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31화 (31/70)

[31]

시안나가 헤이스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장난치지 마! 그나저나 헤이스도 마찬가지잖아. 아까, 에르마야 양이랑 이야기 나누는 거 다 보았다고.”

저녁 식사 전, 그녀는 정원에서 느릿하게 걷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침 지나가던 미셰리와 마주쳤는데 그녀가 미주알고주알 고했다.

‘두 분 분위기가 묘하지 않아요? 최근 들어 자주 붙어 있고 밤중에 화장실을 가려고 복도를 나왔는데, 응접실에 불이 켜져 있었어요. 수상해서 슬쩍 보니 두 분이 화기애애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지 뭐예요. 쥐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않는 야심한 밤에 말이에요. 그리고 또…….’

“아……. 들켰군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녀의 회상을 헤이스의 대답이 빠르게 지웠다.

넘겨짚지 말라며 부정할 줄 알았지만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려 했다.

왜 그렇게 미꾸라지처럼 넘어가려고 해? 묘하게 심통이 났다.

시안나의 볼이 부푸는 것을 본 헤이스가 유들유들한 웃음을 지으며 나뭇잎 색 정수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다른 여자와 말을 섞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반발하시다니. 앞으로는 시안나 님만 바라보고, 시안나 님과만 말을 나누겠습니다.”

“아니거든?”

“앞으로 행동거지를 더욱이 주의하겠습니다. 그러니 시안나 님께서도 저만 받아 주십시오.”

투기라도 한다는 태도라니. 내 마음엔 디트리히뿐이라고.

별개로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하긴 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수긍한다면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텐데 미적지근한 태도는 무어란 말인가.

시안나가 뭐라 대꾸할 수 없어 끙, 하며 앓는 소리를 내고 있는데, 두 사람을 지켜보던 디트리히가 시안나의 등에 달라붙었다.

그가 그녀의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짚으며 잘생긴 얼굴을 어깨에 걸치곤 물었다.

“이제 저보다, 헤이스랑, 더 친한 것 같습니다. 질투…… 납니다.”

“응?”

“누님……. 헤이스랑 디트리히랑 누가 더…… 좋습니까?”

다 큰 어른 남자가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는 모습이 귀여웠다.

으악! 코피야, 역류하지 마!

그나저나 둘 중 한 명만 뽑으라고 하면…….

“당연히 디트리히가 훨씬 좋지.”

“아…….”

금안이 활짝 웃었다. 두 사람은 한순간 서로를 눈에 담았다.

헤이스가 보기엔 아주 배알 꼴리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심각한 기색을 갈무리하고 장난스럽게 연둣빛 곱슬머리를 돌돌 말았다.

“약혼자 앞에서 다른 남자를 선택하는 약혼녀라니. 기대하십시오. 앞으로 단단히 약혼녀 교육을 해 주겠습니다.”

약혼녀 교육이라니, 그게 뭐야?

단어만 들어도 보통 일이 아니란 느낌이 솔솔 풍겼다.

헤이스는 경악스러워하는 시안나를 즐겁게 감상하다가 팔을 들어 올렸다. 가슴 쪽 가운이 벌어지며 두툼한 가슴과 복근이 드러났다. 일부러 보여 주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다.

헤이스는 붉어진 시안나의 뺨을 보곤 입꼬리를 씩 올렸다.

시안나가 고개를 회피했을 때였다.

“꺅!”

헤이스는 다음 단계를 실행하기로 했다. 근육이 단단히 박힌 팔이 그녀의 허리를 잽싸게 낚아챘다.

“갑자기 왜 그래…….”

“하아……. 디트리히 님께서 눈물 나게 부러워서 어쩌지 못하겠습니다. 잠시 가만히 있어 주십시오.”

디트리히가 질투해야지, 헤이스가 그러면 어쩌자는 건데?

헤이스에게서 빠져나오려 얼굴이 벌게진 시안나가 허리를 뒤틀었다.

그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그녀가 허리를 뭉그적거릴수록 이질적인 느낌이 강해졌다.

원래는 의식되지 않았는데 점차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시안나의 만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헤이스의 구릿빛 귀가 불타올랐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위입니다……. 읏,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렇게 문지르지…… 제길…….”

헤이스는 가증스럽게도 그녀의 귀를 잘근 깨물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걸 단단히 혼내었다.

“읏, 그만!”

아픔 때문인지, 다른 감정 때문인지 귀가 화끈거리는 정도가 심했다.

그는 평소보다 더욱 흥분한 것 같았다. 헤이스에겐 그녀와 한 침대라는 사실이 충분히 자극적이었지만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누님…… 저도 누님이랑…….”

설상가상으로 디트리히도 달아나지 말라는 듯 그녀의 골반을 틀어쥐었다.

디트리히의 손이 허리에 올라가……. 안 돼! 더 이상 하다간……!

시안나의 속도 모른 채 디트리히는 시안나의 뺨에 제 입술을 눌렀다. 부드러움이 닿는 순간 심장이 폭죽처럼 터질 것 같았다.

콰콰쾅!

“디트리히! 똑, 똑바로…… 자야지.”

“누님께서, 헤이스만…… 보시니까…….”

디트리히는 불평하면서도 시안나의 귀와 뺨에 입술을 맞춰 댔다.

“허억, 나 과호흡 온단 말이야.”

“하아,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일부러 그러시는 겁니까?”

헤이스가 자꾸만 꼬무락거리는 시안나를 타박했다. 그러면서도 딱히 그녀의 양팔을 붙잡아 움직이는 걸 멈추게 만들진 않았다.

은근히 즐기는 모습이었다.

시안나가 발악하면 할수록 두 남자를 짠 듯이 그녀에게 더욱 엉겨 붙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과연 오늘 안에 잘 수는 있을까?

시안나는 앞뒤로 남자들에게 시달렸다.

잠 못 이룰 것 같은 밤이 지속되었다.

***

시안나가 일어난 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그녀는 양손에 매달려 있는 남자들을 반사적으로 떼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어라? 왜 내 침대가 이렇게 비좁지?

정신을 차린 시안나는 양옆에 곤히 잠들어 있는 남자들에 아연실색했다.

만약 미셰리가 이 광경을 본다면 무슨 낯으로 변할까? 아마 막장 드라마 보는 사람처럼 눈에 반짝였겠지?

시안나가 눈만 마주쳐도 남자를 홀리는 마성의 영애로 둔갑하기 전에 얼른 이들을 치워야 했다.

“응?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야?”

잘못 들은 거라 여겼지만,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하인들의 발걸음이 문밖에서 쿵쿵 울렸다.

창문 밖은 더욱 소란스러웠다. 여러 마리의 말발굽 소리, 쇠가 부딪치며 철컹거리는 소리, 군중들의 웅성거림.

항상 조용했던 공작가의 아침 풍경과 사뭇 달랐다.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시안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창문에 다가갔다. 저택 앞마당을 본 그녀의 입이 떡 벌어졌다.

“뭐야? 중앙 분수대 주변에 웬 기사들이!?”

기수가 들고 있는 태양이 그려진 왕국의 깃발이 하늘 높이 휘날렸다. 약 50명가량의 왕국의 군사들이었다.

이미 깨어난 사람들은 저택 앞에 모여 있었다. 시안나의 낯이 희게 질렸다.

이렇게 많은 병사가 모인 까닭이 궁금했다.

공작령을 넘는 데 허락은 받은 걸까? 군사가 땅을 통과하는 건 언제나 민감한 문제였다.

그때, 선두에 서 있던 우두머리로 보이는 기사가 말에서 내렸다. 그가 산이 떠나가라 외쳤다.

“긱스 후작. 당신은 왕국의 법도에 따라 왕성까지 동행해 주어야겠소. 순순히 따르시면 예의는 지켜 줄 테니 어서 나오시오! 안 그러면 처형은 물론이고, 저택은 쑥대밭이 될 것이오.”

기사 대장이 으름장을 놓았다.

처형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한가하게 구경할 때가 아니잖아?

“디트리히, 헤이스! 얼른 일어나!”

“시안나 님……? 그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무슨 일이십니까? 어라, 어째서 같은 침대에…….”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얼른 잠에서 깨! 디트리히도 얼른 일어나!”

시안나는 비몽사몽인 두 남자를 모두 깨웠다.

각자 옷을 갈아입은 후 저택을 나섰다. 현관문을 열자 강철 같은 바람이 그녀를 맞이했다. 새벽 공기는 시렸고, 많은 수의 군마 때문에 먼지바람이 일고 있었다.

2층 저택에서 내려다볼 때와 달리 1층 정면에서 마주한 병사는 철갑옷을 중무장해 위용이 어마 무시했다.

이미 병사의 외침에 긱스는 현관에 나와 있었다. 처형이라는 어마한 단어에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 낯이었다.

기사 대장은 담담한 긱스의 앞에 서더니 허리 혁대에서 돌돌 말아진 양피지를 꺼내 건넸다.

“당장, 죄인 긱스 공작을 왕도로 서둘러 데려오라는 명이오.”

긱스는 양피지를 세로로 펼쳤다. 마지막에 새빨간 왕가의 문양이 찍힌 것을 발견한 긱스는 잠시 이맛살을 찡그리곤 묵묵히 읽어 나갔다.

전부 살핀 뒤, 긱스의 목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틀림없는 왕명이오. 그러니 공작은 당장 성으로 가 주셔야겠소.”

“잠시만요!”

시안나가 긱스와 병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남주의 아버지가 끌려가는 모습을 손가락 빨며 지켜볼 순 없었다. 디트리히가 말려 달라는 듯이 음울한 눈으로 시안나의 치맛자락을 부여잡은 것도 한몫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공작님을 함부로 끌고 가려고 하시는 거죠? 처형을 당할 만한 일이라니, 증거가 있기는 한 겁니까?”

그녀의 반박에 병사는 코웃음을 쳤다.

“공작의 명예를 위해 부러 죄목은 이야기하지 않았소. 한데 정 궁금하다면 답해 드리지. 아슈토르 공작령에 몇십 년에 걸쳐 실종 사건이 빈번했다는 걸 알고 있겠지?”

시안나는 순간 피 묻은 제복을 입은 긱스가 저택에 몰래 들어오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공작이 바로 그 실종 사건의 살인범이오.”

시안나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지금 사람을 납치하고 죽여 버린 장본인이 긱스라고 말하는 거야? 남주의 아버지인 긱스?

“공작님께서 자신의 영지민을 납치한다고요? 말도 안 됩니다.”

영주에게 농사를 짓는 농민은 귀한 재산이었다. 영지전을 벌여 땅을 넓혀 봤자 곡식을 일구는 농부가 없다면 그 땅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기 때문이다. 목축업 또한 마찬가지. 그들은 영지를 일구는 귀한 자원이었다.

그런데 자기 영지의 영주민을 납치했다니?

벙찐 시안나에 병사가 비웃음을 날렸다.

“보통 같으면 헛소리라고 치부하겠지만 긱스 공작이 흑마법사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공작님께서 그럴 리가 없어요. 분명 디트리히의 저주는 성력으로밖에 치료할 수가…….”

시안나가 자신의 맹점을 발견하고 숨을 삼켰다. 디트리히의 저주를 푸는 것 외에 다른 꿍꿍이가 있으리라 상정하지 않은 것이다.

마법을 발동시키는 제물로 사람을 바치는 흑마법사는 주로 악마로 묘사되었다. 이전에 사람들이 쉬쉬하던 실종 사건이나 사고사가 사실 흑마법사의 짓으로 드러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시안나의 머릿속에 다시금 긱스가 조용히 돌아온 밤이 재생되었다.

설마, 정말로 긱스가 한 짓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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