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시안나는 소설을 곱씹어 보았다.
디트리히와 에르마야, 카릴의 삼각관계. 후에 카릴은 에르마야를 왕궁에 가두게 된다.
결국 디트리히는 왕국을 상대로 커다란 전쟁을 벌이기 때문에 디트리히가 왕국을 멸망시킨다는 예언은 타당해 보였다.
하지만 에르마야가 아슈토르 가문에 오는 것이 왕국의 멸망을 막는다는 건 생뚱맞았다. 그녀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두 남자 때문에 결국 왕국은 피바람이 불었다.
시안나가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는데, 에르마야는 할 말이 더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신탁이 하나 더 내려왔는데…….”
“그게 뭐죠?”
어쩐지 시안나를 향한 에르마야의 눈빛에 부러움이 요동쳤다.
“으음, 역시 이 신탁은 비밀로 할게요. 그 신탁을 상기할 때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거든요.”
호수 먼발치를 보는 에르마야의 옆얼굴에 슬픈 기색이 서렸다.
궁금했지만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는 분위기에 시안나도 덩달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에르마야가 빠르게 파고들었다.
“저……. 시안나 님께서도 질문하셨으니 저도 궁금한 점을 질문드려도 될까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에르마야가 기다리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시안나 님께선 헤이스 님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예상치 못한 물음에 시안나가 얼어 버렸지만 에르마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분의 관계가 무척 궁금해요. 아까 두 분이 약혼했다는 말, 사실인가요?”
“제 약혼이 에르마야 님과 무슨 상관인 거죠?”
우물거리며 손끝을 만지작거리던 에르마야는 긴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수줍게 대답했다.
“사실, 헤이스 님께서 제게 관심이 있는 것 같거든요.”
“네?”
시안나의 말꼬리 끝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헤이스가 에르마야에게 호감이 있다고? 그에게 고백을 받은 게 불과 어제 일이었다.
그것 말고도 황당한 이유는 그녀가 디트리히와 결혼한 몸이라는 거였다.
“조금 전, 공작님께 은혜를 갚기 위해 디트리히와 결혼하셨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맞아요. 저는 긱스 님과의 약속은 꼭 지킬 거예요. 반드시 디트리히 님의 저주를 완전히 풀 거라고요. 하지만…….”
그러고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에 손을 얹었다.
“헤이스 님이 밤마다 제 방을 찾아오실 정도로 열성적인데, 어떻게 넘어가지 않고 배기나요?”
에르마야가 수줍은 듯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보통 기사를 떠올린다면 뭇사람들은 고결함, 은의 갑주를 두른 근사하고 멋진 남자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에르마야는 낭만적이라는 느낌 대신 더럽다는 느낌이 앞섰다. 그들은 평민에게는 검을 들이밀고 재산을 수탈해 가는 약탈자였다.
한번은 수도로 향하는 길목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통행세를 낸 적도 있었다. 시장에 갈 때 맞닥뜨린 고블린이 덜 악랄하리라.
그렇지만 헤이스는 달랐다. 그는 숙녀에 대한 예의를 신실히 지켰으며 평민인 그녀를 고위 귀족 영애로 만들어 주는 남자였다. 말만 섞고 있어도 에르마야는 저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깡패 같은 기사만 보다 친절하고 열렬한 남자를 보니 눈이 돌아갔다.
그렇게 그녀는 헤이스라는 남자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에르마야 부인의 방에 매일…… 설마.”
헤이스…… 유부녀 취향이었어?
아니, 그보다 밤마다 부인의 방이라니, 엄청 위험한 관계인 거야?
뒤통수를 맞은 듯 골이 얼얼했다. 딱히 에르마야가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아 더 그랬다.
연이어 충격적인 말이 들려왔다.
“결혼을 결심한 건 헤이스 님 탓도 있어요. 헤이스 님께서 제게 꼭 공작님과 결혼해 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형의 원수를 갚고 싶다고…….”
헤이스의 형이 여왕의 저주에 걸린 건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정보였다.
시안나는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헤이스는 결혼 당일까지도 두 사람의 결혼을 막아 보겠다며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게다가 그녀에게 고백까지 하지 않았나.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고?
배신감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상황을 모르는 에르마야의 눈동자가 더없이 진지해졌다. 그녀는 이제껏 낸 적 없는 진중한 목소리를 던졌다.
“정말로 헤이스님과 시안나 님께서 약혼하신 건가요?”
쏴아아. 두 사람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지나갔다.
방금까지만 해도 따뜻한 햇볕에 둘러싸였던 몸이 언제 그랬냐는 듯 오한에 떨었다. 그리 차갑지 않은 바람인데도 어깨가 바들바들 떨려 왔다.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시안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와 헤이스는 디트리히의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 가짜 약혼을 한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진실을 말하면 결혼이 무효가 될까?
하지만 턱이 유독 무겁게 느껴져 움직이기 힘들었다. 헤이스가 그녀를 속였다는 것에 머리가 얼얼해서인 게 틀림없었다.
시안나는 작게 심호흡했다. 일단 헤이스의 변명을 듣고 싶었다.
“네. 약혼…… 했어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어째서 밤마다 제 방에…….”
에르마야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지만, 딱히 불쌍하게 여겨지진 않았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민망한 기운이 흘렀다.
어느새 배는 맞은편 호숫가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 넓은 호수 한 바퀴를 빙그르르 돈 것이다.
앗, 그러고 보니 저주에 대해 물어야 하는데!
시안나가 일어설 채비를 하는 에르마야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잠, 잠시만요. 디트리히의 저주는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이 필요해요.”
에르마야는 시안나의 눈빛에서 강한 불신을 읽어 냈다. 고심하는 얼굴로 입술을 사리문 그녀가 시안나의 귀에 바짝 입을 붙였다.
분명 멀찍이 떨어진 디트리히나 헤이스에게 들릴 리 없는데도 여간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디트리히 님을 조심하세요.”
무슨 의미지?
시안나가 흔들리는 눈으로 보았지만 에르마야는 배에서 내려 다가오는 남자들을 보고선 시치미를 뚝 뗐다.
시안나는 의문을 밀어 둔 채 그들을 맞이했다.
역시나 배에서 내린 두 사람의 얼굴엔 불만이 그득했다.
“두 사람이 재미있게 즐긴…… 건 아닌가 보구나.”
“하아……. 이야기 다 하셨으면 빨리 승마나 하러 가죠.”
헤이스는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시안나에게 단단히 삐진 듯했다.
평소 같으면 헤이스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장난을 쳤겠지만 방금 들었던 충격적인 소식에 딱히 살갑게 굴고 싶진 않았다.
“이쪽입니다.”
헤이스가 숲 입구의 나무에 묶인 채 대기 중인 두 마리 말이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흑마와 갈마가 사람들이 다가오자 푸르릉 콧김을 뿜었다. 한 마리는 전쟁의 공을 치하하며 전대 여왕이 긱스에게 내린 말이었고, 다른 한 마리는 새끼 때부터 긱스가 길러 온 말이었다.
단 두 마리뿐이었다. 즉 두 명씩 짝지어 타야 한다는 소리다.
디트리히와 헤이스의 눈에 불이 붙은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이번엔 약혼자인 제가 시안나 님과 함께 말에 오르겠습니다.”
헤이스가 약혼자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에 디트리히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아니, 누님의 동생인 내가 타겠어.”
“약혼자가 동생과 같은 줄 아십니까? 게다가 친동생도 아니지 않습니까.”
헤이스의 눈썹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디트리히가 시안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잘생긴 얼굴로 눈웃음 지었다. 순간 맑은 가을 공기와 청명한 기운이 그녀에게 스미는 것 같았다.
“타인인데…….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더 좋은 겁니다. 안 그런가요, 누님?”
얇은 입매가 진해졌다. 잘생긴 미남이 나른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는데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시안나는 막힘없이 말하는 디트리히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그렇지. 아무래도 타인인데 가족처럼 같이 있기도 했고…… 그러니까 더…… 좋아.”
맞아. 타인인데 가족처럼 같이 있으니까 가족보다 더 애틋하고…… 어라? 진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느새 설득당해 버렸다?
“그러니까 누님은 저와 타셔야, 합니다…….”
눈매를 반달로 접으며 눈웃음치는 미소가 저렇게나 음흉하게 느껴지다니.
꿀꺽. 시안나는 침음을 삼켰다.
그녀와 에르마야 둘 다 승마는 영 젬병이었기에 결국 두 남자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했다.
‘지금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헤이스보단 디트리히가 천배 만배 낫겠지.’
내밀린 두 남자의 손을 번갈아 보던 그녀가 디트리히의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디트리히 님을 조심하세요.’
에르마야의 경고가 머릿속에 부상했다.
일순 디트리히의 어깨너머 에르마야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비장한 얼굴로 끄덕였다.
조심하라는 소리 같았다.
그럼에도 시안나는 뼈마디가 굵은 손을 재차 움켜쥐었다.
저주에 풀린 뒤, 시안나는 디트리히에게서 생경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흑요석 빛 머리칼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는 깊은 눈동자, 한층 낮아진 것 같은 목소리.
최근 디트리히가 어딘가 변한 것 같다는 오묘한 감정이 치솟았다. 시안나는 이상한 감각을 잠재우고 싶었다.
‘디트리히에게, 정말 괜찮은 거냐고 이참에 물어보자.’
복잡한 상념을 떨쳐 내듯 시안나가 머리를 털었다.
그녀의 선택을 받은 디트리히는 보조개가 깊게 파일 정도로 웃으며 시안나를 깃털처럼 가볍게 안장으로 올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새까맣게 윤이 나는 갈기, 말 허벅지에 쌓인 근육만 보아도 뛰어난 명마였다. 이윽고 뒷좌석에 디트리히가 자리를 잡았다.
드레스의 얇은 천에 둘러싸인 등 뒤로 말보다 더 단단한 가슴 근육이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