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시안나는 정신없이 달렸다.
푸른 침엽수와 푸릇푸릇한 덤불은 서로 비슷해서 같은 자리를 빙빙 도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안겼다.
향하는 곳이 동쪽인지 서쪽인지, 어느 길로 나가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가 그녀를 뛰게 만들었다.
“하아, 잠깐만, 너무 소리 나게 뛰면…… 아까 그 화살을 쏜 사람이 쫓아오는 것 아냐?”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에 그녀는 자리에서 멈췄다. 바로 앞에 있는 커다란 떡갈나무는 한 번도 온 적 없는 생소한 곳이라는 걸 알려 주었다.
“하아, 그러고 보면 그 화살을 쏜 사람……. 디트리히와 한패일 수도 있지 않나?”
그렇게 그녀는 한동안 멈춰서 들숨 날숨을 쉬며 생각을 정리했다.
어딘가 권태로워 보이면서도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던 디트리히. 혹여 저주가 불완전하게 풀리고 자신을 아슈토르 가문의 제거 대상으로 여긴 게 아닌가 하는 데까지 추측하고 있었다.
자신과 이때까지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디트리히가 아닌 새로운 인격을 갖춰진 거라면.
그래도 옛날 이야기할 땐 막힘없이 대답하던데.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모르겠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일단 숲을 빠져나가자. 그런 다음 헤이스를 찾는 거야.”
아까 밥을 먹을 때 바람이 어느 방향이었지? 북서풍이었나.
그녀는 바람의 방향을 느끼며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바스락, 바스락. 짙은 녹음 속, 깊이 잠든 듯한 숲속에 퍼지는 나뭇잎 구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시안나는 한 발짝씩 발을 옮기면서도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 자신을 죽이려 한 상대의 발걸음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간이 콩알만 해진 시안나는 스윽 지나가는 뱀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종종걸음을 했다.
희망처럼 머리 위로 하늘이 보일 때였다. 멀리서 나뭇잎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시안나의 발걸음이 뚝 멈추었다.
‘잘못 들은 거겠지…?’
무색하게도 다시 한 번 더 부싯, 거리는 소리가 퍼졌다.
소동물이라 추측하는 게 무색하게도 아까보다 조심스러운 발소리에 그녀는 수상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안나는 울상을 지었다.
의문의 사람이 쥐새끼처럼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바스락. 바스락. 바로 뒤에서 멈춘 소리에 그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등을 돌렸다.
“아…….”
시안나의 얼굴에 삽시간에 절망이 차올랐다.
그녀를 맞이한 건 잉크를 뒤집어쓴 것처럼 등을 뒤덮는 기다란 망토, 얼굴의 반을 가리는 마스크를 쓴 수상한 남자였다. 암살자가 그림에서 튀어나온다면 이런 모습일까.
마스크 사이로 길게 찢어진 눈이 그녀를 담았다. 시안나는 자신이 그의 사냥감이라는 걸 깨달았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그가 등 뒤에 화살통을 메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에게 화살을 쏜 장본인이 틀림없었다.
“으, 아…….”
저 남자는 누구지? 왜 날 노리는 거지?
공작가의 여식이 아니었기에 크고 작은 시비를 붙은 적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시안나는 공녀로서 상대를 무안 주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바보 같지도 않게 딱 유연하게 대처했다고 자부했다.
그런 그녀에게 목숨을 노리는 암살자라니, 믿기지 않았다.
아니면 설마, 정말 디트리히의 소행이야?
“싫어. 오지 마…….”
몇 발자국 뒷걸음질 쳤을까. 그녀의 반항은 발뒤꿈치가 나무 밑동에 걸리며 사라졌다.
그녀가 털썩 쓰러졌다.
“으. 제발 살려 목숨은…….”
시안나가 애원했지만 암살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자가 자비라도 되는 양 이죽거리며 말했다.
“참 안타깝군. 어쩌다 그분에게 밉보인 거지.”
그분이라니?
그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남자는 허리춤 칼집에서 단도를 집어 들었다. 이윽고 그가 코앞에 단도를 들이밀었다. 예리한 날 끝이 섬뜩하게 빛났다.
“잘 가라.”
시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디트리히! 도와줘!
그때였다.
“캑!”
응?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심상치 않은 소리에 시안나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남자의 까만 목티에 무언가가 꿀렁거렸다. 그녀가 눈가를 좁히자 더욱 확실히 보였다. 스멀스멀거리는 까만 연기가 남자의 목에 밧줄처럼 감기어 있었다.
꿈틀거리는 게 뱀 같기도 했다.
“으흑!”
놀란 시안나는 그대로 얼어 버렸다. 몬스터라고 해도 이렇게 실체가 없는 종은 듣도 보도 못하였다.
그 순간 까만 그림자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곧이어 날카로운 굉음이 코앞에서 울렸다.
쨍강!
시야가 갑작스러운 어둠에 익숙해지자 그제야 상황이 들어왔다. 그녀를 막은 건 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의 늠름한 등이었다.
“디트리히!”
그에게서 도망친 주제에 널따란 등을 보자마자 안도가 스며들었다.
“누님, 뒤로 물러나십시오.”
그 말에 시안나가 허겁지겁 내뺐다. 암살자가 그녀를 쫓으려고 했지만 곧바로 디트리히에게 막혔다.
기다란 롱소드가 남자의 목을 파고들었다.
“큭!”
암살자의 얍삽한 눈에 살기가 서렸다. 그가 단도를 버리고 허리춤에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스스릉. 곧 기다란 장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절대로 미래대로 흘러가게 두지 않겠다!”
암살자가 디트리히에게 달려들었다.
챙강! 챙!
두 사람은 시안나가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맞붙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날렵한 암살자의 공격을 디트리히가 하나도 빠짐없이 맞받아치고 있다는 것을.
실제로 디트리히는 전광석화 같은 공격을 받아넘기며 허점을 파고들고 있었다.
쨍강!
날카로운 쇳소리가 숲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핏방울이 초원 위로 촤락 흩뿌려졌다.
설마 디트리히가 베인 건!
발을 동동 굴리던 것도 잠시, 시안나는 목덜미가 쭈뼛 서며 소름이 일었다.
“잠시, 디트리히의 검술이 저렇게 월등했나?”
디트리히는 목숨을 앗아가려는 암살자와 대등하게 싸우고 있다.
그녀의 불안한 시선이 유려한 검술을 선보이는 디트리히를 좇았다.
챙!
승부는 금방 났다. 암살자의 검이 하늘 높이 떠올라 공중을 돌더니 그대로 풀숲에 꽂혔다.
암살자가 제 빈 손을 보고 털썩 주저앉았다. 완벽히 디트리히의 승리였다.
디트리히가 무릎을 꿇은 남자의 앞에 서곤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배후가 누구지? 실토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디트리히의 종용에도 남자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내렸다.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대답과 같았다.
디트리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윽고 그의 팔이 더욱 위로 올라갔다.
“디트리히, 그러면 안 돼!”
촤락!
디트리히가 시안나의 외침에 멈칫해서였을까. 검 끝은 남자의 복면에만 겨우 스쳤다.
그 덕에 남자의 눈과 코, 갈색 머리카락이 화악 드러났다. 남자는 낭패감 섞인 얼굴로 황급히 얼굴을 가렸다.
디트리히가 시안나를 다그쳤다.
“지금 목숨을 끊지 않으면 후환이 뒤따라올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 서!”
디트리히가 암살자에게서 눈을 떼자마자 그가 자취를 감추었다. 시안나를 숲 한가운데에 버려둘 수 없었던 디트리히는 금세 쫓는 것을 포기했다.
“하아…….”
시안나는 오금이 지릴 뻔한 다리에 겨우 힘을 주었다.
사람을 죽일 뻔했다. 디트리히가.
강한 위화감은 이미 확신으로 변했다.
디트리히는 검에 묻은 피를 제 망토로 지웠다. 뺨에도 묻은 피를 장갑으로 대강 닦아 낸 후 검을 집어넣고 덜덜 떠는 시안나에게로 달려왔다.
사람을 벨 때 가면처럼 차갑던 얼굴은 그녀를 보자마자 여지없이 무너졌다.
“누님, 어디 다치신 곳 있습니까? 아까 말도 없이 뛰쳐나가셔서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디, 디트리히……. 그게…….”
시안나는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신중히 말을 뱉었다.
“저주가 완전히 풀렸구나.”
그녀가 맥 빠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아까부터 느꼈던 위화감은 디트리히의 말투였다. 그리고 자객과 싸우는 모습을 보니 알 수 있었다. 그가 일부러 저주가 완전히 풀린 걸 숨기고 있었다고.
그가 뺨에 손을 올리고 시안나를 이리저리 살피던 동작을 멈추었다. 디트리히는 화살이 심장을 관통당한 것처럼 어깨를 움찔거렸다.
쏴아아.
두 사람 사이로 바람에 실려 온 나뭇잎이 흩날렸다. 나뭇잎이 아니었다면 시안나는 시간이 멈추었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디트리히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그는 시안나의 진심을 살피려는 듯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다 체념한 듯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몇 가지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하. 시안나는 헛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참았다.
디트리히의 발음은 여전히 뭉개지는 것 하나 없이 정확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디트리히가 저를 속이고 저주에 풀리지 않은 척을 했다.
하하. 왜 자신에게 그런 고약한 장난을 친 거지? 뭘 확인한다는 거야?
마음속에서 디트리히의 후유증 때문에 앓던 나날이 스쳤다.
긱스를 그녀의 손으로 죽인 것. 손가락을 타고 흐르던, 심장처럼 둥둥 울리던 피. 그 광경을 보고 충격받아 쓰러진 디트리히. 그 때문에 저주가 풀리지 않았을 거란 추측 모두.
전부 거짓이었다.
디트리히가 시안나의 어깨를 황급히 움켜쥐었다. 애절한 목소리가 시안나에게 매달렸다.
“죄송합니다.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용서해 주십…….”
“이 손 놔!”
싸늘한 목소리로 다그친 시안나가 어깨를 움켜쥔 손을 때렸다. 한 번도 디트리히에게 언성을 높인 적 없던 그녀였다.
예상보다 격한 반응에 디트리히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충혈된 눈동자가 어깨를 붙들려던 손을 떨어뜨리는 디트리히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쿵쿵 쳤다.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어. 어떻게 너, 내가 얼마나 가슴 졸였는데…….”
곱씹어 볼수록 디트리히에 대한 원망이 자리잡았다.
얼마나 디트리히가 원래대로 돌아오길 고대했었나.
함께한 시간이 자그마치 10년이었다. 디트리히는 이제 그녀의 최애캐를 넘어선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디트리히가 심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고 들었을 땐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하나 디트리히가 지난 10년간 쌓은 추억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었다.
에르마야가 디트리히를 조심하라고 이른 건 처음부터 알고 있어서겠지?
10년 동안 알고 지낸 자신보다 방금 만난 여성이 그의 비밀을 꿰뚫고 있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배신감에 몸서리가 쳐졌다.
퍽퍽 때리는 작은 주먹을 고스란히 맞을 때마다 시안나보다 커다란 덩치가 치명상을 입은 것처럼 흔들렸다.
“흑, 네가…… 어떻게…….”
얼마나 그러길 반복했을까. 시안나의 머리가 디트리히의 가슴팍에 툭 기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