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그가 전한 말을 곱씹자 디트리히의 반듯한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 말 자체가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종은 손바닥을 비비며 제가 본 걸 줄줄 읊었다.
“디트리히 님께선 공작님을 잃은 충격으로 기억까지 잃으셨습니다.”
시종은 디트리히가 모든 걸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가 계속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한 가지 알아두십시오. 시안나 님께선 긱스 공작님을 살해하셨습니다.”
시종이 두 눈을 부릅떴다. 신뢰성을 더하려 한 동작이었지만 디트리히는 심드렁하게 팔짱을 낄 뿐이었다.
뻘쭘해진 남자가 큼큼, 거리며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방금 전, 헤이스 님께선 시안나 님을 필사적으로 감싸셨지만 두 분은 약혼 관계입니다. 그 여자…… 히익! 아니 시안나 님을 일부러 변호하는 거죠. 분명 전 공작님의 살해죄를 덮으려 수작을 부리는 겁니다.”
그의 입이 멋대로 시안나의 이름을 나불거리자 디트리히가 맹수처럼 눈을 빛냈다.
그는 제 잘못을 깨닫고 꼬리를 내렸다.
그러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제 아버지를 죽인 여자에게 단단히 홀린 태도라니, 앞날이 큰일이었다.
그는 비굴한 웃음으로 갈무리 짓고는 슬그머니 여쭈었다.
“혹시 저주에 걸렸을 적 기억이 온전하십니까?”
남자는 속을 긁는 재주가 뛰어났다.
“그게 왜 궁금한 거지?”
“방금 누님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공작님과 그 여자…… 아니, 시안나 님은 피가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공작님께서도 목숨이 위태합니다.”
시종이 아무런 사심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지만 묘하게 쾌활한 것이 거슬렸다.
그는 기도 차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본론이 뭐지?”
“시안나 님은 위험한 분이십니다. 그녀를 제거해야 합니다.”
쾅! 그가 주전자며 물그릇이 놓인 테이블을 강하게 내려쳤다.
반동으로 물컵이 와장창 깨졌다.
디트리히가 눈빛으로 미쳤냐고 묻고 있었다. 금안 너머로 광포한 활화산이 솟구쳤다.
“내게 조심하라고 한 이유가 설마 그게 단가? 단지 내 누님과 내가 피가 이어지지 않은 것, 그리고 누님께서 죽은 아버지의 시체 앞에 있었다는 거 하나?”
잘못하다간 제 목이 날아갈 것 같은 예감이 든 시종이 부랴부랴 고개를 저었다.
“시안나 님께선 뒷말이 많았습니다. 저주에 걸린 디트리히 님을 끼고 다니는 게 공작이나 공작 부인 자리를 노린다는 소문이 무성했죠. 공작가를 꿀꺽 삼키려는, 욕심 많은 여자입니다.”
그가 무어라 지껄일수록 디트리히의 표정은 점점 딱딱해졌다. 마지막에는 답답하다는 듯이 앞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한숨을 성대하게 내뱉었다.
“하아……. 입만 아프게 만드는군. 결국 내 누님이 아버지를 찌른 걸 직접 보지도 않았다는 소리지. 정말이지 쓸모없는 정보야.”
“저는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라 공작님께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러자 어둠 속에서 어스름한 불빛이 비치는 디트리히의 얼굴에 노기가 일었다.
겁먹은 남자는 허벅지를 덜덜 떨며 볼썽사납게 딸꾹질까지 했다.
남자의 목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원래는 디트리히를 제게 기대게 만들어 신뢰를 얻을 심산이었는데, 모든 게 헝클어졌다. 그가 막 깨어나 멍했을 때, 잘 이용해 먹을 수 있을 거라 여겼던 흐리멍덩한 첫인상을 수정해야 했다.
눈앞에 남자는 사람을 오랫동안 다루어 본 노련한 가주였다.
‘하아, 안 되겠군. 두 사람을 이간질하는 건 실패했다고 보고하는 수밖에.’
이렇게 과민 반응할 줄이야. 알았다면 방문조차 얼씬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큭, 실례하겠습니다.”
남자는 붉으락푸르락해진 낯으로 넙죽 인사한 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사라졌다.
방에 혼자 남게 된 디트리히가 안면을 쓸어내렸다.
“하아, 저런 날벌레가 꼬여서…….”
시안나에 관한 것을 다른 사람 귀로 듣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그녀가 제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확인해도 내가 직접 해.”
그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빛이 일렁였다.
잠시 뒤 그는 낯선 사람처럼 제 방을 살폈다. 커다란 책장 아래에 알록달록한 블록이 존재했다. 저주에 풀리기 바로 전날까지 갖고 놀던 장난감이었다.
쌓인 블록은 누가 조금만 살펴보더라도 아슈토르 저택을 흉내 낸 것을 눈치챌 것이다. 현관이며 성문까지 만든 것이 꽤나 꼼꼼했다.
디트리히는 블록에 다가가선 구두코 끝으로 저택의 하층부를 툭 건드렸다.
나무 블럭이 아무렇게 펼쳐져 있는 그림책을 와르르 덮쳤다.
“전부 정리해야겠군.”
기억을 되찾은 그는 더 이상 어린아이 놀이를 할 이유가 없었다. 디트리히는 그림책도 집더니 양옆으로 부욱 찢어 버리고 벽난로 속으로 던졌다.
타닥, 타닥. 책이 타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불이 치솟았다. 크게 요동치는 불길 너머로 디트리히의 차가운 낯빛이 떠올랐다.
그는 까맣게 타 들어가는 종이를 응시하며 시안나를 떠올렸다.
***
공작이 타계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왕국을 덮쳤다. 명망 있는 가문의 영주가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본디 자신의 땅을 통치하던 영주가 돌아가신다면 행정 처리에 공백이 생기기 때문에 영지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하지만 슬퍼할 거란 예상과 달리 그들이 나타낸 건 정반대로 분노였다. 긱스가 십여 년간을 거친 영지민 납치 사건의 범인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영지민들이 아슈토르가의 문양이 그려진 갑옷을 입은 기사를 보고 땅에 찍, 침을 뱉을 정도로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결국 아슈토르가는 왕실에 벌금과 영토 일부를 반납했다.
긱스가 왕가에 약속한 ‘오늘 중으로 찾아가겠다는 말’은 그의 시체라도 보내도 되냐는 서신에 왕이 극구 거부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딱히 디트리히에겐 어떤 처분도 내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거운 죄를 지은 가문에 연좌제를 내리기도 했지만 백치인 아들이 벌을 받는 건 가혹하다는 의견이 지배했다. 어쩌면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건 카릴만이 알 것이다.
긱스의 장례식은 디트리히와 시안나, 오래 일한 시종인들만 참관해 조용히 치러졌다. 시안나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눈물 한 점 흘리지 않는 디트리히가 신경 쓰였다.
***
“누님, 무슨 생각 중이십니까?”
“아, 널 앞에 두고, 미안.”
디트리히의 맞은편에 앉은 시안나는 사과를 깎으며 벽난로에선 불을 쬐고 있었다.
응접실은 창문에 성에가 낄 정도로 따뜻했다. 두 사람은 고즈넉한 실내에서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시안나는 다시 바지런히 사과를 깎았다. 응접실 천장에 사각사각 소리가 닿으며 기다란 사과 껍질이 접시 위로 투둑, 떨어졌다.
‘하아, 자꾸만 그 책이 신경 쓰이는데…… 찾을 곳은 없고.’
긱스가 말한 요상한 책의 행방이 묘연했다.
그녀는 디트리히가 깨어난 이후 모든 책을 뒤졌지만 그 책은 연기처럼 실종된 뒤였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빼돌린 걸까?
공작의 서재에 입장할 수 있는 아슈토르 공작 저 내부 사람의 소행일 텐데.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결국 긱스가 봤다는 책의 행방은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조만간 우연히 발견하게 되지만 지금의 시안나는 알 수 없었다.
으아악! 우울해해 봤자 뭐가 나오겠어?
“디트리히, 단풍놀이 가자!”
“네? 갑자기…… 단풍놀이…… 말입니까.”
시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디트리히에게 단풍놀이를 권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로는 에르마야와 교류를 가진 뒤 은밀한 정보를 캐묻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설 속에서 저주를 풀 수 있다고 서술되었던 성력이 먹히지 않았다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참에 저주를 어떻게 하면 낫게 할 수 있는지 빠짐없이 들을 계획이었다.
두 번째로는 갑작스레 부모님을 여윈 디트리히에게 심신의 안정을 주고 싶었다.
“우리가 매해 가을마다 들렀던 소아르 호수 기억나니? 칼바람이 부는 겨울에도 햇볕이 들어서 디트리히가 좋아했잖아.”
사방에서 금가루 같은 은행잎이 떨어지고 바람이 연둣빛 잔디를 쓸어내리는 평원. 백조가 모이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심란하게 출렁거리는 마음에도 금세 평화가 드리웠다.
그랬기에 매년 가을이면 소아르 호수에 들리는 게 연례 행사였다.
“디트리히. 아, 해 봐.”
사과를 여섯 등분한 시안나는 그중 한 조각을 디트리히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
얌전하게 꿀꺽 삼킨 디트리히가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안 됩니까?”
“응?”
“저택에 가만히 계시면 안 됩니까?”
디트리히가 시선을 피하듯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소아르에서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디트리히라면 절대 거절하지 않을 터였다. 시안나는 나사 빠진 표정으로 변했다.
“소아르 호수에서 네가,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해도 몇 시간이고 떼를 쓴 건 기억나지 않는 거니?”
이상하다? 에르마야가 기억 상실이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는데?
저주에 풀리기 전과 다를 바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디트리히는 주저하는 기색으로 뜸을 들이더니 풍성한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똑바로 마주 보던 시안나는 찬란한 금빛 눈동자에 기이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걸 목도했다.
“누님께서 도망…… 치시는 거 같아서…….”
“응? 도망이라니?”
“누님께서 밖에 나가려고 하시니까…….”
도무지 말에 맥락이 맞지 않았다. 가을 소풍을 하러 가는 것과 도망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농담이라 치부한 시안나가 웃어넘겼다.
“무슨 소리야? 네가 우울할 것 같아서 기분 전환 시켜 줄 겸 말한 건데.”
그러면서도 디트리히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위화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날 밤 이후로 디트리히 앞에만 서면 공기 압력이 좀 묵직하게 변한다고 해야 하나.
지금도 보면 나른한 표정, 눈이 따가울 정도로 화사한 금빛 눈동자, 우아한 외모. 평소랑 똑같…….
아닌가? 좀 냉기가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뺨이 무언가로 덥혔다. 디트리히가 테이블을 짚고 제 뺨을 감싸 안았다.
“디트리히?”
“……저보다 누님 자신을 신경 쓰시면 좋겠습니다.”
의미 모를 말에 시안나가 고개를 기울이자 디트리히가 만면을 일그러뜨렸다.
“헤이스에게 정황을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일부러 누님에게 칼을 쥐여 주고 억지로 찌르게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조금 어두워진 듯한 금안이 시안나를 직시했다.
“누님은 괜찮으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