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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32화 (32/70)

[32]

“이미 공작이 영지민을 마법의 재료로 사용했다는 목격자도 존재하오.”

“그, 그래도!”

그때까지 잠자코 듣고 있던 긱스가 감았던 눈을 팟, 떴다.

힘이 들어간 눈초리에 기백에서 눌린 병사가 주춤 물러섰다. 긱스에게선 눈빛만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긱스는 양피지를 둘둘 말아 접고서는 나직하게 말했다.

“어찌 위대하신 왕의 명을 거역할까? 다만 갑작스럽게 왕성에 소환하는 것도 당황스럽군. 병사를 이끌고 가는 것도 안 될 테지.”

당연한 말이었다. 군사를 데리고 가 성도에서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곤란했다.

긱스는 조금 고민하는 듯 턱을 쓸어내린 후 그들에게 일렀다.

“내게 조금 시간을 주겠나. 이른 시간이니 해가 지기 전까지 결론을 내리겠다.”

병사의 은빛 투구 아래 눈동자에서 불티가 튀었다.

“감히 왕의 명에 불복종하는 것이오?”

“너무 갑작스러우니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지. 왕께서도 그 정도 아량은 베풀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거부하면 더없이 속 좁은 왕이라고 비꼬는 뜻이었다. 병사는 주춤했다.

아무리 왕명이라지만 긱스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왕국의 2인자였다. 개국공신 가문이라는 자부심도 있었고 항상 전쟁 때마다 가장 많은 병사를 척출하는 것도 공작가가 아니던가.

“……반드시 약속하시오. 오늘 중으로 반드시 자진해서 성으로 오시겠다는 것을.”

“가문의 이름을 걸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왕성에 들리겠다.”

그가 아슈토르의 명예를 저울에 올려놓았다.

병사는 조금 한시름 놓은 기색으로 가타부타 없이 말에 올라탔다. 명실상부한 왕국 최고의 공작이 저리 떡 버티는데 어찌할 재간이 없었다.

“출발해!”

다그닥, 다그닥. 여러 개의 말발굽 소리와 함께 사막처럼 먼지바람이 생겨났다. 병사들은 곧 남자의 뒤를 따라 성문 밖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시안나는 고개를 돌려 긱스를 비스듬한 시선으로 관찰했다. 그는 바위처럼 딱딱하면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낯이었다.

‘설마 진짜로, 긱스가 농민들을 납치한 걸까?’

보통 억울한 누명에 쓰이면 길길이 날뛰지 않는가. 당장 왕성에 쳐들어가 불명예를 씻으면 될 일이고 더 나아가 왕에게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날이 언젠가 올 줄 알았다는 듯 차분하고 분노 한 점 없었다. 불길한 징조였다.

긱스가 대뜸 그녀를 향해 뒤돌아보았다.

“시안나, 네게 할 말이 있다.”

“저, 저요?”

시안나가 화들짝 놀라며 스스로를 가리켰다. 긱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 저를 영영 떠날 수도 있는 중대한 사항 앞에서 하필 집사장도, 헤이스도 아닌 자신이라니.

시안나는 그의 뜻을 유추할 수 없었다.

“궁금한 게 많을 테지. 네게 다 알려 주겠다.”

그가 현관문을 열었다. 아슈토르가의 하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복도로 들어가는 시안나와 긱스에게 따라붙었다.

저 병사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이냐고 묻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그따위 질문을 할 수 있는 간 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집무실에 도착했다. 밤이 아닌데도 창문에 커튼이 모조리 처져 있어 어둡고 음침했다.

긱스는 제가 매일 드나드는 곳이라 그런지 모서리에 부딪치지도 않고 책장을 지나 장식용 검이 걸려 있는 벽에 다가갔다. 시안나는 긱스가 앉으라는 말도 없어 따라가다 방 한가운데서 멀뚱히 섰다.

그가 벽에 고정되어 있는 검을 빼내 들었다.

단도가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날카롭게 빛났다. 분명 장식용이라는 걸 아는데도 검 끝을 보는 순간 손끝이 시려 왔다.

“시안나, 네가 이 집에 온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구나.”

“네.”

“그간 오랫동안 지냈는데도 네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들이 참 많은 것 같군. 그래……. 가령 어째서 디트리히가 그렇게 되었는지…….”

디트리히의 저주. 소설에서도 디트리히가 어떤 경위로 저주에 걸리게 되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디트리히의 적인 여왕과 카릴이 그 배후라는 것만 어림짐작케 할 뿐.

그는 단도를 손에 쥔 채 서류가 어지러이 널려 있는 책상의 의자를 빼내 앉았다. 시안나도 근처로 다가갔다.

그가 단도를 손에 놓고선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깍지를 끼었다.

“네게 들려주겠다. 디트리히가 저주에 걸렸을 적을.”

그의 눈동자가 옛 기억을 회상하듯 깊어졌다.

***

긱스는 그저 그런 백작가의 장자였다. 그의 가문은 너른 토지를 지니지도, 상업적으로 수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평범한 백작가의 장자로 성장했다. 그러던 와중, 그의 인생을 뒤바꾼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전쟁터에서 가신으로서 따르던 선대 아슈토르 공작을 긱스의 아버지가 구해 낸 일이었다.

바다를 놓고 치르는 전투에서 공작은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생사에 기로에 선 그때, 긱스의 아버지는 대피하는 공작 대신 시선을 끌어 그의 목숨을 구해 냈다.

결국 공작은 무사히 영지로 귀환했고, 긱스의 아버지는 전사했다. 그의 어머니가 마침 긱스를 가진 채였다.

공작은 자신을 살려 주고 희생까지 하게 된 백작에게 은혜를 갚기로 결심해 가문끼리의 태중 약혼을 약속한다. 그 결과가 바로 긱스와 공작 딸의 결혼이었다.

아름다운 미담은 아버지 대에서는 더없이 훈훈하였으나 긱스 자신에겐 아니었다.

아버지를 잃은 대가가 공녀와의 결혼이라면,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혼란스러웠지만 결혼식 날짜는 성큼 다가왔다.

그는 제 아버지의 목숨과 맞바꾼 여자를 증오했으며 한편으로는 무심하게 대했다.

아이는 의무였다. 시간이 흘러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 우렁차게 우는 사내였다.

산모가 부드러운 수건으로 감싼 갓 태어난 아이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옳지, 옳지, 하면서 손으로 꾹 누르면 터질 것 같은 아이의 탯줄을 자르고 정리하는 걸 긱스가 힐끔 시선을 던졌다.

사람이라기보다 꼭 개구리 같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얼굴에 달라붙어 있어 떼어 줄 때까지도 동물처럼만 느껴졌다.

저게 사람 새끼라고 느낀 건 영지 전에서 별 탈 없이 귀환했을 때였다.

‘아, 바, 바바, 바.’

아장아장 걸어온 아이가 피로 더럽혀진 자신의 망토 자락을 손에 쥐었다.

뽀송뽀송한 검은 머리카락, 유리구슬처럼 커다란 눈, 이젠 제법 사람다웠다. 그제야 자기가 만든 생명체라는 걸 실감했다.

그때, 멀리서 여자가 조심스레 다가오더니 아이를 들어 올리고 제 어깨에 기대게 만들었다.

아내였다. 그녀는 영문 모를 사과를 읊조렸다.

‘죄송해요…….’

‘아니…….’

아이를 낳은 이후로 여자와 몸을 섞은 적은 없었다. 아이를 만드는 건 의무였다. 또한 그 의무를 다했으니 더 이상 여자와 살을 맞부딪칠 이유 따위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죄송할 게 뭐 있나.

여자는 그의 아내였으며, 제 아이가 고작 옷을 움켜쥔 것을 가지고 송구스럽다는 듯 머리를 조아릴 필요 따위 없었다.

그러다 눈치를 보던 여자는 슬그머니 아이를 긱스의 앞에 내밀었다.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안아…… 보실래요?’

그제야 긱스는 자신이 한 번도 아이를 껴안은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충격적이고 경악스러운 기분에 휩싸였다.

긱스는 이 작은 짐승이 혹여 넘어져 땅에 머리가 깨지기라도 할까 얼른 받아 들었다.

‘아바, 아바!’

호박색 눈동자를 마주하니 심장이 꿀렁거렸다. 조약돌처럼 작은 손으로 긱스의 두툼한 손가락을 한 손으로 쥘 때면 더욱 기분이 이상했다.

순간 이 짐승 새끼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졌다. 하지만 긱스의 입술은 열리다가 닫히기만을 반복했다.

‘아이, 이름이 뭐였지?’

아버지가 아이의 이름을 모른다니 이렇게 바보 같을 수가. 감기라도 걸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마에 열이 올랐다.

아이의 근처에 있던 여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디트리히예요.’

‘디트리히…….’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연신 디트리히라는 네 글자를 혀 위에서 굴렸다. 제법 힘이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이름이었다.

부를수록 심장이 뜨거운 물을 부은 것처럼 형용할 수 없는 기분……. 난생처음 느껴 보는 감정을 음미하며 긱스가 아이를 조심스레 안았다.

단란한 부자의 모습을 보고 여자가 웃었던 것 같기도 했다.

가족이라고 하기엔 어색한 그들…….

지금 돌이켜 보면 가장 행복했던 시기인 것 같았다.

***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지금은 고인이 된 여왕, 노렌 시베너가 그를 왕성에 불러들였다.

여왕은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 덕에 입지가 위태로웠다. 긱스는 그저 흔들리는 여왕의 권력을 바로 잡기 위해 부른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녀의 용건은 더욱 잔혹한 것이었다.

‘지금…… 디트리히를 죽이라고 명하셨습니까.’

알현실은 장정 100명이 들어가도 메울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넓었다. 검은색 커튼이 창문을 가로막은 알현실에서 긱스가 왕좌에 앉아 있는 여왕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왕좌의 양옆으로 놓인, 샹들리에를 본뜬 촛대 위 촛불이 타다닥 타오르며 여왕의 무심한 얼굴을 그렸다.

‘내가 경에게 농을 치는 것을 보았소?’

조용한 공간에서 나지막한 음성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서려 있었다.

하나 어떤 아버지가 자신의 아이를 죽이란 명령을 수행할 수 있을까.

이제 아이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그런 어린애의 목숨을 끊게 만들라니 차라리 옆 왕국의 왕의 목을 따 오라는 명령이 쉬워 보였다.

땅에 이마를 박은 긱스는 목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어찌 그리 잔인한 명을 내리시는 겁니까? 하물며 짐승도 제 자식을 아무 이유 없이 죽이지 않습니다. 제발 어찌 된 연유인지 설명해 주십시오.’

고개를 든 긱스는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며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였다.

여왕은 무례한 눈빛을 너그럽게 넘기며 대답했다.

‘신전에서 신탁이 내려왔다. 아슈토르 공작가의 후계자가 왕국을 무너뜨린다는 저주스러운 예언이지.’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아이의 순진무구한 황금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검을 준비하고 전쟁에 나서려 외투를 챙기는 순간, 자신의 곰 같은 코트를 쥐여 준 쪼그맣고 까만 해칠링.

키가 작아 제 외투를 질질 끄는 작고 연약한 생명이 왕국을 멸망시키는 운명을 타고났다니. 질 나쁜 농담임에 틀림없었다.

‘왕국을 전복시키려는 아이를 미리 제거하는 데 이의가 있을까.’

‘제발…… 재고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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