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그는 조심스레 이마와 콧잔등, 쇄골 부근의 땀을 훔쳤다.
잠시 갈망 어린 시선이 옷 아래 젖은 부위를 생각하는 듯 가슴과 배 주변을 배회했다가 그대로 거두어졌다.
“쓸데없는 생각을.”
그는 상념을 지워 내고 숟가락에 시럽을 담았다. 노란 액체가 든 숟가락을 시안나의 뒷머리를 부여잡고 입에 흘려 넣었다.
“큭, 크헙, 읍!”
엄지로 입술을 꾹 벌려 보았지만 갑작스러운 액체에 놀란 시안나가 헛기침했다. 시럽이 디트리히의 하얀 튜닉에 튀었다.
“써도 드셔야 합니다.”
애타는 마음도 모른 채 시안나는 좀처럼 약을 삼키지 못했다. 자꾸만 잇새에서 액체가 새어 나오고 턱을 적셔 이불 겉면으로 떨어졌다.
시럽에 젖은 선홍빛 입술이 어둠 속에서도 번들거렸다. 그를 유혹하는 것처럼 촉촉한 나머지 디트리히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그가 고뇌하는 듯이 눈을 내리깔다 이내 반짝이는 입술을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이건 누님께서 전부 자초한 일입니다.”
그가 시럽이 든 병의 마개를 열고 제 입으로 액체를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녀의 뒤통수를 조심스레 받치며 벌게진 눈으로 색색 숨을 내쉬는 시안나를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진 건 한순간이었다.
“읏, 흡, 읍.”
입술에 따뜻한 감촉이 퍼지자 시안나의 눈가가 파르르 미동했다
입 끝이 뭉근하게 눌러지며 식도를 타고 차가운 액체가 흘렀다. 시안나는 눈꺼풀을 들고 비몽사몽 한 눈동자로 앞을 직시했다.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어두운 머리카락은 이 저택 내에 디트리히뿐이었다.
‘이 달콤한 맛은 디트리히 때문이야? 그럼 이건 꿈?’
자신을 싫어하는 디트리히가 입을 맞출 리 없으니 꿈이 분명했다.
동시에 디트리히라고 확인하자 속에서 안도가 흘렀다.
시안나의 작게 벌려진 입술 사이에서 분홍빛 혀가 빼꼼 나왔다. 이윽고 디트리히의 젖은 입술 위로 꼼지락거렸다.
달콤하고 달달한 맛에 혀끝이 아려 왔다. 설탕물을 핥고 싶어 혀에 힘을 주고 혀끝으로 살살 문질렀다.
“읏?”
시안나가 더욱 달라붙자 놀란 쪽은 디트리히였다. 굳어 버린 디트리히의 입술에서 한숨이 터졌다.
“흐읏.”
목구멍이 꽉 막힌 것만 같았다.
곱슬머리에 파묻힌 손아귀에 힘을 주며 버텨 봤지만 쪽쪽 소리가 날 정도로 핥아 오자 머리에서 인내심이 뚝 끊어졌다.
그는 얼굴을 떼고 낮은 음성으로 경고했다.
“누님. 전 헤이스가 아닙니다.”
디트리히는 그녀가 달라붙은 이유가 약혼자로 착각해서라고 결론을 내렸다.
배 안쪽에 치솟은 열기가 한층 선명해졌다.
“흐…….”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안나는 기분이 좋아져 헤실헤실 웃었다.
덕분에 디트리히의 미간에 금이 갔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입술을 빨아올리고 배시시 웃다니. 그의 속을 긁는 행동에 목이 타는 것처럼 갈급해졌다.
약에 젖어 반짝이는 살굿빛 입술을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그가 곧 맹렬히 입술을 덮쳤다. 약도 없이 텅 비워진 입 안은 그가 입술을 겹친 이유를 명확하게 만들었다.
“흐으…….”
시안나가 아직 달콤함을 머금은 입술을 반갑게 맞이하며 다시금 혀를 내밀었다.
“으음…….”
물기 어린 소리가 비가 내리치는 방 안에 나직이 울렸다. 밖에서 쏟아지는 빗소리보다 더욱 격정적이었다.
얼마나 핥았을까. 단맛을 먹을 대로 먹은 시안나의 혀가 다시 얌전히 제 집으로 들어갔다.
디트리히는 쓸쓸한 얼굴로 떨어지는 시안나를 내려다보았다. 베개에 그녀의 머리를 누이면서도 진한 아쉬움이 올라왔다.
잠든 그녀를 깨워서 누구에게 입을 맞추었는지 확인시켜 주는 만행을 저지르고 싶었다.
과연 웃을까? 아니면 자신의 약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울어 버릴까?
구슬피 우는 얼굴을 상상하니 배 속이 아릿해졌다.
그러나 디트리히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흔드는 대신, 깊은 잠에 빠진 평온한 얼굴을 보며 생살이 손톱에 파고들 만큼 주먹을 꽉 쥐었다.
“편히 쉬십시오.”
그가 원하는 대로 하다간 시안나는 철저하게 망가지고 말 것이다.
그는 다른 남자의 입술에 헤벌쭉거리는 제 누님을 씁쓸하게 눈으로 담으며 문을 닫았다.
탁. 다시 어둠에 잠긴 방에서 시안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색색 고른 숨만 내쉬었다.
***
시안나는 눈을 찔러 대는 햇볕에 못 이겨 눈꺼풀을 들었다. 몸 전체가 오랫동안 깃든 찌꺼기가 모조리 사라져 버린 듯 가벼웠다.
저기 창밖 너머로 햇살에 몸을 말리는 새순이 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후아. 어젯밤 뭘 했기에 이렇게 개운한 거지?”
그녀가 의문을 느낀 순간 어제 일이 떠올랐다.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얼굴, 애절하게 흔들리는 황금색 눈동자.
디트리히는 그녀를 감싸 안고선 대뜸 입술을 겹쳤다.
몸이 아파서 정신이 약해진 걸까. 디트리히에 대한 꿈을 꾸다니.
입술 끝이 화끈거려 저도 모르게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방을 살펴보았다.
방에는 딱히 누군가 들어온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시안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남사스러운 장면을 휙휙 지웠다. 분명 자신의 상태를 비밀에 부친 디트리히가 야속해 소망을 꾼 게 틀림없었다.
“어머, 시안나 님. 일어나셨어요?”
마침 물그릇을 든 미셰리가 등장했다. 그녀는 곧장 미셰리의 도움으로 옷을 갈아입은 후 쪽지를 작성해 그녀에게 건넸다.
“미셰리. 사람을 한 명 찾아 줘야겠어.”
미셰리는 가타부타 없이 공손하게 쪽지를 두 손으로 받았다. 역시나 그녀의 충실한 시녀였다.
시안나는 과감하게 다른 용건도 말하기로 했다.
“이건 쪽지와 다른 건인데, 시간 날 때 네가 믿을 만한 사람을 좀 알아봐 주겠어? 일 잘하는 하녀나 정원사를 수소문해 줘.”
이번에는 미셰리가 놀란 듯 소리쳤다.
“어머! 혹시 정원사 빌이 아가씨께서 아끼는 나뭇가지를 잘라 버린 것 때문에 해고하시려는 건가요? 좀 어수룩해도 성실함 하나는 끝내준다고요!”
아. 미셰리에겐 아슈토르가를 나간다고 언질하지 않았구나.
본질을 설명하지 않았으니 오해하는 수밖에.
“그게 아니야. 나…… 드뷘모르가 저택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어.”
“네? 아슈토르 저택을 떠난다는 말씀이세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에 미셰리의 두 눈은 휘둥그렇게 변했다. 이윽고 시안나가 말없이 미소하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그렁그렁해졌다.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혹시 공작님께서 시안나 님을 내쫓으려 하신 건가요?”
“그런 거 아니야. 사실, 디트리히가 저주에 풀린 데다 공작 작위를 맡아도 될 정도로 완전히 회복했거든.”
“정말요? 어쩐지 하루 종일 집무실에 틀어박혀 계시기도 하고, 연무장을 관찰하듯이 둘러보시고 명령을 내리시는 게 전 같지 않으셨어요. 저희 사이에서도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 것 같다는 말이 돌았거든요.”
어쩐지 긱스의 공백이 있는데도 저택 내외부의 일이 순조롭게 돌아간다고 했다.
다들 눈치채고 있었구나. 나만…….
시안나는 힘없이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러니 나도 아슈토르가를 떠나 원래 집으로 돌아가는 게 맞겠지. 이젠 디트리히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아슈토르 공작 저에는 유능한 시종인들이 많다. 그러니 시안나의 도움은 필요 없을 것이다.
“흑……. 아가씨가 떠나면 이 미셰리는 어떻게 하라고요.”
“괜찮다면 드뷘모르가 저택으로 올래? 보수는 지금보다 적을 것 같지만.”
“끅, 흑……! 저는 아가씨와 함께라면 어디든지 좋아요.”
미셰리는 콧물을 손수건으로 훔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시안나의 마음을 백번 천번 이해했다.
아슈토르가에 입양된 것도 아닌, 드뷘모르가의 사람도 아닌 그녀.
어쩌면 디트리히마저 시안나를 눈엣가시로 여길지 모른다.
돌보아 준 은혜를 갚아 주면 좋겠다는 건 시안나의 입장이고, 디트리히로선 그녀가 공작 작위를 위협할 인물일 수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혼인까지 하셨으니 시안나는 작위를 가지고 나가는 게 맞을지도.
미셰리가 가슴팍에 주먹을 불끈 쥐며 따라가겠다는 전의를 불태우는 모습을 시안나가 쓸쓸하게 응시했다.
이젠 디트리히와 할 이야기가 남았다. 어째서 자신에게 정신이 돌아온 사실을 비밀에 부쳤는지, 왜 자신이 그를 죽이려 했다고 믿은 것인지.
“혹시 어젯밤 내 방에 들렀는지도 물어봐야지.”
시안나는 곧장 디트리히의 방으로 향했다.
“디트리히, 잠시 할 말이 있는데 들어가도 되니?”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분명 방에 있는 게 분명할 시각인데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아직 자는 거니?”
그럴 리가 없는데. 디트리히는 어릴 적부터 긱스의 불호령 때문에 아침이 되면 칼같이 기상하는 습관을 들였다.
“……설마 나랑 얼굴도 보기 싫은 거야?”
그녀는 참지 못하고 문고리를 돌렸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유령처럼 흩날리는 하얀 커튼 사이로 이슬을 머금은 축축한 공기가 전신을 엄습했다.
방 안이 온통 스산한 걸로 보아 주인이 꽤 오래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그걸 방증하듯 이불보가 침대에 가지런하게 개어져 있었다.
“아침부터 대체 어딜 간 거지?”
***
디트리히가 앉은 책상 위는 지저분했다.
숫자와 필기체가 이리저리 휘갈겨 있는 세금 장부, 식솔들의 급여 목록, 1년 전 받은 황궁 무도회의 초대장 등……. 수많은 양피지가 책상 위를 나뒹굴며 어지럽히고 있었다.
빽빽이 쓰인 서류를 쭉 살피던 그는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식솔들의 급여, 영지민들에서 걷은 세금과 곡식…… 그의 시선이 숫자 위를 배회하며 올겨울을 어떻게 날지 머릿속에 그렸다.
이 지방은 눈이 많이 쌓였다. 그에 비해 아슈토르가를 둘려 싼 방벽은 낡아빠져 개가 지나다닐 정도의 구멍이 듬성듬성했다.
보수 공사를 한 뒤 늑대가 출몰한다고 보고 받은 산에서 늑대 고기를 왕창 챙겨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에는 축하 연회를 준비하고.
그는 본의 아니게 화제의 중심에 서 있었다. 왕국에 명망 있는 공작이 영지민을 흑마법의 재료로 삼아 무참히 살해했다. 끝내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공작. 사람들의 시선은 다음 공작 자리에 오른 디트리히에게 향했다.
이제 자신이 새로운 아슈토르가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리고, 저주가 사라졌다는 걸 선포해야 했다. 모든 게 의미 없는 연극이라 할지라도.
“하아…….”
그가 신경질적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는데, 쿵쿵, 밖에서 성난 발걸음이 다가오는 것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