중 한 명이지.’

그림자 기사단이란 카릴이 부리는 사병으로, 지위, 성별, 나이를 막론하고 우수한 기사, 마법사들만 모아놓은 암살단이었다.

브라움이 나오는 건 디트리히가 의문에 적에게 취침 중 습격을 받는 에피소드에서다.

브라움은 디트리히의 숨통을 끊기 위해 몰래 아슈토르가에 침입하는데, 다행히 디트리히는 그를 무찌르고 배후가 여왕이라는 것을 밝혀 낸다.

‘브라움은 갈색 곱슬머리. 판타지 세계라 그런지 분홍색, 초록색 등……. 알록달록한 머리카락 색이 많지만 갈색 머리에 라면처럼 구불거리는 머리칼은 흔한 조합이 아니지.’

그래서 찢어진 복면 사이로 얼굴이 드러났을 때, 시안나는 자객의 정체가 브라움임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배후는 카릴이라는 건데, 대체 왜 날 죽이려고 하는 거지……. 뭐, 이제 곧 알 수 있겠지.”

시안나는 캐시미어 코트의 옷깃을 벌렸다. 검은색 코트의 안주머니에서 단도의 손잡이가 삐죽 튀어나왔다.

오팔 반지로 회유하는 게 실패할 때를 대비한 비장의 무기였다.

“그런데 정말 아무도 없는 거야? 저기요?”

쾅쾅!

답답한 나머지 문고리를 돌리며 덜컹덜컹 흔드는데, 문이 스르륵 열렸다.

“뭐야? 쇠고리로 잠근 게 아니잖아?”

시안나가 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창문이 나 있지 않은 내부는 그림자에 잠겨 있었고 기다란 복도 끝으로 새까만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문 앞에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시안나는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저, 브라움 씨? 대답이 없으셔서, 실례할게요. 계세요?”

쿵. 문을 닫자 시야가 암전했다.

눈앞이 숯덩이를 묻힌 것처럼 까맣게 변했다. 시간이 흐르자 서서히 물체를 구분할 정도의 빛이 망막에 맺혔다.

고요한 집 안 분위기에 위축된 시안나는 쥐새끼같이 살금살금 발뒤꿈치를 들었다. 까마득한 어둠 속에 사로잡혀 시간과 공간 감각마저 상실되었다.

멀리서 씌익씌익, 거리는 괴음이 들렸다. 점차 나아가자 솥단지에 치즈를 끓이는 느끼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치익. 집은 기역 자 모양으로 꺾여 있었다.

그녀가 모퉁이를 도는데 생고기 냄새가 코에 훅 끼쳤다. 생간 같기도 한 이상한 냄새에 시안나가 코를 막았다.

“뭐지? 비릿하고, 녹슨 쇠 같은 냄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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