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벌컥. 문이 열리고 시안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디트리히 있…… 아, 여기 있었구나.”
그만 맥이 빠진 시안나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식당이며, 정원까지 한 바퀴 돌아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디트리히가 설마 긱스의 집무실에 있을 줄이야. 아니, 집무실은 이제 공작이 된 디트리히 거지.
눈앞에 있는 남자는 본래 집무실의 주인처럼 공간과 조화로웠다.
까만 제복과 단정한 머리칼. 차분한 표정에 평소에 쓰지 않는 금빛 테의 안경을 낀 채 서류를 들여다보는 모습은 시안나를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시안나는 안경을 벗는 디트리히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책상에 펼쳐진 양피지가 시안나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시안나는 용무도 잊은 채 양피지 하나를 집었다.
“이건…… 영지민이 바친 세금에 관련된 장부고, 이건 왕국에 헌납하는 돈을 기입한 건가? 벌써 일을 시작하려는 거야?”
저주에 풀린 디트리히가 영지를 다스리는 건 마땅해 보였지만 조금 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 저주에 풀려 혼란스러운 게 많을 것 아닌가?
하지만 디트리히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을 빗나간 것이었다.
“누님, 혹시 몸은 괜찮으십니까. 어제 이마가 불구덩이였습니다.”
“엑?”
저도 모르게 괴상한 비명이 튀어 나갔다.
디트리히가 제 이마에 손을 댄 적이 있었던가. 밤새 끙끙 앓긴 했지만 디트리히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는 조금 즐거운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어제 몸이 편치 않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약을 드렸는데,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약을 줬다고……?”
그 순간, 머릿속에서 전구의 불빛이 팟 터졌다. 기억이 그녀를 푸르고 어두운 방 안으로 데려다 놓았다.
세차게 내리던 비, 낯선 인기척. 낮고 감미로운 남자의 울림.
곧 등이 붕 뜨는가 싶더니 그녀의 입술에 닿는 말랑한 살갗이 벌리라는 듯 더듬거리곤 깊게 물어 왔다. 모든 것이 끝난 후, 어둠 속에 묻힌 남자의 얼굴은 한시름 놓은 듯 보였다.
시안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말, 말도 안 돼……. 그게 꿈이 아니었다고……?’
푸시시……. 이마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가벼운 현기증마저 덮쳤다.
동시에 만감이 교차했다. 간호라는 건 그녀가 디트리히에게 해 주는 것이 받는 게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누님?”
“어제 일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고마워. 덕분에 지금은 몸이 괜찮은 것 같아.”
“……그렇습니까.”
시안나의 웃음은 인위적이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디트리히는 속이 빈 것 같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꺼져 가는 미소에 시안나는 속으로 ‘뭐가 아쉬운 건데?’라며 반문하고 싶어졌다.
“…….”
질식할 것 같은 어색함에 서재의 공기가 증발해 버린 기분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 하던 디트리히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다 빗장뼈로 떨어지고 가슴이 엿보일 정도로 파인 둥근 라운드 넥에 닿았다.
그는 소파에 가지런히 개어져 있는 담요를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디트리히?”
“추워 보이십니다. 단단히 여미십시오.”
시안나는 부드러운 양모 담요를 여미며 심장도 함께 단속했다.
저주에 풀렸다고 자각하니 지금은 이 남자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조였다.
그녀는 화제를 돌리고 싶었지만 가슴이 두근거려 이젠 디트리히를 찾은 이유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손에 쥔 양피지에 시선을 돌렸다.
“그, 그러고 보니…… 사용인 관리나 돈 관리는 에르마야 양, 아니 공작 부인에게 맡겨야 하지 않니?”
보통 영주는 전쟁으로 성에 두문불출하기 때문에 공작 부인이 성내를 관리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혹시 에르마야가 평민이니 자격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걸까?
황금빛 눈동자의 어둠이 드리웠다. 그가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양피지 중 하나의 모서리를 구기며 딱 잘라 말했다.
“그 여자가 저택을 관리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알 수 없는 말에 시안나가 디트리히를 멍청히 쳐다보았다.
에르마야가 저택에 손을 대지 않을 거라니.
잠시 생각한 시안나는 혼자서 이상한 결론을 내렸다.
‘혹시 저택을 관리할 일이 없을 거라는 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게 하겠다는 거?’
이럴 수가. 디트리히는 그녀의 생각보다 에르마야에게 푹 빠진 게 틀림없었다.
이 팔불출! 애처가!
시안나는 마음이 괜히 허해졌다.
불쑥 쓸쓸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
“뭐, 사실 어떻게 해도 상관없습니다. 이 모든 게 의미 없는 일일지라도 어쨌건 시간은 흐르니까요.”
속이 바삭하고 메마른 느낌. 지나간 시간에 대해 애도를 표하는 듯한 분위기에 시안나는 할 말을 잃었다.
초점 없는 금빛 눈동자가 짙은 공허를 담은 채 느릿하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는 광경이 쓸쓸했다.
대체 무슨 뜻일까.
시안나가 말의 의미를 묻기 전에 먼저 질문한 건 디트리히였다.
“그나저나 누님, 저를 찾으신 것 아닙니까?”
“아, 그만 깜빡했구나.”
시안나는 미간을 꾹꾹 누르다 이내 디트리히를 똑바로 직시했다.
“알려 줘. 어째서 디트리히 네가 나에게 저주가 풀린 사실을 숨겼는지.”
그 말에 디트리히가 입을 꾹 다물었다.
디트리히가 쉽게 진실을 말해 주지 않으리라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진심이 중요했다.
“일부러 말을 덫이 있는 쪽으로 몬 것……. 전부 날 없애기 위한 거였니?”
그 말에 하릴없이 바닥만 보고 있던 디트리히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아플 정도로 시안나의 양어깨를 움켜쥐어 왔다.
“제가 누님을 죽이려 한다니, 오해이십니다.”
그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집요하게 그녀와 눈을 맞추어 왔다. 자신이 못 할 말이라도 한 것 같았지만 그녀의 말은 확실한 근거가 있었다.
“오해라니. 덫이 있는 쪽으로 말을 몬 건 진실이잖니.”
“저는 오히려 누님을 구했습니다. 아니라면 어젯밤 누님의 침실에 찾아가지도 않았을 겁니다.”
시안나가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살의를 품고 있다고 추측했지만 어제 돌보아 준 것도 사실이었다. 자꾸만 어젯밤의 감촉이 디트리히를 믿고 싶게 만들었다.
그녀가 망설이는 걸 느꼈는지 디트리히가 그녀의 허리를 감아 자신에게 안기게 했다. 시안나의 귓가에 시끄러운 심장 소리가 쿵, 박혔다. 자신의 것이 아니라서 더욱 놀라웠다. 벼락이 치는 듯한 심장 소리가 디트리히에게서 들린다.
믿을 수 없었다.
정수리 위로 디트리히의 확고한 음성이 쏟아졌다.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누님의 편입니다. 제 하나뿐인…….”
그가 잠시 숨을 삼키고 내뱉었다.
“가족이니까요…….”
“가족?”
“호적상 저희는 남남이지만 그래도 믿고 의지할 사람은 누님밖에 없습니다.”
가족…….
어제 입을 맞춘 건 전혀 가족에게 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마에 느껴지는 단단한 가슴팍에 시안나는 자꾸만 디트리히에게 매달리고 싶어졌다. 숲에서 그에게서 느꼈던 살기도, 덫도 전부 다 잊고 싶었다.
시안나가 그를 허락하는 듯 두꺼운 허리를 바짝 안았다. 서로의 배가 닿을 정도로 껴안자 디트리히가 숨을 삼킨 것도 같았다.
“네가 날 해칠 리 없다는 거지? 가족같이 생각하고 있으니까.”
“……네.”
입맞춤도……. 전부 디트리히가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라서?
차마 묻기 두려워 시안나는 애써 그의 감정을 가족이라는 단어로 추스르고 있었다.
시안나는 디트리히의 마음을 떠보기로 했다.
“내가 긱스 공작님을 찔렀다 하더라도?”
디트리히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계기는 긱스 공작님의 죽음과 공작 자리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것 두 개였다.
디트리히의 얼굴엔 망설임 따위 없었다.
“전 죽은 아버지보다 살아 있는 누님이 더 소중합니다. 누님이 아버지를 찔렀다면 그에 대한 이유가 있으셨겠죠.”
“뭐……?”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야?
맹목적인 신봉 같은 대답에 귓가가 오싹할 지경이었다. 마침 마주친 두 개의 눈동자는 성녀를 모시는 열렬한 추종자처럼 번득였다.
하지만 그래 봤자 자신의 편을 들어준다는 이야기였다.
정말 긱스 공작님보다 나를 더 믿어 주는 거야?
시안나의 가슴에서 울컥 뜨거운 물이 샘솟았다. 현실이 믿어지지 않아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너른 제복에 고개를 묻었다.
잠시간 시간이 흐른 후.
디트리히는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밀었다.
“저도 누님께 할 말이 있습니다.”
쑥스러운지 큼큼 헛기침한 얼굴에 붉은 기가 번졌다.
긴장이 완연한 얼굴로 그가 그녀의 손을 제 뺨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잘생긴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고 그녀를 응시했다.
“저를 지금까지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모님한테 할 법한 말에 시안나는 언제 울먹였냐는 듯 웃음이 터뜨렸다. 시안나가 가벼운 농담으로 치부하는 게 마땅찮은지 그가 항변했다.
“진심입니다. 누님께서 어렸을 적 짓궂은 장난에서 절 구해 주신 것 하며, 전부 기억하고 있습니다.”
깊어진 금안이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창문에 스며든 빛이 잘생긴 얼굴에 내려앉았다.
디트리히의 진짜 속마음은 무엇일까?
말에서 넘어졌을 때, 화살이 바로 옆에 박혔을 때 풍기던 위험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저주가 사라진 뒤, 그를 감싸던 어려운 공기가 점점 녹아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제게 누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합니다.”
그가 시안나의 손에 감싸인 뺨을 꾹꾹 문대며 간절하게 속삭였다.
애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제발 믿어 달라고 사정하는 음성.
제 쪽에서 매달리고 싶어질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