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나…….”
디트리히한테 걱정을 받을 줄이야.
장례를 치를 때도 시종인들은 연신 디트리히를 챙겼다. 그 자식에게 묻는 걸 당연해하면서도 시안나는 소외당해 마음 한구석이 외로웠다.
그녀를 신경 써 주는 건 헤이스와 미셰리 다음,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가 시안나의 거뭇한 눈가를 문지르며 눈을 맞추어 왔다. 그녀만의 오롯이 담은 금안이 깊어졌다.
“저를 억지로 웃게 해 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보다 누님이 더 걱정입니다. 자신을 더 신경 쓰십시오.”
시안나가 작게 신음했다. 심장에 뜨거운 무언가가 흐르고 찬찬히 뭉그러지는 듯한 느낌이 선연했다.
“그러니 칼질은 그만하십시오. 제가 깎아 드리겠습니다.”
디트리히는 독사라도 보는 눈으로 단도를 휙 낚아채더니 사과를 빙그르르 돌려 깎기 시작했다.
앗! 내가 디트리히에게 해 주고 싶었는데.
그런데 의문이 뒤따랐다. 디트리히가 사과를 깎을 수 있나? 나이프 질도 몇 년 연습해서 겨우 하던 아이인데.
하지만 그녀의 걱정이 무색하게 완성된 사과는 시안나보다 훨씬 예쁜 달 모양이었다. 씨앗 눈에 토끼 귀까지, 조각한 사과는 완벽하게 깜찍했다.
“입 벌리십시오.”
강한 위화감이 들었다.
시안나가 입을 아, 하고 열기도 전에 두꺼운 엄지가 아랫입술을 뭉근하게 눌렀다. 그녀가 갑작스러운 접촉에 굳어 버리자 더욱 벌리라는 듯 압박을 가했다.
얇은 입술에 뜨거운 손이 달라붙으니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묘한 열감이 올랐다.
진득하게 문지르는 느낌이 아닌데도 어쩐지 키스를 연상키는 손길이었다.
끈적한 과즙이 입술에 달라붙자 확 야릇해졌다.
호흡이 힘든 건 장작불에 데워진 습도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좀 더…….”
무언가 찌르르한 시안나와 달리 디트리히는 천연덕스럽게 턱을 검지로 받치고 엄지에 힘을 주었다. 입천장이 절로 들렸다.
그는 입이 충분히 열린 것을 확인한 후 반질반질한 사과를 집어넣었다.
“웁!”
사과 때문에 호흡이 막혔다. 그런데도 마음은 온통 입술을 지분거리는 손가락에 쏠렸다.
사과를 먹여 주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손에 땀이 나지? 스스로가 미친 것 같았다.
시안나는 사과를 꿀떡 넘기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불현듯 물었다.
“디트리히……. 혹시 정신이 돌아온 거니?”
“네?”
디트리히의 등이 움찔 튄 것 같았다.
“칼질도 그렇고, 날 달래 주는 말도 길게 하고, ‘후으……’ 나 ‘흐……’ 같은 말버릇도 이제 안 하잖아?”
디트리히의 전매특허인 ‘후으……’가 왜 실종됐지? 설마 저주가 점차 풀어지는 상태라거나?
그러고 보니 아기처럼 보드라운 살냄새가 아닌 잉크 냄새가 디트리히 주변에서 풍겼다.
디트리히의 동공이 허를 찔린 것처럼 잘게 떨렸다. 그는 ‘아……’ 하는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입을 가렸다.
명백히 무언가를 숨기는 태도였다.
“디트리히?”
시안나는 디트리히가 일부러 백치 행세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기쁜 일을 숨길 건 무어란 말인가.
디트리히는 재빨리 당혹감을 지워 냈다. 그가 시안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후으?”
그가 귀엽게 눈도 깜빡였다. 그러곤 어눌하게 말을 이었다.
“단풍놀이……. 흐…… 좋습니다.”
앗. 디트리히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디트리히는 어딘가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시안나는 금세 말투에 대한 의문을 지웠다.
“그럼 단풍놀이 가는 거지?”
“후으……. 네. 누님.”
어쩐지 후으…… 거리는 말투가 어색하게 들렸다. 별것 아니겠지?
“그래, 그럼 이만 일어나야겠다.”
시안나는 의자에 붙은 엉덩이를 떼어 냈다.
지금부터 세금 징수 상황이라든가 성문의 방벽 보수 공사에 관해 확인해야 했다.
긱스가 없는 지금, 디트리히도 일을 볼 수 없으니 행정 일을 그녀가 맡아서 할 심산이었다.
“디트리히? 방에 돌아가자. 데려다줄게.”
“먼저 들어가…… 십시오. 저는, 잠시만 머물다…….”
“항상 같이 방으로 돌아갔잖아?”
디트리히가 시선을 회피했다. 그다음 대답이 그녀를 더욱 미궁으로 자빠뜨렸다.
“잠시…… 쉬었다 가고 싶습니다.”
응접실에서 한 일이라곤 고작해야 단풍 구경을 같이하자고 이야기한 것과 사과를 먹여 준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디트리히의 얼굴색이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새빨갰다.
“혹시 어디 아픈 건…….”
도리도리.
시안나는 디트리히의 고집에 어쩔 수 없이 혼자 돌아갔다.
탁.
응접실의 문이 닫히자 디트리히가 자신의 손에 시선을 내렸다. 아까까지도 입에 사과를 밀어 넣었을 때 살짝 스친 통통한 입술의 감촉이 생생했다.
방울토마토처럼 톡 터질 것 같은 도톰한 입술.
디트리히는 그 감촉을 놓치기 싫었다. 그는 얼른 제 손을 입술 끝으로 가져가곤 도장을 찍듯이 꾹 눌렀다.
황홀함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그의 기분이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절 호수에 데려가려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소아르 호숫가는 경치도 아름다웠지만 높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울창한 숲으로도 유명했다. 사람 하나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기 좋은 곳이란 소리다.
“차라리 잘된 일이군.”
그녀의 진심을 알아낼 절호의 기회였다.
***
“하아, 내가 디트리히를 곤란하게 만들기라도 한 건가?”
돌아가는 도중, 시안나는 자신이 말실수라도 한 건 아닌지 되짚어 보았다.
그때였다.
퍽!
모퉁이를 막 돌아선 순간 커다란 물체와 부딪치고 말았다. 딱딱하면서도 탄력이 있는 무언가였다. 시안나는 엉덩방아를 쿵 찧었다.
“아야…….”
“괜찮으십니까?”
검상이 난 투박한 손이 그녀 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돌덩이 같은 몸의 주인은 다름 아닌 헤이스였다.
“읏. 헤이스……. 미안해. 잠시 딴생각 좀 하느라…….”
그가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짚어 그녀의 몸을 쑥 들어 올려 준 덕에 시안나는 곧바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연말 행사처럼 열리는 단풍놀이에 헤이스도 항상 동행했었다.
“헤이스. 디트리히랑 기분 전환 겸 소아르 호수에 가려고 하는데, 혹시 시간 돼?”
“저로서는 영광이죠.”
헤이스가 흔쾌히 수락하며 눈가를 휘었다. 데이트 신청을 받은 것 같은 기쁨이 잔뜩 배어 나와 시안나는 덩달아 겸연쩍어졌다.
그때 헤이스의 등 뒤로 들려온 들뜬 목소리가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어머, 저도 관심이 가는데, 혹시 같이 가도 될까요?”
불쑥 튀어나온 건 눈을 빛내는 에르마야였다. 바로 뒤에 나타난 거로 보아 헤이스와 담소를 나누던 중인 것 같았다.
저번에도 정원을 함께 거닐더니. 시안나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저도 저택에만 있어서 심심했는데 호수라니, 꼭 구경하고 싶네요.”
재밌을 거 같아요, 라고 말하며 눈웃음친 에르마야가 헤이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헤이스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대체 두 사람은 무슨 사이지?
마침 잘된 일이기도 했다. 시안나도 디트리히에 대해 자세히 상담하고 싶었으니까.
“물론이죠! 좋아요!”
다음 날. 네 사람은 소아르 호수를 구경하러 가게 되었다.
***
무르익은 가을이었다. 단풍이 곱게 든 숲을 배경으로 물 향기가 솔솔 올라왔다. 바닥에 우수수 떨어진 황금색 부스러기가 바람결에 이리저리 날아다녔고, 기다란 침엽수와 단풍나무가 춤을 췄다.
하얀 새털구름이 여러 갈래 펼쳐진 푸른 하늘 아래, 시안나는 에메랄드빛 호수를 거닐며 물 표면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장면을 구경했다. 호수 중앙에 청둥오리 한 쌍이 서로의 털을 골라 주는 모습이 평화로웠다.
아, 역시 소아르 호수는 평온하고 좋아.
바람도 그녀를 환영하는 듯 솔솔 불어와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었다.
“이쯤에서 자리를 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럴까? 따사로운 볕에 그늘도 적당히 있어 여기가 딱이네.”
시안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시안나는 손에 쥐고 있던 손가방에서 돗자리를 꺼냈다. 짚으로 얼기설기 엮은 돗자리가 잡초 위에 촤락 펼쳐졌다. 곧이어 디트리히와 헤이스, 에르마야, 시안나가 둥글게 앉았다.
영 수다스러운 조합이 아니었다.
시안나는 어색한 침묵을 가라앉히려 중앙에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그녀가 도시락을 열 때마다 샌드위치나 핑거 푸드, 샤인 머스킷처럼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음식들이 드러났다.
구경하던 헤이스는 먼발치를 응시했다.
“변함없는 풍경 때문에 항상 이곳에 오면 이상한 감정이 듭니다.”
꼭 추억에 풍덩 빠진 사람처럼 잠긴 목소리였다.
“나도 그래. 시간은 바삐 흘러가는데 여기만은 변치 않아.”
10년 동안 꾸준히 다닌 곳이지만 이곳은 공기째 얼려 보존한 것처럼 변함이 없었다.
디트리히도 분명 좋아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시안나가 디트리히를 돌아보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단풍을 배경으로, 디트리히는 그녀를 보고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계속 뚫어지게 보고 있었던가.
시선이 맞부딪칠 줄 몰랐던 시안나는 괜히 뒷머리를 긁적였다.
“디트리히는 호수 경관이 재미가 없나 봐. 예전에 집에 돌아가기 싫어해서 울고불고할 정도였다고.”
“이전…… 말씀입니까.”
“응. 혹시 기억이 안 나는 건…….”
“글쎄요. 다만 확실한 건…….”
주변보다 더 환한 금빛 눈동자에 기이한 빛이 스쳤다.
“제가 이 호수를 좋아했다면…… 이 풍경 속에 누님이 계셨기 때문…… 입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그가 시안나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매만졌다.
머리카락에도 신경 세포가 존재하는 줄 처음 알았다.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이 저릿했다.
으악! 이게 아니지! 헤이스나 에르마야가 있는 자리에서 무슨 소리람.
계면쩍어하면서도 볼에 붉은 기가 도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지금 디트리히는 예전보다 훨씬 차분한 느낌이었다.
정말로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것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하면 그가 그녀에게 사실을 숨길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그냥 뺨을 문지르며 화끈거리는 속을 달랬다.
그런데 옆에 앉은 에르마야가 약간 떠는 것이 느껴졌다. 헤이스도 더는 못 봐주겠다는 표정이었다.
어쩐지 공기가 가을바람치고 1도 내려간 것처럼 차가웠다.
“얼른 점심이나 먹자. 하하…….”
디트리히를 시기 섞인 눈빛으로 보던 헤이스가 샌드위치를 집은 손을 내밀었다.
“시안나 님. 제가 먹여드리겠…….”
“누님. 아, 하십시오.”
헤이스의 말을 잘라먹은 디트리히가 질세라 그녀에게 샌드위치를 대령했다.
화합의 장을 만들려는 그녀의 의도와 달리, 불화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