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시안나가 등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되돌아보니까 헤이스에게 도움받은 적이 참 많은 것 같아. 와인 창고에 매번 날 찾아와 주는 것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와 알게 된 지는 10년이 넘었다. 그녀가 이 판타지 세계에 빙의한 지도 벌써 그렇게 흘렀다.
처음엔 참 황당했다.
소설을 읽는 도중, 어느새 정신을 차리니 방금 읽었던 소설 속 세계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빠르게 적응했다. 부족한 예법은 디트리히나 헤이스에게 물었고, 승마도 생각해 보니 헤이스가 가르쳐 주었다.
‘지금도 쓰러지자마자 눈을 뜨니 헤이스가 보살펴 주고 있고…….’
그녀는 차가운 물수건 움켜쥐었다.
이 세계를 사랑하게 된 이유는 디트리히였다. 그녀는 소설 속에서 여주를 멋있게 구하면서도 한편으론 자신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디트리히에게 사랑과 연민을 가졌다.
그와 별개로 이 판타지 세계에서 어떻게 잘 적응할 수 있었느냐 하면 헤이스의 친절도 한몫할 것이다.
디트리히가 지켜 주고 싶은 아기 새 같은 존재라면 헤이스는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밤에 안전히 비를 피할 수 있는 듬직한 소나무였다.
“헤이스는 이제 내게서 떼려야 떼어 놓을 수 없는 존재야…….”
그녀가 꽁꽁 숨겼던 속내를 한 꺼풀 벗겨 냈다. 솔직한 반응에 헤이스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시안나 님…….”
헤이스의 입 안이 바싹 타들어 갔다. 무슨 의미냐고 묻고 싶다는 생각이 든 찰나, 느닷없이 시안나가 몸을 떼어 냈다.
온기가 아쉽게 떨어져 나갔다.
“……그런데 디트리히에게 가지는 감정과 헤이스에게 가지는 감정은 달라.”
헤이스가 그녀를 연민 때문에 좋아하게 되었다면 시안나는 디트리히를 만나기 전부터 좋아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에게 빠져들었기에 이상하지만 당연한 말이었다. 그래서 빙의한 첫날부터 미아처럼 헤매는 디트리히를 지켜 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디트리히가 곁에 있었고 이제 일상에서 디트리히가 없는 하루는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
눈송이처럼 살포시 쌓인 감정이 어느새 산이 되었다. 축적된 암반층처럼 그에 대한 마음이 단단하게 굳었다.
앞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시안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뒷머리를 겸연쩍게 긁었다.
“내 마음엔 이미 디트리히로 가득 찼어. 그래서 헤이스에겐…… 미안해.”
모든 걸 털어 낸 시안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동안 헤이스의 애타는 마음을 알아채지 못한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또 매몰차게 거절해 미안하기도 했다.
“……그렇습니까.”
알고 있었다. 그녀가 디트리히를 보는 시선엔 동정심만 들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제길, 디트리히 님의 저주에 풀리기 전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안 되는 건가.
그는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다, 눈가를 뭉그적 비비다 한숨을 내쉬고 정면에서 쳐다보았다. 할 말이 많은 티가 났다.
“그래. 터무니없다고 여기는 거 알아……. 그래도 결코 헤이스가 싫어서 거짓말을 지어낸 게 아니야.”
저주에 걸려 말을 더듬는 디트리헤에게 대체 어디에 반했냐고 헤이스는 분명 따져 묻고 싶을 것이다.
“아뇨. 믿습니다.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당신 말이라면 믿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가 성난 사람처럼 말을 짓씹듯 내뱉곤 여린 팔목을 쥐고 당겼다.
억센 힘에 시안나의 몸이 휘청거리더니 헤이스와 다시 한번 겹쳐졌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어찌할 바 모르던 시안나는 무심코 탄탄한 남자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뜀박질 치는 심장 덕에 손바닥 아래가 둥둥 진동했다.
귓가가 화르르 타올랐다. 이렇게 날뛰는 심장이라니.
손에 들어간 힘 또한 그녀를 무슨 일이 있어도 놓아주지 않겠다고 시위하고 있었다.
시안나는 무쇠 같은 남자의 몸을 밀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읏, 그만 놔줘. 나는 디트리히를…….”
“계약 약혼의 파기 조건, 기억나십니까?”
시안나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두 사람의 약혼은 디트리히가 파혼할 때까지 유지된다는 거였다.
그가 어깨를 와락 끌어안은 몸을 더욱 억눌렀다.
“혹시 아십니까. 저주에 풀렸어도 계속 결혼 생활을 유지하실지.”
“…….”
“그러니 저를 기꺼이 이용해 주십시오. 기쁘게 이용당하겠습니다.”
“헤이스…….”
심장 한쪽이 추가 짓누르는 듯 무거워졌다. 단칼에 그를 거절하는 게 맞는데도 그녀에게 기회를 포기하기 싫었다.
디트리히와 에르마야 사이에 아직 아이는 없었으니까.
그녀를 꼭 끌어안은 헤이스는 실크 위로 날갯죽지를 쓸어내린 뒤 어깨에 턱을 걸쳤다. 어둠 속에서 차가운 은구슬 같은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헤이스는 시안나와 그 빌어먹을 친구 따위 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두 사람이 이어지기 전까지 아직 기회가 있었다.
시안나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긱스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나를 미치게 만들었던 책은……. 내 서재 책장에 놔두었다.’
맞다. 그 책을 찾아야 하는데.
그 책에 무엇이 쓰여 있었길래 디트리히는 저주에 걸려야만 했던 걸까? 책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조리 파헤치고 싶었다.
왠지 이 세계의 근원과 그녀가 이 세계로 넘어온 연유가 그 책에 담겨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시안나가 헤이스를 밀어냈다.
“헤이스……. 잠시 나 볼 일이 있어서…….”
헤이스가 말리기도 전에 시안나는 곧장 긱스가 쓰러졌던 서재로 향했다.
***
서재의 문을 열자 녹슨 철 냄새가 그녀를 덮쳤다.
그녀의 시선이 나무 바닥에 번진 적갈색 웅덩이에게 떨어졌다. 방금 전 피를 흘린 긱스가 쏟아 낸 흔적이었다.
시안나의 상의까지 적실 정도로 양이 많았던 탓에 물걸레로 닦아도 이 모양이었다.
하아, 생각해 내지마.
시안나는 불길한 검은 웅덩이를 애써 외면하며 책장으로 향했다.
“분명 책이 서재에 있다고 했었지. 휴, 어느 세월에 이 많은 책을 다 확인하지?”
게다가 가죽 표지의 책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힌트도 없었다.
긱스에게 꼬치꼬치 캐물을걸. 하지만 그땐 워낙 패닉 상태였기에 그럴 정신머리가 없긴 했다.
시안나는 자신이 양팔을 벌린 것보다 넓고 높은 책장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해 봐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시안나는 책을 한 아름 꺼낸 뒤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책을 앞 페이지만 확인하고 덮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책상 위에 책들이 산처럼 쌓이고, 바깥으론 찌르르르 풀벌레 울음이 앉았다.
시간이 흘러, 까맣던 창밖이 더욱 짙어졌다.
“과연 오늘 내로 책을 찾을 수 있을까?”
그녀가 이번에도 꽝인 책을 탁 엎으며 성대한 한숨을 쉬었다. 보기만 해도 기억이 밀려드는 책 따위 여기에 없었다.
똑똑. 골머리를 썩이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아까 헤이스가 음식을 가져다 달라고 미셰리에게 부탁했었는데. 혹시 미셰리인가?
“들어와.”
그러나 그녀의 예상을 깨고 들이닥친 건 디트리히를 돌보는 전속 시녀 중 한 명이었다.
그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시안나 님! 여기 계셨군요. 도련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
“디트리히 님께선 스튜를 드시고 잠드셨다가 방금 막 일어나신 참입니다.”
그 소리에 시안나는 곧바로 디트리히의 방으로 달려 나갔다.
그녀가 입은 하얀색 엠파이어 드레스가 파도처럼 물결칠 정도로 체통 없이 달렸다.
디트리히의 방은 모퉁이를 돌고 중앙 계단을 지나면 금방이었다.
시안나는 디트리히의 방문 앞에서 크게 심호흡했다.
이 문을 열면 디트리히는 어떤 얼굴을 할까?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잠시만…….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녀는 디트리히가 저주에 풀리고 난 뒤 자신의 거처를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가주인 티트리히가 제정신을 찾으면 그녀가 긱스 대신 후견인 역할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 통상 귀족들은 가주가 결혼하면 남은 형제들은 출가하기도 했다.
사랑이야, 그녀의 일방통행이었다.
어쩌면 아슈토르 저택에 머무는 것 자체가 이기적인 욕심인지도 모른다.
“디트리히가 저주에 풀렸으니 떠나는 게 나을지도…….”
그녀는 디트리히의 반응을 상상하며 떨리는 손을 문고리에 올렸다.
“디트리히…… 일어났니? 아……. 에르마야…….”
항상 보던 어두운 푸른색 계열의 방이 문틈으로 비껴 보이는 와중, 에르마야가 문을 열어 주었다.
성력을 소진한 탓인지 눈 밑이 초췌했다.
불쌍하게 여길 법하건만 시안나는 그녀를 보고 차마 부인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다급하게 물었다.
“저주는 무사히 풀린 건가요?”
에르마야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탁, 문이 닫히자 문밖으로 들어오던 빛조차 바람 앞 촛불처럼 꺼졌다. 방은 금세 검은 장막이 드리운 것처럼 칠흑으로 변했다.
시안나는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촛불에 의지에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침대에 다가가자 약초의 쌉싸름한 냄새와 희미한 땀 냄새가 훅 끼쳤다.
저주를 풀 때 고통이 동반된 건지 새까만 밤 속에서 디트리히의 살짝 젖은 튜닉이 희미하게 빛났다.
창밖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는 디트리히 때문에 시안나는 까만 뒤통수만 보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심장이 광분하듯 날뛰었다.
“디트리히……. 괜찮은 거니?”
떨리는 목소리에 그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며, 멍한 얼굴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체적으로 힘이 없어 보였지만 이전 디트리히와 풍기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