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무언가를 태운 건가?”
부피가 커다란 물건을 태우기엔 응접실의 벽난로가 안성맞춤으로 보였다. 그래서 응접실에 들린 걸지도.
시안나는 불티가 툭툭 튀는 벽난로에 다가갔다. 그녀는 불길 속 까맣게 연소되고 있는 카라에 황금색 형이상학적인 장식이 그려진 코트를 발견했다.
“이건 공작이 즐겨 입던 코트잖아?”
어두워서 코트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방금 공작이 입고 있던 코트일 게 틀림없었다.
“피가 묻은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던 거야. 그래서 제복을 일부러 불태운 거고.”
어째서? 손으로 턱을 쓸어내리는데, 오전에 헤이스가 전해 준 소문이 떠올랐다.
‘공작령 외곽에 실종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 도망이라 여겼는데 추적하니 증발해 버렸더군요.’
설마 공작이 실종 사건의 범인이기 때문일까? 소설에서 범인은 여왕이었지만 고인이 되었으니 다른 사람이 벌인 일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공작이 실종 사건을 일으킬 동기도 충분하잖아?”
이 소설 속 세계엔 다양한 마법이 존재했다. 그중 가장 흉악한 마법이 흑마법이었다.
사람을 제물로 바쳐 보통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현실로 만들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신을 조종한다거나 생각을 읽을 수 있다거나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리는 것도 가능했다.
디트리히에게 걸린 저주도 흑마법 중 하나였다.
“만약 흑마법으로 디트리히에게 걸린 저주를 풀 수 있다면?”
평소 공작이 디트리히에게 보이는 관심과 집착은 대단했다.
“언제 한번, 디트리히에게 실수로 물을 쏟은 시녀를 그대로 내쫓아 버렸지.”
마치 그녀가 디트리히를 헤치러 온 암살자인 것처럼 성을 내며.
그의 광기 어린 눈동자가 떠오르자 오금이 저린 시안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게다가 그가 흑마법사인 이유가 얼핏 떠오를 것도 같았다. 예전에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었는데…… 그게 뭐였더라?
“아니, 그런데 소설 속 설정으론 흑마법을 치유할 수 있는 건 성력뿐이었는걸? 게다가 어차피 에르마야가 곧 저주를 풀어 줄 건데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있나? 으악! 복잡해! 그럼 다시 원점이잖아.”
생각할수록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끼익. 응접실에 나온 시안나는 한숨처럼 문을 닫았다.
비에 젖은 듯 두 어깨가 천근만근이다.
피곤한 나머지 어깨를 주무르고 있는데, 헤이스가 다가섰다.
“방 안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고맙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다른 수작을 못 부리게 얌전히 방으로 돌려보내려는 거겠지. 그냥 감시잖아.’
잠깐 두근거렸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결국 시안나는 헤이스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은 채 방에 도착했다.
베개에 머리를 누여도 흑마법사, 긱스, 실종 사건 등……. 여러 생각이 물고기처럼 파닥 튀어 올랐다.
***
그녀는 곧바로 공작의 방에 들렀다.
어젯밤 공작을 찾은 이유는 헤이스와의 약혼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긱스의 방문에 다다르자 헤이스와 맞닥뜨렸다.
어제 어색하게 헤어진 탓에 시안나는 헤이스가 불편했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껍질이 까진 시안나의 입술을 걱정스러운 낯으로 더듬었다.
“시안나 님. 잠을 못 주무신 겁니까? 입술도 하얗게 텄고, 눈 밑도 퀭하십니다.”
“그, 그러게…….”
이것도 계약 약혼의 연장선일까? 앞으로 이 정도 접촉은 별일 아닌 거야?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우왕좌왕하던 시안나는 곧 심통이 났다.
그녀가 초췌한 몰골인데 반해 헤이스는 어둠이 걷힌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어제 일도 그랬다. 헤이스는 비밀을 꽁꽁 감추는 주제에 왜 이렇게 진짜 약혼자처럼 친절하게 구는 걸까.
“혹시 몸이 안 좋으시다면 저 혼자 공작님께 이야기를 꺼내겠습니다.”
“아니야. 언젠가는 말해야 하는 일이니 지금 하겠어.”
쇳물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시안나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긱스의 근엄한 목소리가 문 너머로 날아왔다. 시안나가 문손잡이를 돌렸다.
“무슨 일이지?”
긱스는 방 안에 들어온 시안나와 헤이스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책상에 쌓인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가 책상 앞에서 숨을 고른 뒤 본론을 꺼냈다.
“공작님, 중요한 할 말이 있습니다. 갑작스럽겠지만 저, 헤이스와 약혼을 하려고 합니다.”
그 말에 서류에 눈을 떼지 않던 긱스의 고개가 들렸다. 시안나의 곁에 서 있던 헤이스가 그녀의 손을 맞잡아 왔다.
“……정말 깜짝 놀랄 일이군.”
연애의 연의 기미도 내뿜지 않던 두 남녀가 당돌하게 나란히 찾아오니 긱스로선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네 진심인가?”
그의 눈동자가 시안나를 날카롭게 관통했다.
시안나의 시선이 허공을 방황했다. 그의 직감과 나이에서 우러나오는 경험이 그녀의 내면을 들춰 본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억지로 입술에 힘을 주었다.
“물론입니다.”
“……네가 결심에 섰다면 나로선 상관없다. 너는 자유롭게 결혼할 권리가 있어.”
아슈토르 공작가에 입양 온 게 아니니 혼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그는 헤이스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다만 발루아로 가문의 생각도 궁금한데?”
“흔쾌히 승낙하셨습니다.”
당당한 대답에 깜짝 놀란 건 시안나였다.
가짜 계약 약혼인데 부모님까지 끌어들였다고?
놀란 나머지 헤이스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싱긋 눈웃음을 칠뿐이었다. 가짜 혼약을 기정사실로 만들어도 상관없어 보이는 미소였다.
‘나 때문에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다니.’
헤이스의 속을 모르는 시안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미안함이 차곡차곡 눈처럼 쌓였다.
헤이스의 막힘없는 대답에도 긱스의 찡그린 눈썹은 펴질 줄 몰랐다.
“그렇다면 곧 약혼식을 치를 건가? 결혼은?”
“일단 약혼반지만 간소하게 교환한 후 천천히 시기를 조율하려고요.”
시안나가 잽싸게 대답했다. 거짓 계약 약혼이 진실이 되면 곤란했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려무나. 그리고…… 미안하다.”
대체 무엇이 미안하다는 걸까? 집히는 게 많아 괜히 마음 한구석이 찝찝해지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되려는 찰나였다.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공작님, 일러두신 준비가 모두 끝났…….”
에르마야는 집무실에 있는 낯선 두 사람을 보더니 말을 멈추었다. 긱스는 상관없다는 듯 계속하라며 손을 올렸다.
에르마야가 긱스의 집무실 책상 앞에 섰다.
“디트리히 님을 억압하는 저주를 조사했습니다. 다행히 저주는 하나였고, 안에서 짓누르는 힘 때문에 디트리히 님께선 뭐든지 배우는 데 속도가 느리기도 하고 정확한 사고를 하지 못하는 거였습니다. 무언가 하려고 할 때마다 속에서 훼방을 놓는다면 이해가 가실까요?”
저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처음이었다. 시안나와 헤이스가 흥미롭게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일단 제 성력은 마을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지금은 가득 찼습니다. 이제 저주를 푸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재료, 나이트메어의 영혼, 라이칸드로프의 이빨이 필요합니다. 나머지 하나의 재료는…… 저주를 시전한 자의 심장입니다.”
시안나의 홍채가 팽창했다.
소설 속에서 디트리히에게 저주를 걸었던 존재는 여왕이었다.
왕은 카릴이 아닌 후궁의 아이를 사랑했다. 그래서 여왕은 흑마법의 힘으로 카릴의 편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그렇다면 왕궁에 있는 여왕의 무덤을 파헤쳐야 하는데, 분명 쉽지 않은 일일 터였다. 도대체 어떻게 죽은 여왕의 심장을 손쉽게 얻을 수 있을까?
모두의 시선이 긱스에게 집중되자 낯빛이 다소 가라앉은 그가 입을 뗐다.
“그건 몬스터 재료를 구한 뒤 맨 마지막으로 준비해야 할 듯싶군. 일단 모든 재료를 이삼일 내로 구하고 즉시 저주를 해제하는 의식을 진행하겠다.”
시안나의 얼굴이 비장해졌다.
단 며칠이면 드디어 디트리히의 저주가 풀린다. 그러면 헤이스가 공작 작위가 수여된다고 말한 것도 헛것이 아닐 것이다.
그 안에 시안나는 디트리히의 마음에 질투를 심고 결혼을 무효로 만들어야 했다.
그녀는 곧바로 계획에 착수하기로 마음먹었다.
***
헤이스가 말한 승계 이야기는 사실인 듯했다.
디트리히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냈다. 그 예로, 디트리히는 영지 주변과 공사 현장을 관리 감독하러 가는 긱스와 함께 시찰을 다니는 게 일과였다.
오늘 오후 일정은 집안의 하인들의 이름과 역할을 외우는 것이었고, 헤이스가 교육을 도맡았다.
시안나는 수업 중간에 들어가기로 했다. 유치하지만 결심한 대로 디트리히의 질투를 유발하기 위해서였다.
“누님?”
한창 헤이스와 디트리히가 수업하는 와중 문이 열렸다.
시안나가 문에서 들어오자 책상에서 지루하게 양피지를 살펴보던 디트리히가 황금을 발견한 사람처럼 눈을 빛냈다.
시안나는 콕콕 찔리는 양심을 덮어 두고 헤이스에게 눈짓을 했다. 그가 준비되었다는 듯 끄덕였다.
질투 작전의 시작이었다.
시안나는 성큼성큼 의자에 앉은 헤이스에게 다가가 곧장 그의 허벅지에 걸터앉았다. 뒤에서 헤이스의 심장이 쿵쿵 뜀박질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밀접한 접촉이었다. 조금 부끄러웠다.
갑자기 친밀하게 붙은 두 사람에 디트리히의 얼굴이 흐려졌다.
분명 질투하고 있는 게 확실…….
“흐? 누님? 헤이스는 의자가…… 아닙, 니다…….”
순진하게도 디트리히는 시안나가 헤이스의 위에 앉은 걸 보고 의자라 착각했다고 여겼다.
황당한 발언에 시안나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그런 게 아니라, 이건 연인끼리 하는 행동이야!”
“연인……?”
“응. 연인이라는 건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말하는 거야.”
진정한 뜻을 알자 디트리히의 눈동자가 서글프게 흔들렸다.
윽!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은 듯한 분위기의 미남자가 거기 있었다. 디트리히가 슬픈 목소리를 냈다.
“의자…… 가 말입니까? 그럼…… 저도 누님에게 의자를, 하겠습니다.”
디트리히가 제 허벅지를 두드렸지만 시안나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순 없어. 헤이스랑 나는 약혼했으니까 의자는 헤이스만이 할 수 있어.”
“약……혼?”
“디트리히 님께서 에르마야 님과 하신 결혼과 비슷합니다.”
영락없이 즐거운 미소를 머금은 헤이스가 시안나를 거들었다. 그는 보란 듯이 시안나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