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적장의 목을 손쉽게 베어 내는 전장의 악마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그의 음성이 떨렸다.
어떻게든 명을 거둘 수만 있다면 그는 더한 지시도 행할 터였다.
‘다른 사람들이 꺼려 하는 타 왕국과의 전쟁에서 용맹하게 앞장서는 이는 공작뿐이지. 나도 지금 이 일을 참 안타깝게 생각해.’
긱스 공작이 관리하는 병사들은 우수해서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명령대로 움직였다.
그녀도 그의 능력을 높이 사던 차였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왕좌의 턱걸이에 놓인 가죽 책을 들었다. 그녀는 소중한 비밀을 알려 준다는 듯 책을 펼쳤다.
‘긱스 경, 그대에게 이걸 보여 주고 싶군.’
긱스는 얼떨떨하게 다가갔다.
한걸음 남짓한 거리까지 가까워졌을 때, 여왕이 베개를 누르듯 커다란 책을 그의 안면에 눌렀다.
그 광경은 긱스가 꼭 책에 잡아먹히는 것 같았다.
‘윽! 컥, 윽!’
그런 와중에 책 속의 글자가 읽혔다. 글은 빼곡하고 많았다. 그 순간이었다.
팟!
그는 긴 꿈을 꾸었다. 머릿속에서 어떤 기억인지 꿈인지 모를 것들이 급류처럼 흘러들어와 홍수를 일으켰다.
기억은 세상이 뒤집히는 감각과 동시에 무섭게 머리를 잠식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붉은 융단 위에 쓰러져 있던 그가 깨어났다.
그런데 그의 기색은 디트리히를 죽일 수 없다고 절규하던 방금 전과 사뭇 달랐다. 어딘가 영혼이 텅 빈 사람 같았다.
무언가에 시달린 듯 초췌한 안색의 그가 여왕에게 부탁했다.
‘이 책을 제게 빌려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
긱스는 책을 소중히 품에 가지고 귀환했다. 그 후 집무실에 틀어박혀 끼니도 거른 채 책을 읽었다.
책에 대해서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사악하고 무서운 힘이 도사리는 이것엔 굉장한 위력이 있었다. 읽는 순간 그에게 흘러들어온 어떤 기억은 자신을 말을 따르라고 긱스를 몰아붙였다.
결국 새벽에 동이 터서야 완독했고 그는 책에 굴복당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다음 날. 운명의 장난처럼 긱스는 제 발로 다시 여왕을 알현했다. 진리를 본 듯한 긱스의 눈동자에 여왕이 붉은 입술을 씩 올렸다.
‘이제 공작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알겠지?’
긱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디트리히에게 저주를 걸어 생각을 온전치 못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랬다. 그는 디트리히를 망가뜨려야 했다.
그는 그제야 왜 여왕이 디트리히에게 저주를 걸라고 명했는지 이해가 갔다.
잘못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대로 올바르게 고쳐야 했다.
‘그래. 그러니 그대는 나를 도와 올바른 길을 행해야 하네.’
‘분부대로 수행하겠습니다.’
처음 여왕이 내린 명령은 제물을 구해 오는 것이었다.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상관없는 인간의 시체.
시체를 원하는 경우는 그가 알기로 단 두 가지 경우뿐이었다. 첫 번째 가능성은 식인이었고, 두 번째는 흑마법이었다.
설마 왕국의 왕비라는 사람이 그 꺼림칙한 마법을 다루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사악한 책을 구한 것을 보고 어둠에 손을 뻗었으리라는 건 대강 짐작하고 있기도 했다.
긱스는 그저 묵묵히 시체를 바쳤다. 그리고 제물이 충분히 갖추어졌을 때, 마지막엔 디트리히를 여왕의 앞으로 데려가기까지 했다.
새까만 지하층. 한쪽 면에 해골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음산한 지하 감옥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어두운 철 냄새가 진동하고 멀리서 죽어 가는 죄수들의 신음이 흘러나오는 곳.
‘아…… 바?’
그런 곳에 제 새끼를 보내는 게 껄끄러웠지만 그래도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아이는 그것도 모른 채 아비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왕은 디트리히에게 수면 마법을 걸어 잠재운 뒤 이상한 마법진 위에 올려놓았다.
“어떻게 자기 자식을 그렇게……. 책에 흑마법이라도 걸려 있던 건가요?”
잠자코 듣고 있던 시안나가 물었다. 그녀로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대체 그 책이 뭐라고 고작 읽은 것만으로 자식을 무자비한 흑마법에 걸리게 만든단 말인가?
긱스는 담담히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게 디트리히는 저주에 걸렸다. 그날 이후로 아내는 눈에 띄게 건강이 악화되었다.”
낮인데도 광택이 없는 커튼이 꼼꼼히 처져 있는 방은 밤처럼 어둑했다. 그나마 허술하게 매인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 한줄기가 여자의 얼굴 위로 선을 그었다. 긱스는 겨우 아내의 안색을 살필 수 있었다.
근처로 다가가자 쓰라린 약 냄새가 진동했다. 그녀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작님. 디트리히가 이상해요. 이가 다 빠진 사람처럼 발음도 제대로 못 하고…… 가르쳐 줘도 자꾸 까먹고…… 이상한 말만…….’
‘…….’
‘디트리히가 왕성에 들어간 그날부터였어요.’
여자가 죄인처럼 가만히 서 있는 긱스의 망토를 부여잡았다. 그녀가 원망을 쏟아 냈다.
‘가정 교사인 시리드 부인이 그러더군요. 교육을 전혀 따라가지 못한다고. 무슨 사고라도 당한 게 아니냐고.’
울먹임이 바람 앞에 촛불처럼 떨렸다.
그때, 미처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디트리히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아이는 아장아장 걸어와 여자가 누워 있는 침대에 다가왔다.
‘어마, 어마, 어, 마.’
발음이 뭉개질 때마다 여자의 가슴이 미어졌다.
한창 말하길 좋아하는 수다스러운 여덟 살짜리 아이가 이젠 어머니도 제대로 부르지 못한다.
불행이 그녀의 면전에서 씩, 이를 드러낸 것만 같았다. 그녀가 몸을 수그리고 제 양팔을 부여잡았다.
긱스는 그런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디트리히는 저주에 걸려야 해. 그래야만 해.’
책을 공작 저에 가지고 왔을 때 아내에게도 보여 주는 거였는데.
긱스는 뒤늦은 후회를 삼켰다. 그의 변명에 여자의 고개가 들리고 긱스에게 허망한 눈길을 보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야. 당신도 그 책을 봤어야 했는데. 모든 걸 원래대로 돌리기 위한 책이거든. 당신도 읽으면 날 이해해 주겠지.’
그는 당장 책을 찾으러 등을 돌리려 했다. 여자가 원망스럽게 그를 때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당신……. 자기 애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여자는 긱스의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그래 봤자 여자의 힘이었다.
긱스가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를 안타까워하며 가만히 맞고만 있자 그녀는 더욱 미친 사람처럼 악을 썼다.
‘난 당신에게 적응하려고 했어! 근데 당신은 제게 관심을 주지 않았고 난 이 애한테 매달릴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당신은 그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던 거지.’
그는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사랑하지 않더라도, 아이는 사랑해 주길 바랐어. 그랬는데…… 으흑…….’
흐느낌은 곧이어 울음소리로 변했다. 여자는 그 가느다란 팔로 긱스를 때렸다. 끔찍이 사랑하는 자식이 어마, 거리며 말려도 악령에 씐 사람처럼 악다구니를 썼다.
그녀는 울다 지쳐 버렸다. 갈라진 입술 사이에서 모래같이 메마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후회스러워. 당신과 결혼한 게…….’
그 후로 여자는 긱스에게 저주에 말을 퍼붓다 혼절했다. 여자가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엉마…….’
아이가 제 어미를 흔들어 깨웠다. 아이의 어머니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의 숨이 끊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긱스는 여자에게 괜찮냐고 소리치려 했다. 그런데…….
‘……!’
그는 입만 벙긋거릴 수밖에 없었다.
여자의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
여자의 장례는 조용히 치러졌다. 갑작스럽게 아이가 이상해진 충격 때문에 정신적으로 몰려 있었다는 증언이 속속 나타나자 사람들은 죽음을 십분 이해했다.
하늘이 그녀처럼 억수같이 울었다. 긱스는 차가운 비를 묵묵히 맞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녀의 묫자리 앞에 서 있었을 때 아이가 손가락을 잡았던 기억, 긱스가 디트리히의 이름을 몰라 당황해하자 쓴웃음 지었던 일 등……. 모든 일이 생생히 스쳐 지나갔다.
그저 웃기만 하던 여성……. 그 뒤를 잇따르는 저주의 말들…….
‘당신이 불행하길 빌어요! 내게 마음 준 적 없는 당신이 밉다고요!’
사람은 어째서 잃고 나서야 소중한 것을 깨닫는 것일까. 긱스는 아이를 볼 때마다 죄책감에 압사당하는 것 같았다.
긱스는 묘 앞에서 제 손을 꼭 잡고 있는 아이의 옆모습을 보았다. 보름달처럼 환한 눈동자. 여자의 금안과 겹쳐지며 그를 원망스레 노려보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여자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책에 미쳤던 지난 일들이 후회스러웠다.
차라리 시간이라도 되돌릴 수 있다면…….
그가 비 오는 하늘을 허무하게 올려다보았다. 그때, 한 가지 가능성이 뇌리를 스쳤다.
‘잠시만……. 방법이 있잖아.’
그의 머릿속을 악마 같은 발상이 삽시간에 지배했다. 그 이후로 그는 잔혹한 영주가 되었다.
그는 세금을 빼돌렸다며 영지민에게 잘못된 죄목을 지워 저택으로 불러들여 살해했다.
곤장을 맞는 형을 꼬투리 잡으며 지하 감옥으로 부른 적도 있었다. 개중 몇몇은 빼돌려 디트리히의 저주를 풀 실험을 위해 사용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렇게 한 가지 가능성에 매달리면서도 여왕과는 척을 지게 되었다. 아내를 죽게 만든 원흉이기도 했고, 종종 디트리히의 저주를 풀어 주겠다며 시체를 바치라고 명령하는 꼴도 역겨웠다.
여왕은 어째서인지 성녀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차라리 자신의 원수인 여왕의 손에 성녀가 떨어질 바에 성력을 이용하자.
그런 생각으로 긱스는 왕국보다 먼저 선수를 쳐 성녀를 공작 저에 데리고 왔다.
그리고 카릴은 주인을 문 개를 처단하려고 하고 있었다. 바로 지금.
***
긴 이야기가 끝났다. 두 사람 사이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가 뒤에서 여왕과 손을 잡고 있었다니. 게다가 왕국이 성녀를 노리기까지.
처음 안 사실에 머리가 복잡했다.
그때 긱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희멀건 안광이 어둠 속에서 번들거리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긱스는 단도를 쥔 채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삐걱. 삐걱. 그가 두 발자국만 앞으로 나아가면 시안나에게 닿을 거리였다.
시안나는 그를 피하면서도 여러 의문을 되새김질했다.
어째서 디트리히가 왕국을 멸망시키는 존재라는 걸까? 그 책의 정체는 뭘까?
그런 와중 가장 궁금한 것은…….
그녀가 마른침을 삼킨 후 질문을 던졌다.
“이 이야기를 제게 하시는 의도가 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