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누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어, 아, 아니야.”
시안나는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숨을 흡, 들이마셨다.
디트리히는 그녀의 자세를 좀 더 안정적으로 고쳐 준 뒤 말고삐를 때렸다.
이힝!
말이 앞발을 마구 굴리더니 그대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헤이스와 시안나를 한시라도 빨리 떨어뜨려 놓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헤이스가 분한 얼굴로 두 사람이 탄 말이 멀어지는 걸 노려보다 문득 하늘을 발견했다.
어느새 우중충한 먹구름이 잔뜩이었다.
***
오솔길 양옆으로 침엽수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훤히 트인 호수는 사라지고 주변은 온통 나무들로 빽빽해졌다.
쫑쫑거리는 새 소리와 함께 시원한 공기가 시안나의 청록색 머리카락을 멋대로 헝클어뜨렸다. 그런데도 기분이 좋아 시안나는 마구 흩날리는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바람을 만끽했다.
흔히 사람들이 기분 전환을 위해 드라이브를 하러 나간다고 하지만 시안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말을 타고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것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등에 닿는 판금 같은 감촉에 자꾸 볼이 뜨끈해지는 와중 디트리히가 그녀에게 물었다.
“아깐…… 왜 헤이스가 아닌 저를 선택하셨습니까?”
어느새 두 사람은 꽤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환한 햇빛이 우거진 풀숲에 막혀 사방이 암청색이었다.
사람 기척이 너무 없어서 두 사람만 별세계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네가 함께 타자고 부탁했잖아?”
“단지 그것 때문입니까?”
갈수록 녹음이 짙어졌다. 하늘마저 가려질 정도로 네모난 상자에 갇힌 것처럼 주변이 갑갑했다.
덩달아 숲속 특유의 시원함은 목덜미에 송충이가 기어 다니는 오싹한 감각으로 변모했다.
급기야 디트리히가 이상한 말을 하기까지.
휘이. 저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까지 들리자 시안나는 잔뜩 겁을 먹었다.
“디, 디트리히, 좀 더 나아가다간 고블린 무리라도 만나겠어. 그만, 돌아가자.”
“이제 와서 헤이스가 신경 쓰이십니까?”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가 위험하게 들렸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표정을 굳히고 있는 디트리히가 눈에 그려질 정도였다. 오싹함에 등을 부르르 떠는데 순간 강한 위화감이 시안나를 덮쳤다.
아까부터 디트리히의 말투가 희한할 정도로 점잖지 않나?
“…….”
시안나가 우왕좌왕하는 와중, 디트리히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바닥을 살폈다.
그의 시선이 풀잎 향 사이를 더듬다 반짝임을 발견하곤 입매를 비틀었다. 그가 반짝이는 수풀 사이를 향해 말을 몰았다.
“이럇!”
디트리히가 고삐를 조종하자 흥분한 말이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시안나의 곱슬머리가 바람에 강하게 부딪쳤다. 속력이 빨라지자 두려워진 시안나가 안장과 이어진 고삐를 세게 움켜쥐었다.
몸 전체가 바람을 맞아 부서지는 것 같았다.
“디트리히, 너무 빠른 거 아니…… 윽!”
피히잉!
순탄하게 땅에 박차를 가하던 말이 갑자기 흥분을 내질렀다.
화들짝 놀란 듯 말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말은 두 앞발을 들어 올려 투레질을 하더니 등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말에 올라탄 시안나도 같이 휘청거리며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꺅!”
“저를 꽉 붙잡으십시오.”
말에서 금방이라도 떨어지려는 상황치고 퍽 차분한 목소리였다.
피힝!
이윽고 등을 괴롭게 비틀던 말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말에 타고 있던 두 사람도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아악!”
떨어지는 와중 돌에 부딪쳐 머리가 깨지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엄습했다. 시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는 단단한 팔이 없었더라면 그녀의 머리는 땅바닥에 정통으로 박혔을 것이다.
쿵!
까악. 까악. 심상치 않은 소리에 멀리서 까마귀가 날아갔다.
“흐으, 아야야…….”
“다친 곳은 없습니까?”
안심이 될 만큼 단단하고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드레스 자락에 풀이며 흙이 묻어 엉망이었다.
“흐윽, 흑, 디트리히는…… 괜찮아?”
그녀는 손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바닥이 단단하면서도 푹신했다.
“……!”
정신 차리고 보니 그녀는 디트리히 위에 올라타 있었다.
손에 힘을 줘서 일어난다는 게 탄탄한 가슴을 주물럭거리는 꼴이었다.
“읏! 미안!”
얼굴이 시안나가 토마토 같은 얼굴로 쩔쩔맸다.
굉음이 난데다 땅과 부딪친 고통이 아릴 텐데도 디트리히의 눈은 그녀만 주시했다.
두 사람의 얼굴은 그녀가 고개를 조금만 내리면 서로의 입술이 겹쳐지고 숨결이 섞일 정도로 가까웠다. 뺨이 붉게 물들인 디트리히가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누님은 괜찮습니까?”
시안나는 부끄러운 나머지 몸을 일으켰다.
“나는 괜찮, 앗!”
멀쩡히 잘 대답하던 시안나가 얼굴을 찡그렸다. 발꿈치가 땅에 닿자 뼈가 어긋나는 것만 같았다. 한쪽 무릎을 꿇고 접질린 듯한 발목을 감싸 쥐었다.
“다치, 셨습니까?”
그녀는 삐끗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디트리히는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붉은 생채기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
그는 시안나 앞에 반쯤 앉고 바지 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무릎에 질끈 동여맸다.
하얀 손수건에 새빨간 수채화가 떠올랐다.
“상처가 깊어 보입니다.”
“아냐, 그래 봤자 좀 까진 것뿐인걸. 걱정해 줘서 고마워.”
“…….”
그녀는 음울함을 풍기는 디트리히의 부축을 받아 엉거주춤 일어섰다. 근처에서 말이 괴롭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주변은 핏자국이 풀잎을 적시고 있었다.
“이건?”
시안나는 절뚝거리면서 말에 다가갔다. 말발굽에 사람 치아 모양인 철제 덫이 콱 박혀 있었다.
“덫…… 을 누가 놓았나 봅니다.”
“덫이라고? 이 풀숲에?”
몬스터나 짐승을 사냥하려고 한 거면 당연히 그럴 수 있었다.
‘그렇다면 디트리히는 어째서 길목도 아닌 으스스한 수풀로 말을 몬 걸까?’
알 수 없는 의심이 등 뒤에 쫙 달라붙었다.
디트리히가 벌벌 떨지는 말 다리를 받치고 덫과 발판 사이를 벌렸다. 말발굽이 푸드덕거리더니 벌려진 덫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디트리히가 덫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이 크기는 몬스터 용이 아니라, 사냥용……. 이 근방에 짐승이 출몰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을 살폈다. 도저히 달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걸어서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짐승이 나오기 전에 빠져나가자.”
그때였다. 갑자기 얼굴 옆으로 세찬 바람이 휙 스쳐 지나갔다.
팍!
시안나는 지름이 커다란 나무를 등지고 있었다. 눈을 커다랗게 뜬 시안나가 숨을 들이켜며 뒤돌아보았다.
이끼가 낀 두툼한 나무껍질 사이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아까 전만 해도 없었으니 지금 그녀에게로 날아들었다는 소리다.
“대체……! 왜 화살이?”
휙!
다시 한번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그녀의 귀를 찢었다. 바로 옆에서 발생한 듯 생생했다.
팍!
시안나는 심장이 섬뜩해졌다. 나무에 푹 박힌 화살은 첫 번째 화살보다 더 좁혀진 거리였다.
“어?”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사라락, 사라락. 바닥에 서류 더미처럼 흩어진 갈색 단풍잎들, 하늘을 가릴 정도로 길게 뻗은 나무들, 어쩐지 음산하게 들리는 바람 소리.
짙은 녹음 가운데 까만 제복을 입은 디트리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매 사신처럼 무서웠다.
그는 긴장한 얼굴로 눈동자만 굴려 근처를 살피고 있었다.
“누님, 지금 오른쪽……. 10시 방향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집니다. 조심하십시오.”
괜찮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디트리히의 눈이 어둡고 기묘하게 빛났다.
그에게서 위험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아는 디트리히라면 절대 그녀를 해칠 리 없다. 그녀가 ‘아는’ 디트리히라면.
갑자기 나타난 덫, 그녀를 노리는 화살, 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진 디트리히.
비정상적인 상황이 시안나의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누님……. 제게 오십……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십니까?”
시안나에게 다가서려던 디트리히가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제가 어떤 얼굴인지 알지 못했지만, 어렵사리 유추할 수 있었다. 분명 디트리히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겠지.
아까부터 디트리히에게서 무언가가 걸렸다.
시안나는 이 의혹을 꼭 해소하고 싶었다.
“디트리히…… 한 가지만 물을게. 아까 꽤 외진 곳에 덫이 있었잖아. 그쪽으로 굳이 말을 몬 이유가 있어?”
“…….”
그의 얼굴이 그늘이 짐과 동시에 눈동자가 위험한 빛을 띠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가까이 오지 마! 대답해!”
공포에 질린 시안나가 부러진 나뭇가지를 휙 들곤 디트리히에게 무기처럼 겨누었다.
명백한 적의에 디트리히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두 사람 사이에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제가 두려우십니까?”
유독 음산하게 들리는 말과 동시에 그가 앞발을 디뎠다. 바스락, 낙엽이 짓밟히는 소리가 유난히 위협적이었다. 꼭 시안나 자신이 저렇게 짓이겨질 것만 같았다.
그가 심상치 않은 얼굴로 다가오는 것도 한몫했다. 거침없이 다가오는 디트리히가 바로 코 앞이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줄행랑쳤다.
“으윽! 오지 마!”
“누님?”
디트리히가 손을 뻗었지만 시안나는 이미 뛰쳐나간 뒤였다.
“헉헉…….”
접질린 발이 그만 뛰라며 고함을 질렀다.
디트리히가 설마 자신을 해할까? 말도 안 되는 망상이라고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게 허황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어째서 말을 일부러 외진 곳으로 몬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