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35화 (35/70)

[35]

“아니, 공작님은 내가 찌른 게 아니라……!”

잽싸게 움직이던 입이 멈추었다.

디트리히의 저주를 건 긱스, 서재에 보관된 책.

오늘 하루 동안 알게 된 진실이 탈력감이 되어 파도처럼 그녀를 덮쳤다. 그녀의 여린 몸은 피로를 감당하지 못했다.

“내가 죽인 게 아니…….”

뭐라고 해명해야 하는데…….

어깨가 몹시 무거웠다. 그 말을 끝으로 시안나는 전원이 꺼진 기계처럼 털썩 쓰러졌다.

***

하얀빛 장막이 젖혀지고, 지끈거리는 통증에 두개골이 박살 날 것만 같았다.

시안나는 이맛살을 구기며 눈꺼풀을 깜빡였다.

그녀의 방 천장은 깔끔한 흰색이었기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갈색 천장이 사뭇 낯설었다. 샹들리에조차 매달려 있지 않은 걸 보니 최초로 쓰러진 긱스의 집무실은 아닌 모양이다.

누군가 자신을 이곳으로 옮겨 준 건가.

“으윽……. 무슨 일이 있던 거지…….”

그녀가 신음을 흘리며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이마에 올려져 있던 물수건이 이불 겉면에 툭 떨어졌다.

그녀는 촉촉한 수건으로 이마를 누르며 기억이 점멸하기 전을 돌이켜보았다.

디트리히의 저주, 긱스의 죽음 등……. 여러 가지 일이 하나둘씩 수면으로 떠올랐다.

다시금 두통이 몰려드는데 문이 드륵, 열렸다.

헤이스가 대야와 주전자가 올려진 트레이를 들고 입장했다.

“깨어나셨습니까. 아, 무리해서 침대에 내려오려 하지 마시고 쉬십시오.”

그는 잽싸게 침대에 다가가 물이 든 컵을 건넸다.

마침 목이 말랐다. 등을 곧추세운 그녀는 컵을 쭉 들이켠 후 젖은 입가를 쓱쓱 닦았다.

맑은 물 덕에 정신이 돌아오자 그제야 방에 걸린 장식용 검을 발견했다. 이곳은 헤이스의 방이었다.

“시장하진 않으십니까? 아까 미셰리에게 간단한 음식을 내어 오라고 말했으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헤이스의 걱정 가득한 낯이 망막에 맺혔다. 아픈 곳이 없는지 열심히 안색을 살피는 모습에 가슴이 시큰해졌다.

“헤이스는 왜 안 물어? 어째서 긱스 공작님께서 돌아가셨는지, 그와 같이 있던 내 손에 왜 피가 묻어 있는지…….”

“안정이 먼저입니다. 외상은 없으셨지만 속이 불편하시거나 어지럽다거나 하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다 먹은 물컵을 받아 들고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 두었다.

몸이 약해져서일까. 섬세한 말에 울컥 눈물샘이 터졌다. 그러다 석상처럼 굳어 있던 디트리히에게까지 생각이 미쳤다.

시안나가 펄쩍 뛰며 다급하게 물었다.

“아, 디트리히는 어떻게 되었어? 디트리히는…… 공작님이 쓰러진 거 봤잖아.”

지진이 난 듯 흔들리는 금빛 동공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의 손에 묻은 피를 보고 불필요한 오해를 산 게 아닐까 몹시 불안해졌다.

헤이스는 시안나의 파르르 떨리는 턱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디트리히 님께서도 충격이 크셨는지, 시안나 님이 기절하시고 바로 쓰러지셨습니다. 지금은 저주를 푸는 의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뭐?”

“긱스 님께서 돌아가셨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긱스 님께서 디트리히 님께 저주를 거셨으니 말입니다.”

시안나의 눈이 벼락을 맞은 것 크게 뜨였다.

“헤이스는 전부 알고 있었어? 대체 어디까지?”

“긱스 님께서 전대 신탁 때문에 저주에 걸린 것, 저주를 풀기 위해 영지민들을 죽였던 것, 전부입니다.”

시안나는 그제야 헤이스가 일개 디트리히의 호위 기사 임에도 집사장만큼이나 공작가를 꿰뚫었던 까닭을 깨달았다. 긱스가 몰래 공작 저에 들어온 날, 제복에서 떨어진 피를 아무렇지 않게 닦았던 이유 또한.

긱스는 자신이 디트리히의 저주를 풀기 위해 죽어야 하는 운명임을 알았다. 그러니 자신의 뒤를 이어 디트리히의 안전을 책임질 사람을 원했으리라. 그녀도 그의 사후에 장기 말 중 하나였고.

헤이스는 그래서 공작이 죽었는데도 크게 동요치 않는 거구나.

헤이스가 그녀에게 90도로 허리를 꺾었다. 그는 어안 벙벙해하는 시안나를 향해 사과했다.

“저는 긱스 공작님께서 시안나 님을 이용해 목숨을 끊으려던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말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헤이스는 긱스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모양이었다. 긱스의 깊은 속내까지 알고 있다니.

그렇다고 해서 헤이스가 공범이라는 건 지나친 확대 해석 같았다.

시안나는 자책하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헤이스의 잘못이 아니니까. 그보다, 헤이스는 공작님께서 흑마법사라는 것도 알고 있었던 거지?”

“네. 카릴 님에게 시체를 제물로 바치던 것까지 말입니다.”

“카릴에게 바쳤다고?”

이것 또한 처음 듣는 소리였다. 긱스가 말했던 흑마법을 사용했던 주체는 어디까지 여왕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카릴이 흑마법을 썼다는 소리는 없었다.

“네. 아무래도 신탁 때문에 공작가를 견제하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여왕의 뒤를 이어 흑마법에 손을 댄 걸지도 모릅니다. 하나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요. 아버지가 자식에게 저주를 걸게 만들다니,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헤이스는 조금 소름이 돋는지 팔을 슥슥 문질렀다. 여왕의 행동에선 분노를 넘어선 악의가 진했다.

시안나도 백번 동의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헤이스가 이렇게까지 너무 빠삭하게 꿰뚫고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시안나는 턱에 손을 짚고 끙끙거리며 앓던 것을 멈추고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어째서 공작님께선 헤이스에게 그 사실을 공유했던 거야?”

긱스는 아무리 봐도 누군가에게 모든 비밀을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헤이스는 목덜미를 긁으며 겸연쩍게 말했다.

“그게……. 사실 시안나 님께 유독 관심이 갔던 이유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뭐?”

시안나의 눈꺼풀이 빠르게 닫혔다 열리길 반복했다.

갑자기 왜 자신이 튀어나온단 말인가. 게다가 내게 관심이 유독 갔다니?

그녀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헤이스의 입술이 먼저 열렸다.

“제게는 형이 있습니다.”

“어라? 발루아로 가문의 장자가 아니었어?”

보통 가신을 모시는 집안에서는 첫째를 기사 서임과 함께 가신의 저택으로 보냈다. 장차 가문을 이을 귀한 첫째를 보내 충성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보통은 장자가 오는 게 원칙이지만, 제 형은 고약한 저주에 걸렸습니다. 디트리히 님과 비슷하게, 정신이 온전치 않아지는 저주였지요.”

“그럴 수가……. 혹시 그러면, 헤이스의 가문도 신탁과 얽혀 있는 거야?”

“전혀요. 여왕은 순전히 제게 반항하는 귀족을 길들이기 위해 저주를 내리기도 합니다. 아마 후궁의 세력을 억압하려는 용도로 보입니다만, 그게 더 반발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모르는 건지. 그래서 저희 가문뿐 아니라 다른 피해자들도 많습니다.”

“그런…….”

결국 긱스는 헤이스와 같은 목적으로 왕비에 대항하기 위해 결탁한 것이리라. 별개로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선 오리무중이었다.

“저는 그렇게 형의 그늘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형에게 정신이 쏠려 저는 뒷전이었죠.”

헤이스의 주변에 마른 바람 같은 쓸쓸함이 감돌았다.

그는 자신이 갖고 싶었던 드래곤의 날개를 형상화한 검을 빼앗긴 일, 멋들어진 제복을 양보한 일 등을 잠깐 회상했다. 어차피 다 지난 일이었지만 유년 시절 그의 속은 고인 웅덩이처럼 곪아 들어갔다.

“어린 시절 기억나십니까? 시안나 님이 디트리히 님을 괴롭힌다고 여겼을 때, 유독 예민하게 반응했죠. 전 겉으로는 당신을 혐오하는 척했지만 속으로 깊이 공감했습니다. 형을 싫어하는 내 자신이 위안받는 기분이었거든요.”

다행이다. 나만 형을 싫어하는 게 아니구나.

누구나 부모님을 빼앗기면 괴롭고 힘들구나.

어린 소녀로부터 전이된 감정이 그의 심장을 적시게 만들었다.

“그러다 당신이 진정으로 디트리히 님을 위한다는 걸 깨닫고,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더군요.”

자신이 오해했다는 걸 깨달은 후, 시안나를 볼 때마다 양심이 바늘에 콕콕 찔린 듯이 아팠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더러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해에 반동으로 그녀가 전보다 더 눈에 띄었다.

게다가 자신이 형에게 느끼는 감정은 다르지만 긱스 님께 외면받는 그녀는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당신에게 끌렸습니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을 듯이 직시했다.

그 정면으로 부딪치는 곧은 눈빛에 시안나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만약 디트리히 님의 저주가 가신다면 당신의 마음을 막을 수 없겠지요.”

그의 주변을 감싸는 공기가 일순 추욱 늘어진 것 같았다. 그녀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진작에 포기한 거라 시안나는 생각했다.

심장이 누군가 손으로 꽉 움켜쥐고 흔드는 것처럼 아팠다.

서서 이야기하던 헤이스는 난데없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이불에 올려진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간절히 붙잡았다.

그가 곧은 시선을 그녀에게 던졌다.

“계약 약혼 기간만이라도 좋습니다. 제발…… 제게 기대 주십시오.”

애절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절절히 호소했다.

시안나는 당혹스러웠다.

긱스의 죽음에다 디트리히의 저주를 해제하고 헤이스의 진심까지……. 한꺼번에 많은 일이 펑펑 터졌다.

그녀가 신음을 삼킨 후 입술을 열었다.

“나는…….”

시안나는 말없이 두 팔을 벌리고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빳빳한 제복을 감싼 단단한 근육이 잡혔다.

보통 같으면 지나친 접촉이 부담스러웠을 텐데, 긱스의 죽음이나 디트리히의 저주에 대한 진실 등…… 여러 일이 복잡하게 소용돌이치자 되레 아늑하고 든든하게 느껴졌다.

위안받고 싶은 밤이었다.

긴 머리카락이 헤이스의 널찍한 가슴에 쏟아져 내리자 놀란 건 그였다. 어깨가 돌부리에 걸린 마차처럼 덜컹거렸다.

“……시안나 님?”

당혹감이 가득 서린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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