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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40화 (40/70)

[40]

시안나가 어색한 상황을 수습하려 디트리히를 달랬다.

“내가 아니라 에르마야 양에게 건네야지.”

“누님한테…… 주고 싶습니다……. 싫은, 겁니까?”

그가 특유에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가여움을 연출했다. 디트리히는 시안나가 유독 이 분위기에 약한 걸 알고 있었다. 역시나 시안나는 갈팡질팡거렸다.

에르마야 앞이긴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아직 디트리히는 정신이 온전치 않으니까.

마음이 약해진 시안나는 냉큼 입을 열었다.

“으응, 아.”

우물우물. 입 안에서 상큼한 양상추와 토마토가 아삭하게 터졌다.

맛있어. 디트리히가 먹여 주는 거라 그런 것임에 틀림없었다.

“디트리히도 아, 해.”

시안나는 샤인 머스킷 한 알을 땄다.

그녀가 친절히 입 안으로 쏙 넣어 주자 기분이 좋아진 듯 입꼬리가 옅게 올라갔다.

어쩜 디트리히는 먹는 모습도 천사 같지? 원래는 그냥 천사였다면 지금은 어른스러운 매력에다가 퇴폐적이기까지…….

그의 어깨너머로 붉은색 단풍잎이 새록새록 흩날리는 덕에 명화가 따로 없었다. 손가락을 핥는 것마저도 눈부신 자태였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헤이스의 속도 모른 채, 시안나는 흐뭇하게 디트리히를 구경했다.

헤이스는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시안나의 어깨를 제 쪽으로 당겼다.

“시안나 님. 약. 혼. 자. 인 제가 주는 음식도 드셔야죠?”

시안나가 어안이 벙벙해하며 볼을 긁적였다.

어? 나한테 약혼자가 존재했나?

그러다 헤이스가 씩 웃었다. 시간 초과라는 웃음이었다.

아, 맞다. 헤이스가 약혼자였…… 아니, 잠깐. 지금 턱을 들어 올리면!

설마 여기서 키스하려는 건 아니지?

시안나가 당황해 어버버하는데, 입 안으로 샤인 머스킷 알이 쏙 들어왔다. 입 안에서 시큼한 맛이 톡 터졌다.

“맛있습니까?”

“으…… 응!”

우물거리는 주제에 잘도 대답했다. 헤이스는 조금 전까지 다른 남자가 주는 음식을 냅다 받아먹는 그녀가 가증스러웠다.

그녀는 좀 더 남자에 대해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자꾸만 그와의 약혼을 까먹기까지. 정말이지 보고만 있으면 속에서 불길이 화르르 치솟았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약혼 계약서를 촘촘히 고쳐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는데, 디트리히가 헤이스의 팔목을 붙잡았다.

“누님은…… 앞으로 내가 챙겨 주겠어……. 그러니까 하지 마.”

헤이스의 짙은 눈썹이 슬금슬금 올라갔다. 그가 팔짱을 끼며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디트리히 님.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디트리히 님은 에르마야 님의 남편입니다. 아내를 돌보는 것이 남편의 미덕 아니겠습니까?”

“누님을…… 잘 돌보는 건 동생의, 미덕이거든.”

디트리히는 멀뚱히 있던 시안나의 팔짱을 꼈다.

헤이스는 기가 찼다. 여덟 살 아이한테 설명해도 이것보단 잘 알아먹을 것이다.

디트리히는 저주에 풀리기 전보다 더욱 칭얼거렸다.

시안나 쟁탈전이 점입가경으로 변했다.

“누님한테 밥도 먹여 주고 배도 같이…… 탈 거야.”

“호수 구경 말씀입니까? 그것만은 절대 양보 못 합니다.”

헤이스가 인상을 쓰며 호숫가에 한편에 고즈넉이 정차해 있는 배에 눈길을 돌렸다.

하얀색 페인트로 덧칠해져 있는 나룻배는 네 명이 타기에 비좁아 보였다. 두 척이라 각자 두 사람씩 나눠 타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즉, 시안나와 누가 타느냐가 쟁점이었다.

으악! 누구랑 배를 타야 하지?

잠깐, 배라고?

시안나가 머리를 쥐어 싸매는데, 문득 좋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 흉흉한 두 사람 사이서 선언했다.

“나, 에르마야 부인과 함께 타고 싶어.”

두 남자의 얼굴이 동시에 왈칵 일그러졌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눈빛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화도 내지 못할 정도로 밝게 미소했다.

“두 사람 다 경치도 좋은데 싸움만 해 대고, 차라리 에르마야 부인이랑 함께 있을래.”

시안나가 에르마야의 어깨를 부딪치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어머, 저는 좋아요!”

“그럼 나랑 에르마야 부인. 디트리히와 헤이스가 함께 타는 걸로!”

그 말에 디트리히의 입꼬리는 아래를 모르고 축 내려갔고, 헤이스는 쯧 소리를 내며 혀를 찼다.

휴, 다행이다. 만약 둘 중 한 명을 선택했으면 사나운 눈빛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호수 중앙으로 가면 아무도 듣지 못할 비밀 이야기를 잔뜩 할 수 있겠지.’

어째서 에르마야가 디트리히와의 결혼을 쉽게 승낙한 것인지, 저주는 어떻게 된 건지 한시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

피크닉 중간은 디트리히와 헤이스가 누가 더 시안나에게 샌드위치를 많이 주는지 경쟁하듯 먹였기 때문에 이상하게 흘러갔다.

점심이 끝난 뒤, 시안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빵빵해진 배를 쓰다듬었다. 코르셋이 터지지나 않을까 걱정이었다.

미셰리가 잔소리하는 건 아니겠지.

시안나는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뒤뚱뒤뚱 호숫가로 향했다.

호수에 다가갈수록 수분을 머금은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하늘이 비치는 청록색 수면과 물가를 배경으로 붉게 물든 가을 산이 예쁘게 자리 잡아 명화가 따로 없었다.

물이 어찌나 맑은지 호수에 나뭇가지가 비쳐 참새가 내려앉았다가 놀라선 황급히 날갯짓할 정도였다.

“누님, 배를 타시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마워.”

너울거리는 호수 냄새를 맡으며 드레스를 추어올린 시안나가 배 위에 올라탔다.

에르마야까지 착석한 후 시안나는 노를 젓기 시작했다.

찰싹찰싹. 잔잔한 수면에 잔물결이 일렁이며 배가 움직였다.

그녀는 디트리히와 헤이스가 탄 배를 떨어뜨려 놓으면서도 힐끔 훔쳐봤다.

두 사람이 간간이 이야기하는 모습이 잡혔다. 무슨 대화를 할지 호기심이 일면서도 주제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저, 저와 배에 탄 건 무슨 일로…….”

에르마야는 연신 손등을 긁었다. 그녀도 시안나가 어려운 것 같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원래 평민 출신이기도 하고 시안나가 저택에서 가지는 위치도 불확실해 호칭부터 정립되질 않았다.

시안나는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사실 부인께 질문드리고 싶은 것이 있었거든요.”

“어라? 제게 질문요?”

“네. 그게…….”

그녀가 호기심에 눈을 댕그랗게 뜬 에르마야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디트리히와의 결혼을 결심하시게 된 계기,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많은 것이 함축된 물음이었다.

어째서 어눌하게 말하는 디트리히를 선택한 것인지, 어째서 긱스를 따라 이리로 왔는지, 몇백 년 만에 나타난 성녀로서 모든 사람의 칭송을 받을 수 있을 텐데 그저 공작 부인으로 살려는 건지.

에르마야는 그 간단한 질문에 의도를 알아차린 듯했다.

“……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는 사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위었어요.”

시안나가 읽은 소설에선 여주 에르마야의 유년 시절이 등장하지 않았다. 귀가 솔깃해진 시안나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제겐 남부럽지 않은 양부모님이 계세요. 없는 살림에도 살뜰히 챙겨 주셨답니다.”

그녀는 먼발치를 바라보았다. 에르마야의 붉은 눈동자에 부모님에 대한 추억이 별똥별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불행이 찾아왔어요. 제 고향은 악덕 영주가 다스리고 있었거든요. 세금은 나날이 늘어 갔고, 아버지는 큰 빚을 지고 말았죠.”

그러던 와중, 성력은 어느 날 갑자기 발현되었다. 처음에는 파를 썰다 칼끝에 손가락이 베인 아주 사소한 일이 계기였다.

그녀는 제가 손을 갖다 대기도 전에 손바닥에서 빛이 나더니 상처가 아무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기쁜 나머지 다친 사람들이 마을에 보이면 족족히 치료해 주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기 마련이죠.”

소문을 들은 영주가 빚을 거들먹거리며 자신의 첩이 되라고 에르마야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영주는 환갑을 맞은 노인이었는데 그녀의 신비한 힘으로 영생을 꿈꾸는 자였다.

반항도 잠시뿐. 에르마야는 사랑하는 양부모님을 위해서 남자의 첩이 되기로 했다.

그렇게 결심한 바로 다음 날. 어딘가 초췌해 보이는 귀족 남자가 나타났다. 긱스였다.

“긱스 님께서는 제 아버지의 빚을 전부 갚아 주셨어요. 게다가 새로운 지방에 보금자리도 만들어 주셨죠. 어떻게 따라오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당시 에르마야는 긱스가 두려웠다. 저런 거금을 선뜻 갚아 주다니, 분명 좋은 의미는 아닐 것이다. 세상의 이치는 냉혹한 법이니까.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분은 제게 그분 아들과의 결혼을 원하셨죠. 성력으로 아들에게 걸린 저주도 풀어 주고 자기 대신 아들의 곁에 있어 달라고 하면서요. 늙은 영주에게 끔찍한 짓을 당할 바엔 그편이 훨씬 나았죠.”

“그럼 은혜를 갚기 위해서…….”

시안나는 어째서 그녀가 백치인 디트리히와 결혼했는지 이해했다.

에르마야에게 긱스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어요.”

에르마야의 붉은 눈이 루비처럼 빛났다.

“성녀라고 스스로 깨닫기 전, 아주 어렸을 때 신탁을 받았거든요.”

“신탁이요? 설마 아슈토르가가 제국을 멸망시킨다는 예언인가요?”

시안나는 여왕이 긱스에게 디트리히가 왕국을 멸망시킬 운명을 타고났다고 한 말을 떠올렸다.

에르마야가 고개를 내저었다.

“꽤 오래전 일이기도 했고, 여기까지 왔으니 시안나 님께 밝혀도 되겠죠.”

에르마야는 비밀이야기를 하듯 입에 손을 갖다 댔다.

“성인이 된 제게 다른 세상으로 인도할 남자가 온다고 했어요. 또 신께선 그 남자를 따라가라고 했지요.”

시안나의 심장이 지끈거렸다. 꼭 디트리히와 에르마야는 어차피 만날 운명이었다고 정해진 것 같았다.

“그 이유는 바로 왕국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였어요.”

시안나의 눈이 에르마야가 공작 저에 온 까닭을 듣고 크게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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