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손수건으로 훌쩍이는 코를 닦아 내리는 에르마야에 헤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설마, 결혼 같은 중대한 일을 저 때문에 결정했다는 어리석은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명백히 그녀를 거절하는 태도였다. 에르마야의 얼굴이 회색빛으로 변하더니 이내 어깨를 씩씩거렸다. 새빨간 핏빛 눈동자가 태연하게 팔짱을 낀 헤이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녀의 손이 올라갔다.
찰싹! 날카로운 소음이 무겁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갈랐다. 에르마야는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다시 한 번 더 손을 머리 위로 들었지만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헤이스가 붉어진 제 뺨을 문지르며 에르마야의 손목을 낚아챘다.
“부인께서 택한 일이십니다. 결혼에 문제가 있다면 선택을 잘못한 자신을 탓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이……!”
“지금 당장 저택을 떠나셔도 됩니다. 그런데 그러질 않는 건 왜입니까? 공작 부인 지위가 아까워서 아닙니까?”
에르마야가 입술을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깨물었다. 충혈된 눈으로 제 손목을 붙잡은 헤이스의 손을 내쳤다.
“두고 봐요. 내게 이렇게 막 대하는 거…….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요!”
그녀는 화난 걸음걸이로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방은 디트리히의 옆방이었다.
이윽고 쿵! 문 닫히는 소리가 크게 났다. 복도에는 다시 시안나와 헤이스 두 사람만 남았다.
시안나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헤이스가 에르마야를 이용한 것처럼 자신 또한 헤이스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안나가 비틀거리며 문에 손을 짚자 헤이스가 얼른 부축했다.
“시안나 님. 제 상황을 설명해 드리자면…….”
“이야기는 다음에 해. 지금은 머리가 너무 아파서…….”
에르마야에게 키스까지 해 놓고 저렇게 나 몰라라 하는 헤이스의 태도에 정이 뚝 떨어졌다.
시안나는 헤이스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어내며 문고리를 잡았다. 이윽고 쿵. 문이 닫혔다.
복도에 홀로 남은 헤이스가 처량하게 고개를 숙였다.
복도보퉁이에서 이 모든 대화를 숨김없이 듣고 있던 디트리히도 자리를 떴다.
***
헤이스는 시안나가 방에 들어가서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 오랫동안 서성이다 물러갔다.
밖에서 어렴풋이 들리던 발소리가 사라졌다.
시안나는 비에 젖어 으슬으슬한 드레스 대신 편한 네글리제로 갈아입은 후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갑작스러운 암살자, 저주에 풀린 디트리히. 오늘 일어났던 여러 사건이 천장에 그려졌다.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어째서 디트리히는 제가 그를 죽일 거라는 뉘앙스로 말한 걸까? 또 암살자는 누구의 사주를 받은 걸까?
“……아니, 이제 상관없나. 디트리히는 내가 자길 죽이려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불신하고 있잖아.”
기억을 찾았다면 디트리히는 이제 완전한 아슈토르가의 가주였다. 그를 대신해 차기 공작이 될 뻔한 시안나를 불편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10년은 완전히 무가치한 것으로 변했다.
“그래. 디트리히를 위해서 떠나는 게 맞아. 드뷘모르가 가주로서 살아가는 거야. 디트리히도 날 좋아하는 것 같지 않으니 허락할 테지.”
그러려면 황제와 드뷘모르가 가문에 관해 이야기도 해야 하고, 방치된 드뷘모르가 저택도 정리해야 한다. 아마 정원의 잡초만 뽑아도 하루가 다 갈 것이다.
시안나는 계속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중얼거렸다.
이렇게라도 결심하지 않으면 영영 디트리히의 곁을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람도 고용해야 하고, 미셰리에게 상담해 봐야…… 쿨럭!”
지끈거리는 두통이 치밀었다. 시안나는 이마에 손을 갖다 댔지만 화들짝 뗄 정도로 이마가 뜨거웠다.
“어쩐지 몸이 으슬으슬하더라니, 감기인가…….”
그녀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디트리히가 망토를 씌워 주긴 했지만 잠시 비를 맞지 않았는가. 암살자를 피하느라 무리하기도 했고.
“한숨 푹 쉬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순간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말린 꽃이 눈에 들어왔다. 무려 10년 전 디트리히가 절벽에 떨어지면서까지 그녀에게 선물해 준 하얀 꽃이었다.
차라리 찢어 버릴까. 눈에 담을 때마다 심장이 찢어질 바에야.
하지만 독한 마음은 잠깐이었다. 시안나는 현실을 지우려는 듯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잠시 후, 방엔 고로롱거리는 숨소리만 가득 찼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깊이 잠든 덕에 끼익 소음을 내며 열리는 문소리를 그녀는 듣지 못했다.
***
“흑, 끅…….”
침대에 앉은 에르마야는 손수건으로 새빨개진 코를 킁, 풀었다. 자신을 폐품처럼 버린 헤이스가 아른거리자 또다시 눈물이 치밀었다.
차라리 이 집을 나가 버릴까. 아무리 신의 계시가 중하다지만 자신의 삶도 소중했다.
에르마야가 다시금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데, 갑자기 문이 젖혔다.
“당신은…….”
비에 젖어 무거워 보이는 검은 제복을 입은 디트리히였다. 에르마야는 새삼스레 감탄했다.
이마에 까만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모습이 추레하기는커녕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젖은 속눈썹, 축축해져서 머리를 털자 반질거리는 까만 외투와 제복, 그녀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눈동자조차 아름다웠다.
그가 제 방 침대에 엉덩이를 붙인 에르마야를 발견하고 귀찮다는 듯이 짜증을 냈다.
“여긴 뭣 하러 들어온 거지? 분명히 내 방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했을 텐데.”
에르마야가 있는 곳은 디트리히의 방이었다. 그녀가 임시로 명명한 이름은 부부 방.
디트리히는 빗물에 젖은 두꺼운 외투를 벗으며 그녀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그녀를 무시하는 태도에 모멸감이 밀려오자 에르마야의 입매가 출렁거렸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마음을 추슬렀다.
자신을 가지고 논 헤이스에게 보란 듯이 복수해야 했다.
에르마야가 젖은 셔츠 단추를 끄르는 디트리히를 뒤에서 껴안았다. 분주하게 단추를 벗기던 손이 뚝 멈추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서늘한 음성에 에르마야는 가엽게 어깨를 떨면서도 더욱 팔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디트리히가 떨어뜨려 놓으려고 마음먹은 이상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는 에르마야의 팔을 풀고 뒤돌아서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눈두덩에 번진 물과 퉁퉁 부은 콧방울이 아주 가관이었다.
디트리히는 푹 한숨을 내쉬더니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맨 아래 서랍에서 손수건을 찾은 그는 무성의하게 그녀에게 던졌다.
제 방에 나온 여자가 저렇게 펑펑 운 얼굴로 나가는 건 곤란했다. 얼굴 젖은 공작 부인을 본 시종인들이 무슨 말을 해 댈지 눈에 선했다.
게다가 방금 전 복도에서 엿들은 이야기론 측은지심이 들기도 했고.
그녀가 놓칠세라 손수건을 두 손으로 받았다.
“닦아.”
한없이 무미건조한 음성이었지만 에르마야는 그 속에서 따뜻함을 느꼈다.
정작 디트리히는 위로해 줄 마음이 하나도 없었고, 시종일관 귀찮다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었지만 헤이스에게 내쳐진 충격이 큰 나머지 한없이 다정하게 느껴졌다.
“흐극, 고마, 고마워요. 흑, 공작님…….”
“하아……. 일단 진정되면 나가도록.”
“끅, 끄윽, 네…….”
눈물을 훔치며 그녀가 심란한 마음을 수습했다. 그러자 머릿속이 복잡할 때 떠오르지 않던 방안이 들어왔다.
가령 눈앞에 이 남자, 디트리히.
사람을 얼릴 듯한 눈초리로 보는 주제에 그녀를 억지로 내보내지는 않았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 시녀들을 동원해 그녀를 끌어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왜일까? 그건 자신이 그의 아내, 공작 부인이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그녀는 스스로가 어떤 패를 들고 있는지 깨달았다.
공작 부인의 자리는 고귀한 것이다. 아슈토르 공작가를 박차고 나오는 건 저만 손해였다.
뭣 하러 저가 나가는가? 공작의 후계자를 낳아 헤이스를 내쫓으면 되는 것을.
게다가 그녀는 목적을 위해 이 저택에 남아 있어야 했다.
에르마야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이 잘생긴 남자를 힐긋 곁눈질했다. 그녀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친 에르마야가 손수건을 돌려주며 결연한 눈빛을 보냈다.
“저, 공작 부인으로서 의무를 다할게요.”
씩씩한 목소리였지만 그 말을 들은 당사자는 손수건을 받으려던 동작을 멈추었다. 곧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일변했다.
***
디트리히는 에르마야가 방을 나가고 한참이 지나서 방문을 닫았다. 그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번부터 에르마야의 낌새가 심상치 않다고 여겼지만 오늘따라 공격적이었다.
공작 부인으로서 의무를 다하겠다니.
‘하아……. 아버지가 붙여 준 여자치고 너무 귀찮군…….’
벌써 12시를 한참 넘은 시각이었다. 가벼운 튜닉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은 그가 방을 나섰다.
아무래도 누님을 빗속에 오랫동안 놔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 첩자까지 보냈다는 의심이 들어도 자꾸만 신경 쓰였다.
어차피 같은 층이었기에 그는 중앙 계단을 지나쳐 그녀의 방에 손쉽게 도달했다. 시안나의 방문 앞에 선 그가 똑똑 노크를 했다.
“주무십니까?”
하지만 문 너머로는 어떠한 대답도 없었다.
“늦은 밤에 실례하겠습니다.”
끼익. 문을 열자 이내 그녀 특유의 풀잎 향이 코끝에 스몄다. 아까 함께 말에 올랐을 때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던 그 향이었다.
“으응…….”
“누님?”
앓는 듯한 목소리에 홀렸던 정신이 퍼뜩 이성을 되찾았다. 디트리히가 다급하게 침대로 향했다.
이불을 덮은 시안나가 무거운 어둠에 짓눌린 듯 끙끙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디트리히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이마에 손을 갖다 대자 열이 천근만근이었다.
“제길…….”
어째서 그녀의 방에 일찍 방문하지 않은 걸까. 만사 제쳐 두고 그녀에게 달려갔어야 했는데.
하지만 후회할 시간도 없었다.
그는 밖으로 나와 시녀에게 대야와 수건, 약을 준비시켰다.
디트리히는 곧 협탁 위에 준비된 대야의 물에 수건을 적셨다가 짜냈다. 그리고 시안나의 몸을 닦으려 수건을 쥐었다.
양초의 불빛이 땀으로 번들거리는 얇은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크게 헐떡이는 것이 힘겨워 보였다.
그것도 잠시.
살짝 헐겁게 매어진 리본에 닿았다가 괴롭게 오르내리는 가슴팍에 도달하자 몸 전체가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시선을 돌렸다.
목덜미가 뜨거운 건 촛불의 불빛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땀만 닦아드리고…… 나가겠습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