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자주 보았던 가슴이 유난히 다부지고 근육이 꽉 들어차 보일 정도로 성숙했다.
이윽고 촛불에서 나오는 붉은 빛이 디트리히의 까만 머리칼과 풍성한 속눈썹, 높은 콧대를 차례대로 비추었다. 콧대에 진한 그림자가 져 그의 얼굴 윤곽의 깊이감이 짙어졌다.
하지만 자꾸만 불이 꺼진 것처럼 어두운 눈동자가 걸렸다. 긴 꿈에서 빠져나와 속이 텅 비어 버린 사람처럼 흐리멍덩한 분위기에 불길한 예감이 그녀를 덮쳤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손을 가지런히 모은 에르마야가 시안나 옆에 섰다.
“저주를 푸는 성력이 담긴 스튜를 먹였지만……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긱스 공작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기억도, 생활 습관도 공작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으로 멈추어져 있습니다.”
“어째서……. 성력과 재료만 있으면 저주를 없앨 수 있는 게 아니었나요?”
시안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에르마야의 소매를 붙잡았다.
저주에 풀렸지만 정신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니, 최악이었다.
에르마야는 시안나의 어깨를 정중히 짚고 설명했다.
“저주는 풀렸습니다. 다만 풀리기 전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죽은 공작님을 목격한 후유증이라고 예상됩니다. 충격에서 도피하려는 발버둥 같기도 하고요.”
“그럴 수가……. 그럼 디트리히는 영영 정신이 무너진 채 살아야 하는 건가요?”
가슴이 너덜너덜한 넝마로 변했다.
에르마야는 흐린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무엇도 확답드릴 수 없습니다. 일단 충격이 클 테니 제때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심신에 안정이 될 거예요.”
“그런…….”
넝마 조각이 된 심장이 기어코 갈기갈기 찢겼다.
설마 그녀가 긱스를 찌른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걸까?
그녀는 전부 제 탓인 것만 같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에르마야는 무너진 시안나를 부축하며 안심시켰다.
“아까 시안나 님께서도 쓰러지셨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충분한 휴식을 취해 주세요.”
그 말에 시안나가 무너지는 마음을 추슬렀다. 디트리히마저 아픈데 자신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녀의 울컥하는 시선이 디트리히의 나른한 안면을 서성였다.
어딘가 넋이 나간 듯 흐릿한 초점. 권태로운 분위기.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지. 그녀가 어깨를 꼿꼿이 펴고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에르마야가 어깨를 짚은 손을 떼어 냈다.
“그럼 시안나 님, 푹 쉬십시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부인. 당신은 제게 성녀님이세요.”
시안나는 그녀에 대한 존경이 깊은 곳에서 우러났다. 비록 부인이라고 칭할 땐 가슴이 따가웠지만.
시안나는 당부하며 눈을 빛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제게 말씀해 주세요. 디트리히는 둘도 없는 소중한 가족이니까요.”
“그럼요.”
에르마야가 안심시키는 미소를 되돌려 주었다. 시안나는 그 덕에 한시름 놓으며 등을 돌렸다.
탁. 문이 닫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 좋아 보이던 에르마야의 얼굴에 미소가 지워지고 죄악감으로 뒤덮였다.
그녀가 침대에 상체를 일으키고 누워 있는 디트리히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렇게 말하면 될까요? 디트리히 공작님.”
“그래.”
어느새 디트리히를 둘러싼 몽롱한 분위기는 지워지고 없었다.
그는 밤공기만큼이나 서늘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지. 그래, 결혼에 관해 말하는 중이었지.”
디트리히와 에르마야, 두 사람은 디트리히가 저주에 풀리기 전 행해진 결혼 건에 관한 대화 중이었다. 하지만 시안나가 들어오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
등을 돌린 그가 튜닉을 벗으며 아까의 주제를 입에 올렸다.
“결혼은 없던 일로 하지.”
“공작님!”
“내 정신이 그땐 온전치 않았다는 걸 그대도 알 테지. 그러니 그냥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해. 금화는 두둑하게 챙겨 줄 테니.”
방금 전과 다를 바 없는 소리에 에르마야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하얀 천이 들리자 드러난 튼튼한 허리를 노려보았다. 잘 뻗은 등허리도, 비스듬히 보이는 본근도 근사한…….
아니 지금 무슨 망측한 생각이야!
저주가 풀린 뒤 냉기를 풀풀 풍기는 남자가 두려웠지만 그녀는 용기를 냈다.
“저는 금화도, 고향에 돌아가는 것도 전부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이 공작 저에 머무르고 싶습니다.”
“대체 얼마나 원하는 거지? 설마 작위를 받길 원하는 건가.”
“그게 아닙니…….”
촛불 때문에 생긴 검은색 음영이 근육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꿀꺽.
속으로 보면 안 된다고 꾸짖은 것도 잠시, 에르마야는 넋 놓고 근사하고 강한 굴곡을 구경했다.
남자는 저주 때문에 온종일 저택에서 지냈다. 그래서 다른 기사들의 구릿빛 피부에 비해 색소가 옅은 편이었다. 기사가 으레 가지고 있는 상흔조차 없는 피부였다.
창백하면서도 웅장하게 발달한 근육에 에르마야는 당장 달려들고 싶었다.
에르마야의 어리숙한 태도를 시안나가 알면 깜짝 놀랄 테지만 성녀 교육을 받지 않은 그녀는 생각도, 말투도 전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에르마야의 귀에 으르렁거리는 울음이 들렸다.
“……뭘 보는 거지? 할 말 없다면 나가 보지그래.”
“아, 그게 아니라, 혹시 결혼식을 올리고 난 뒤 며칠 새에 쫓겨나게 되는 제 처지를 생각해 보셨나요?”
디트리히는 어느새 옷장을 열고 옷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에르마야가 눈물을 쭉쭉 뽑아내는 시늉을 했다.
“공작님께선 왕을 제외하면 가장 존귀하신 분이니 이혼에 관해 왈가불가하는 이가 없겠지요.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이 공작 저를 나가면 사람들은 제게 무슨 하자가 있냐며 손가락질할 게 뻔하죠.”
합당한 말이었다. 공작과 평민. 두 사람의 결혼이 깨진다면 사람들은 비난의 화살을 만만한 에르마야에게 돌릴 것이다.
그건 디트리히에게조차 가엽게 여겨졌다.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자 에르마야는 제게 깃발이 넘어왔음을 직감했다. 그녀가 더욱 밀어붙였다.
“몇 개월간의 유예를 주십시오, 배려해 주시면 공작님의 은혜를 생각해서 떠나는 그날, 깔끔히 물러가겠습니다.”
디트리히는 에르마야를 지그시 응시하더니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곤 나가라는 듯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그녀는 작게 발끈했다.
“그리고 저희는 아직 부부니까…… 제가 옷 갈아입는 걸 도와…… 드리겠습니다.”
옷장에서 뻣뻣한 셔츠를 꺼내든 디트리히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젖혔다.
“사양하지. 말 그대로 몇 개월간 유예를 주는 것뿐이니 그대는 내 아내도, 그 무엇도 아니지.”
탐미적인 얼굴이 그녀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자 에르마야의 입꼬리가 아래로 축 꺼졌다.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흑요석 같은 머리칼, 시선만으로 상대를 제압시키는 강렬한 금색 눈동자, 훤칠한 키에 늠름한 어깨, 돌보다도 단단해 보이는 복근…….
외모 하나만으로 이 나라의 보석이라 불리는 왕, 카릴. 그의 뺨을 칠 외모라고 그녀는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니 에르마야도 자신의 목적을 되뇌면서도 마음이 혹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녀에겐 이 공작 저에 머물러야 할 사정이 있었다.
이렇게 잘생긴 남자의 아내, 더구나 제국 권력가의 부인 자리가 아주 살짝 탐나기는 했지만…… 신께 맹세컨대 피 한 방울 정도만이다.
“그러니 방으로 돌아가.”
“여긴 이제 제 방이기도 해요. 부부 공동 침실은 없으니까요.”
그 말대로 급히 결혼한 탓에 각자의 방만 있을 뿐 부부의 침실은 없었다.
디트리히는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같은 침실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대와 같은 침대를 쓸 생각이 없어. 그러니 방으로 돌아가도록. 지금부터 할 일이 태산이니까.”
남자는 대화하기 싫은지 아예 등을 돌렸다. 쫓아내기 위해서 댄 이유였지만 그는 진심으로 바빠질 예정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돌아가셨기 때문에 저택 내부 공사까지 모조리 공작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이제는 디트리히의 차지였다.
에르마야는 괜히 심통이 났다. 그녀에게 저택 관리를 맡기지 않는 건 그녀를 공작 부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래 봤자 유예 기간은 한 달이나 남았으니까.’
여차하면 공녀에게 정체를 폭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거나 숨겨 둔 비장의 카드를 꺼내면 될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가장 궁금한 게 있었다.
에르마야가 커프스단추를 잠그는 디트리히를 똑바로 직시했다.
“어째서 공녀에게 저주에 풀린 걸 비밀에 부치신 거죠?”
화목한 사이라 여겼는데 외부인이 모르는 무언가 있는 건가?
어느새 말끔한 복장으로 차려입은 그가 에르마야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황금빛 금안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건…….”
똑똑. 눈치도 없이 노크 소리가 두 사람을 갈랐다.
문을 열고 재킷을 입은 스무 살 남짓의 남자가 들어왔다. 오른쪽에 난 덧니에 얇은 눈썹, 흰자위가 많이 보이는 동공은 좀 까불거리는 인상이었다.
복도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에르마야 영애는 나가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 그녀는 이 공작 저의 안주인인데도. 디트리히는 그녀에 대해 영애라는 호칭을 고집했다.
나가라고 턱짓하는 게 꼭 쓸모없는 물건을 치워 버리는 것 같아 못마땅했지만 일단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에르마야는 엉망인 기분을 추스르며 나갔다.
“부디 편안한 밤 보내십시오.”
이제 방 안엔 디트리히와 남자만 남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로 싸늘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어느새 라펠트 조끼까지 갖추어 입은 디트리히는 완벽한 공작의 모습이었다.
가벼운 차림인데도 흘러나오는 품격. 사람을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강렬한 눈매.
남자는 꼭 긱스가 되살아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조아렸다.
“괜찮아 보이셔서 다행이십니다.”
“본론부터 이야기하지. 아까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시안나 누님을 조심하라는 게 무슨 뜻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