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34화 (34/70)

[34]

그의 이야기를 들을 적합한 사람은 더 많을 것이다. 가령 헤이스라든가, 집사장이라든가.

긱스는 동문서답을 했다.

“시안나, 방금 디트리히가 저주에 걸렸을 적 이야기한 걸 기억하느냐.”

그가 손에 쥔 칼을 무심하게 돌렸다. 그 모습이 사냥 준비를 개시하는 신호탄 같아 시안나는 더욱 겁에 질렸다.

“이 일을 왜 네게 털어놓는지 알려 주마.”

둔탁한 목소리와 동시에 긱스가 시안나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왔다. 구두 굽에 짓눌린 나무 바닥이 첼로 줄이 끊어지는 신경질적인 소음을 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위험한 분위기에 시안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머릿속에서 삐용삐용, 거리는 사이렌이 울리며 도망치라고 경고를 날렸다.

“이제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여왕에게 이용당했던 사실을 폭로해 봤자 카릴 왕은 분명 내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겠지. 그도 시체를 모으고 있으니까.”

긱스의 걸음걸이는 느릿하면서도 묘하게 위압적이었다. 시안나도 뒤로 한 발짝 옮겼지만 애초에 다리 길이부터 차이가 났다.

어느새 긱스는 손을 뻗으면 팔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내가 사형에 처하면 디트리히의 저주에 풀린 모습을 두 번 다신 볼 수 없겠지.”

그가 손을 휙 뻗어 레이스 소매 사이로 드러난 얇은 팔목을 한 손으로 제압했다. 정규 기사 수업을 받은 그가 그녀를 제압하는 건 숨 쉬는 것만큼 손쉬웠다.

“싫, 싫어!”

그녀가 덫에 걸린 사람처럼 몸을 이리저리 틀었지만 커다란 손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윽, 소, 손목이…… 끊어질 것처럼 아파요, 공작님……. 제발!”

시안나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무슨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는 걸까. 앞선 이야기를 유추해 봤을 때 설마 디트리히의 저주를 풀기 위한 재료로써 사용되는 건 아닌가 두려웠다.

시안나의 저항에도 남자의 손에 쥔 단도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제발, 공작님. 정신 차리세요! 윽, 아흑!”

“네게는 정말 미안하구나.”

그는 안간힘을 쓰며 발을 구르는 그녀의 손에 검 손잡이를 쥐여 주었다.

‘누군가 제발 도와줘!’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시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머릿속에서 소설 속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던 일이 영화 필름처럼 재생되었다.

놀림당하는 디트리히를 구해 준 것, 디트리히에게 무슨 짓을 할 거냐고 묻는 헤이스, 디트리히를 구하려다 긱스와 디트리히, 그녀 전부 절벽에서 떨어졌던 일 등…….

그녀의 생각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미안하다.”

푸욱.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손에서 두툼한 고깃덩어리를 칼로 찌른 듯한 감각이 퍼졌다.

뜨겁고 미끌거리는 액체가 그녀의 손을 적셨다. 손톱에서부터 손목까지 미끄러져 타고 내려가는 액체가 꼭 심장처럼 둥둥 울렸다.

시안나의 턱이 덜덜 떨렸다.

“싫어…….”

소설 속 죽음을 피하기 위해 디트리히, 헤이스, 긱스, 세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녀는 운명에 맞설 수 없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입술이 새파랗게 질리는 와중, 시간이 갈수록 그녀는 의아함이 강해졌다.

분명 칼끝에서 물렁하고 소름 끼치는 감각이 선연한데도 아픔이 번지지 않은 까닭이다.

칼에 찔린 게 아니야?

그렇다면 칼끝에 물컹거리는 감각은…….

시안나는 감았던 눈꺼풀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이윽고 놀라운 광경에 그녀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어째서?”

그녀의 눈동자가 작게 비틀거렸다.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검이 박힌 긱스의 명치에 닿았다.

철 냄새가 코를 찌르고 어두운 제복에 검붉은 피가 번졌다.

깜짝 놀란 나머지 손에서 힘이 풀어졌다. 그녀의 손에 억지로 쥐어진 단도가 짤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공작님, 어째서 자신을 찌르신……. 왜…….”

긱스는 그녀를 해치는 대신 시안나의 손으로 제 배에 칼을 박아 넣은 것이었다.

시안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분명 긱스가 억지로 손에 검을 쥐여 주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녀에게 칼을 꽂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도리어 시안나가 그를 찌르게 만들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걸까.

시안나가 경악에 찬 데 반해 긱스는 되레 후련하단 표정이었다. 그가 핏물이 고인 배를 감싸 안았다.

“아까의 이야기를…… 계속, 하겠다…….”

“상처 벌어지니까 말하지 마세요! 붕대, 붕대는 어디 있어요? 아니면 약이라도.”

그녀는 집무실의 서랍을 미친 사람처럼 뒤지기 시작했다. 남자의 입에서 피가 역류하고 배에서 핏물이 후드득 쏟아졌기 때문이다.

등 뒤로 그의 이야기가 흘러들어왔다.

“어디까지 이야기, 했더라……. 그래, 여왕이 디트리히, 를 얼른 데려오라고…… 난 아이를 여왕 앞에 바쳤…… 고 여왕은 디트리히, 에게 수면 마법을 걸었, 다. 그리… 고…….”

“그만, 그만하세요!”

“난 잠든…… 디트리히를 마법진, 위에 올려, 두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 는 마법진이었지…….”

성인이 팔다리를 뻗고 누워도 몇 배나 되는 복잡한 마법진이 머릿속에 선연히 그려졌다.

“곧바, 로 여왕은 내게…… 마법, 책 하나를 건네, 주었다…….”

지금도 그 팔이 저려 올 정도로 두꺼운 책의 무게가 생생했다.

책을 펼치니 사람의 정신을 망가뜨리는 흑마법이 활자로 펼쳐져 있었다. 그렇다. 디트리히의 영혼을 좀 먹는 저주였다.

긱스는 한숨처럼 말했다.

“여왕의 도움으로 난 흑, 마법을…… 익혔고…… 내 손으로 직접 디트리히, 에게 저주를 걸었다.”

그때는 그리하는 게 진리라 여겼다. 그 악마적인 책 때문이었다.

그녀의 고개가 서 있는 것도 버거워 보이는 긱스에게로 돌아갔다.

연달아 예상치 못한 사실을 알게 되자 사고가 멈추었다. 뒤통수가 망치로 가격당한 듯 얼얼했다.

사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며 영지민을 납치, 살해했다고 고백했을 때부터 흑마법사가 아닐지 어림짐작했다. 며칠 전 몰래 피 묻은 제복을 태운 사실도 쐐기를 박았다.

정말로 그가 디트리히에게 저주를 건 장본인이라니. 디트리히의 저주를 풀기 위해선 저주 시전자의 심장이 필요했다. 설마 그가 자신을 찌르게 만든 이유는…….

“너무해…….”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여왕의 잔혹함은 그녀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섰다. 어떻게 아버지가 자신의 아이에게 저주를 걸게 만든단 말인가. 그리고 카릴이 지금 긱스를 데려가려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그는 긱스의 시체를 수거에 디트리히가 영영 저주에 풀릴 길을 막을 심산으로 보였다. 에르마야를 빼앗은 긱스에 대한 복수였다.

이미 긱스의 상처는 깊었다. 마지막 말이 임박했음을 깨달은 시안나는 응급 도구를 찾는 것을 멈추고 긱스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어느새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드는지 주저앉은 채였다. 시안나는 그의 앞에 다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설마 와인을 입에 대지 않으셨던 것도, 혹여 저주를 푸는 데에 문제가 생길까 봐 그러셨던 거군요. 예전에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무사했던 것도 전부 흑마법 때문이었고요,”

그땐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사실은 긱스가 마법으로 두 사람을 구한 것이었다.

“지금 당장 집사장을 부를게요.”

“아니. 디트리히, 의 저주를 풀, 기 위해선 어차피, 심장이…… 필요하다.”

“저에게 디트리히 부탁하셨다고 해도, 긱스 공작님은 디트리히에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예요. 그러니까…….”

끝이 다가오기 때문일까, 긱스에게 야속한 감정이 속출하면서도 심장이 무너져 내렸다.

자신에게 쌀쌀맞게 대했던 태도, 디트리히를 기어코 성녀와 결혼시켰던 것, 미운 감정 모두 추억처럼 가슴 한편에 아롱아롱 매달렸다.

그가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말이라도 고맙…… 구나……. 네게 이 말, 만큼은 해야겠다…….”

그녀가 무릎을 쪼그려 앉자 새빨간 피로 뒤덮인 손이 그녀의 옷깃을 동아줄처럼 부여잡았다.

“나를 미치게, 만들었던 책은…… 서재에 있다. 또…….”

더 이상 그에게 삶의 미련이 없었다. 아이에게 지옥을 선사해 주었다는 죄책감에 살아 있는 건 형벌 그 자체였다.

“네가 디트리히…… 를 끝까지 봐주었, 으면 좋겠…… 구나…….”

긱스가 그녀에게 칼을 쥐여 준 건 죄책감을 심어 주기 위함이었다. 남자는 무어라 말도 못 하게 흙빛인 안색으로 말을 이었다.

“난 디트리히에…… 대한 네 애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않게 막으려, 했, 지만…… 실패였다.”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모질게 대했다.

억울한 소녀의 뺨을 때린 것, 로이스네카 백작과 반란 모의를 한 것, 시안나의 마음을 알고서도 일부러 에르마야와 디트리히를 결혼시킨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이제 그만 말씀하세요…….”

“네게 미안, 하, 다…….”

긱스의 눈에 한 여성이 아른거렸다. 이제 당신 곁으로…….

다행히 마지막엔 여자의 이름이 기억났다.

피가 역류했다. 나무 바닥 위로 가래 같은 핏물이 철퍽 떨어졌다.

긱스의 고개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푹 꺼졌다. 들숨 날숨을 내뱉을 때마다 움직이는 어깨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몸이 제자리에서 주저앉았다.

“흐…… 어…….”

시안나는 질린 나머지 숨을 헉헉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었던 공작이 싸늘한 주검으로 변했다.

시체를 처음 본 충격에 과호흡이 들이닥쳤다.

“으, 아악!”

시안나와 긱스의 이야기가 길어지자 밖에선 시종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이 들리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시안나 님! 공작 님! 괜찮으십……!”

그녀가 등을 돌렸다. 디트리히와 헤이스, 놀란 시종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디트리히…….”

디트리히의 시선이 그녀의 피로 얼룩진 손에 닿았다.

“아, 아버지……!”

충격을 받은 디트리히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 뒤에 헤이스와 시종도 마찬가지 얼굴이었다. 칼에 맞아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 같던 긱스의 거대한 몸이 쓰러져 있는 광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듯했다.

시안나는 조금 의아함을 느끼다 손에 묻은 피를 깨달았다.

바닥에 떨어진 단도와 피 묻은 그녀의 손. 그녀가 긱스를 살해했다고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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