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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44화 (44/70)

[44]

디트리히는 제복 가슴팍이 뜨겁고 축축해지는 걸 느꼈다.

그가 음울한 얼굴로 시안나의 날갯죽지 부근을 쓸었다.

“죄송합니다, 누님. 저를 원하시는 만큼 때려도 좋습니다. 절대 용서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툭……. 툭……. 가느다란 빗방울이 메마른 대지로 추락했다.

“울지 마십시오. 제발…….”

땅에 몇 번 노크하더니 빗방울이 확 굵어졌다.

쏴아아아.

갑작스러운 비가 사방에 쏟아졌다. 디트리히가 재빨리 망토를 시안나의 머리 위로 펄럭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미 눈에 떨어진 비가 뺨으로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이 꼭 우는 사람 같았다.

시안나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앞으로 걸어 나갔다. 디트리히도 말없이 그녀를 따라갔다.

“……저리 좀 가 줄래?”

“감기에 걸리실까 봐 걱정됩니다.”

감기는 이 당시 큰 병으로 발전할 수 있는 중증이었다.

시안나가 디트리히를 노려보다 이내 입술을 사리물었다.

항상 단정했던 까만 머리카락이 볼품없이 뺨에 달라붙어 있었고, 얼굴 또한 샤워를 한 사람처럼 엉망으로 젖어 있었다. 급진적 소나기에 디트리히는 자신보다 더 심하게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젖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두 개의 금안을 그녀에게만 고정했다.

남자가 온몸으로 물 폭탄을 맞은 듯한 모습은 애절함을 자아냈다.

바보……. 자기 꼴은 안 보이는 거야?

디트리히에게 화가 나면서도 건강도 걱정되는 양가의 감정이었다.

시안나는 몇 번 망토를 쳐 대다 디트리히가 물러서지 않자 포기하고 제 갈 길을 갔다.

쏴아아. 두 사람은 억수 같은 비를 말없이 걸었다.

그럴수록 시안나는 자신에게 망토를 씌워 주느라 비를 고스란히 맞는 디트리히가 눈에 밟혔다.

장애물 하나 없는 풀밭인데도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망토를 휙 젖혔다.

“……같이 써.”

“누님…….”

“착각하지 마. 용서한 게 아니니까.”

디트리히는 말없이 망토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젖은 장갑이 목덜미에 닿았을 땐 깜짝 놀랐지만 일부러 내색하지 않았다.

찰박찰박. 물 튀기는 소리와 축축한 공기가 목을 기며 예민한 신경을 건드렸다.

자꾸만 목이 메고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것 같았다.

디트리히와 손을 잡지 않는 세상은 이렇게나 싸늘하다,

침묵만이 두 사람 사이에 자리 잡았을 때, 먼저 말을 꺼낸 건 시안나였다.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디트리히. 혹시 이 근방에 몬스터가 사는지 알고 있니?”

“어째서 물으시는 겁니까?”

시안나가 고개를 휙돌리며 말했다.

“아까, 이상한 걸 봤어. 검은색 연기인데 마치 뱀처럼 요동치는 게…….”

“…….”

“디트리히, 너라면 그걸 알고 있을 것 같아서.”

디트리히의 얼굴이 무섭게 굳은 것도 잠시, 금세 비에 씻긴 듯 사라졌다.

“……글쎄요. 저는 딱히 짐작 가는 곳이 없어서.”

조금 늦은 대답이었다.

“……그렇구나.”

회피하는 듯한 대답에 시안나가 허무한 얼굴로 고개를 내렸다.

이곳에서 입씨름할 건 아니었다.

디트리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정체 모를 것에 대해서 숨길 이유 또한 없었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 주면 좋겠다.

디트리히마저 거짓말을 한다면 대체 이 세상에서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시안나는 공허한 눈으로 지나가듯이 말했다.

“내 생각이지만……. 그 이상한 생물체가 날 노리는 암살자로부터 구해 준 것 같았거든.”

그 순간이었다. 디트리히가 헛웃음을 터뜨린 것은.

그는 흥미로우면서도 언짢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입매를 비틀었다.

“아까 그 검은 제복의 사람 말입니까? 누님이 아니라, 저를 죽이려고 한 거겠죠.”

시안나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디트리히에게 돌아갔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여전히 디트리히의 입에 걸려 있는 비소에 마음이 찢기는 것 같았다.

“저의 죽음을 바라는 사람이야 많죠. 가령…….”

뒷말은 없었지만, 그녀를 직시하는 눈동자에 흔들림이 없었다.

설마…….

시안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디트리히를 죽이려고 한다니, 말도 안 되는 모함이었다.

심장이 아프도록 조여들었다. 디트리히가 왜 자신을 의심하는 거지? 설마 긱스를 단도로 찌른 일 때문일까.

후우욱. 차가운 빗줄기가 그녀의 마음속에 흘러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긱스 공작님께선…….”

“시안나 님!”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음성이 들렸다. 세찬 비바람에 젖어 있었지만 확실했다.

이히힝!

참방! 참방! 뿌연 물안개 사이로 나타난 건 말을 탄 헤이스와 에르마야였다. 두 사람 뒤로 시종이 말을 타고 뒤따르고 있었다.

갈색 말이 시안나 앞에 섰다. 속옷이 비칠 정도로 젖은 드레스에 얼굴을 붉힌 헤이스가 제복 상의를 벗어 시안나에게 걸쳐 주었다.

“걱정했습니다. 아가씨와 공작님께서 타신 말은 바닥에 쓰러져 있지, 두 분 다 어디로 가신지, 도통 찾을 수가 없어서……. 이제 안심하십시오.”

그는 비 오는 날 미친 사람처럼 숲속을 헤맸다.

애가 탔다. 두 사람은 보이질 않았고, 두 사람이 탄 흑마는 바닥에 고꾸라져 있었다.

산짐승이 그녀를 물고 어디론가 가 버렸나 싶어 정신이 나가는 줄만 알았다.

“…….”

시안나는 망토를 씌워 주는 디트리히를 흘긋 보다 이내 헤이스의 손을 잡았다.

사실 헤이스와 같이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계약 약혼한 주제에 에르마야의 방을 밤마다 방문한데다 결혼을 무효화시키겠다고 속이지 않았나.

하지만 지금 두 남자 중 누가 더 밉냐 하면 디트리히였다.

시안나의 어깨를 붙잡으려던 디트리히의 손은 잠시 주춤하더니 결국 아래로 떨어졌다.

그렇게 시안나는 헤이스와 함께 저택을 향했다.

헤이스는 시안나를 품 안에 안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감격스러운 듯 정수리에 코를 비비었다.

“시안나 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아. 그래…….”

심드렁한 대답이 헤이스의 뺨에 닿는 빗방울처럼 싸늘했다.

“혹시 제게 화가 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글쎄.”

저택으로 가는 길목 내내 헤이스는 귀찮을 정도로 시안나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무시로 일관했다. 그 덕에 헤이스의 속에서 불안함이 차곡차곡 쌓였다.

***

저택 위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 끼었다. 빗방울도 더욱 굵어졌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휙!

시안나는 곧장 현관을 지나 2층 자신의 방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제 방 문고리를 돌리려는 순간, 억센 힘이 그녀를 뒤에서 얽매었다.

“읏, 이 손 놔!”

시안나가 헤이스한테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그녀의 반항에도 헤이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방비하게 드러난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애원했다.

“아까 말에 타셨을 때부터 기분이 나쁘신 것 같습니다. 제게 불만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시안나의 귓가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헤이스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2층은 주인 방이야. 헤이스가 가야 할 곳은 고용인들 방, 3층이라고.”

“대답하십시오.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헤이스는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그녀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일어서지 않겠단 태도였다.

하, 연기가 일품이었다. 에르마야가 영영 말해 주지 않았다면 깜빡 속아 넘어갔겠지.

그녀가 콧방귀를 끼며 팔을 뿌리치고 헤이스를 내려다보았다.

“에르마야와 디트리히의 결혼을 종용했다며? 그리고 내게 고백했으면서 어젯밤엔 에르마야를 찾아갔지.”

콰쾅. 창밖에서 성난 천둥이 매섭게 꽂혔다. 아무래도 몇 시간 만에 그칠 소나기는 아닌 듯싶었다.

언제 절절맸냐는 듯 안달복달하던 헤이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안나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어쩔 수 없습니다. 에르마야 님, 아니 공작 부인을 완벽히 공작가 사람으로 끌어들여야 했습니다. 왕에게 형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요.”

사실 그따위 것 따위 안중에 없었다.

모든 건 시안나를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만약 여기서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다간 약혼 계약마저 휴지 조각으로 변할 것이다.

“긱스 공작님과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결혼으로써 에르마야 양의 능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겠다는 말.”

시안나가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헤이스는 결혼을 파기시킬 것처럼 굴며 뒤에서 결혼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속이 들끓는 배신감이 차올랐다.

쏴아아. 창밖의 비는 그칠 줄 몰랐다. 꼭 구멍이 뚫린 그녀의 마음 같았다.

끼익. 그때 계단에서 나무가 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성의 구두 굽 소리가 계단을 올라오더니 두 사람이 있는 복도로 다가왔다. 헤이스와 시안나의 고개가 유칼립투스가 장식된 복도 모퉁이로 돌아갔다.

“헤이스 님. 역시 시안나 님과 함께 계셨군요. 앗, 시안나 님도 잠시 자리를 지켜 주세요.”

붉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에르마야는 이내 자리를 피하려는 시안나를 붙잡았다. 헤이스가 턱을 매만지며 에르마야에 의뭉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공작 부인께서 저를 찾으시다니,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태연한 헤이스의 모습에 에르마야는 잠시 어깨를 떨더니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제 연기는 그만해요! 헤이스 님께서는 형의 복수를 위해서 제게 꼭 디트리히 님과 결혼해 달라고 하시면서…… 제게 키, 키스하셨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시안나 님과 약혼이라니! 뭐라고 설명 좀 해 봐요!”

에르마야가 헤이스의 셔츠 목깃을 틀어쥐었다.

시안나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설마 헤이스가 두 사람의 결혼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저런 짓까지 했으리라고는.

두 여자의 관심이 헤이스에게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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