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
시안나는 그날 밤을 꼴딱 새웠다.
“하아……. 정말 이게 잘하는 짓일까? 어쩌면 디트리히가 결혼한 것부터 꿈일지 몰라. 아니, 꿈이어야 해.”
동이 틀 때까지 깊은 한숨이 연거푸 이어졌다.
어느 순간 까무룩 시야가 점멸했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본 시안나는 눈 아래 그을음이 뺨까지 내려온 자신과 마주했다.
“어쩜, 친동생처럼 애지중지하시던 도련님께서 떠나셔서 마음이 허하신 거죠?”
침구를 갈러 온 미셰리가 잘못된 추측을 하며 따뜻한 꿀물을 건네주었다. 한 모금 마셨지만 비극적이게도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안나는 매일 하던 산책도 내팽개치고 방 안에 꼼짝없이 박혔다.
디트리히는 꼴도 보기 싫었고 헤이스를 마주쳤다간 어색해 죽을 것 같았다.
그녀가 움직인 건 점심시간이었다.
“식사 자리에서 약혼 사실을 공작님께 고해야겠어.”
비록 긱스와 시안나가 살가운 관계는 아니더라도 긱스는 그녀가 살고 있는 공작저의 가주였다. 그녀를 어렸을 적부터 돌본 보호자이기도 했다.
“어차피 나중에 깰 약혼이니까 가볍게 교제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면 되겠지.”
식당에 당도하니 에르마야가 와 있었다. 디트리히와 결혼한 그녀는 장차 공작 부인이 될 사람이었다.
“디트리히는?”
“결혼식이 고되었는지 자리에서 꿈쩍도 안 하고 있어요.”
이제 에르마야가 자신보다 디트리히를 더 잘 안다는 생각에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그렇다고 디트리히를 보러 가는 건 내키지 않았다.
순간 헤이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한 번만 봐 달라는 암묵적인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무시한 채 긱스를 기다렸다. 그런데 모두가 자리에 앉고 전채 요리가 나와서도 공작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포크로 달팽이 집을 찌르던 시안나가 의문을 표시했다.
“공작님께서는 출타하신 거야?”
옆에 대기하고 있던 헤이스가 막힘없이 대답했다.
“영지 순찰을 나가셨습니다. 밤늦게 돌아오실 예정이십니다.”
헤이스가 대답할지 몰랐던 시안나는 당황하면서도 침착하게 달팽이를 씹으려 노력했다.
그러고 보니 긱스는 밤에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았다.
“요즘 따라 부쩍 늦게 돌아오시네.”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헤이스는 무척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영지에 흉흉한 사건이 벌어져서 말입니다.”
“흉흉한 사건?”
“네. 실종 사건이 또다시 발발하고 있다더군요.”
난데없이 실종 사건이라니.
허브차를 들이켜던 시안나는 심장이 선득해졌다.
그러나 으스스한 것도 잠시, 수상한 음모의 냄새에 흥미가 당겼다.
시안나가 헤이스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좀 더 자세히 말해 줘.”
“공작령 외곽에 실종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 도망이라 여겼는데, 추적하니 증발해 버렸더군요.”
“단순히 발자취를 놓친 게 아니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만, 동시다발적으로 사람이 사라져서 비상이 걸렸습니다. 최근엔 납치, 인신 매매단을 염두에 두시던 것 같더군요.”
시안나는 목이 잠긴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건 소설 속에서 읽은 내용이잖아!
헤이스가 말한 건 소설 중반부에 나오는 일화였다.
에르마야는 실종이 일어난다는 기이한 소문을 듣는다. 성녀인 그녀는 마을에서 몰래 실종 사건을 탐색하던 도중 휘말리고 만다. 아직 저주가 풀리지 않은 디트리히가 그녀를 구출해 내고 에피소드가 막을 내렸지.
결국 흑막은 여왕이었다. 그녀가 사람을 죽여서 얻은 어둠의 힘을 강화시키기 위해 벌인 짓이었다.
“공작님께서도 단단히 벼르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거야 그렇겠지. 영지를 불쏘시개처럼 들쑤시고 납치까지 벌이는 꼴을 그대로 두다간 영지민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올 것이다.
과연 범인을 잡을 수 있을까?
소설에서 범인은 여왕이었지만 지금은 죽고 없다. 그렇다면 대체 범인은 누구인 걸까?
***
그녀는 공작이 돌아오기만을 침대에 누운 채 기다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저택 밖에서 푸르릉,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시안나는 천근만근 같은 몸을 벌떡 세웠다.
끼익.
그녀는 달이 구름 뒤에 숨어 온통 어둠에 잠긴 복도로 나왔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똑 떼어 놓은 것처럼 음산한 광경이었다.
시종인 방은 3층이었기에 2층까지 지나다니는 사람은 디트리히, 시안나, 에르마야 정도라 더욱 스산하게 느껴졌다.
‘빨리 돌아가야지.’
으슬으슬함에 팔을 문지르며 1층 계단으로 내려가는데, 마침 중앙 로비로 들어오는 긱스 공작이 멀리서 보였다.
“공자…….”
시안나는 황급히 입을 막았다. 분위기가 퍽 이상했다.
공작을 환영할 때마다 불을 밝히는 복도가 쥐 죽은 듯 어두웠다.
그를 맞이하는 시종이 코빼기도 보이지도 않았고, 공작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저택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고하는 집사도 마중하고 있지 않았다.
“왜 이렇게 몰래 들어오는 사람처럼 구는 거지. 게다가…….”
공작의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갈 줄 알았던 발걸음은 중앙 복도에서 모퉁이로 휙 꺾였다.
“저쪽은 분명 응접실 방향이지?”
사건의 냄새를 맡은 시안나는 저도 모르게 살금살금 공작의 뒤를 밟았다.
그런데 중앙 복도로 내려오니 바닥이 미끄러웠다. 그녀가 고개를 내리자 하얀 대리석 바닥에 손톱만 한 잉크 자국이 보였다.
“이 액체는 뭐지?”
자세히 들여다보려는데 삐걱,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응접실 앞에서 멈춘 공작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문고리를 돌린 것이다.
시안나는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한밤중 응접실에 무슨 볼일인 거지? 손님이 있을 리도 없는데.”
쿵. 문이 닫힌 뒤.
그녀가 허리를 수그리고 손가락으로 검은 액체가 묻은 바닥을 휙 쓸었다. 코에 가져간 순간, 손가락에 비린 향이 퍼졌다.
“……!”
놀란 시안나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간신히 틀어막았다.
검붉은 색에 비릿한 냄새는 피였다.
“대체 왜 공작님이 피를 묻히고 온 거지. ……아니, 진정해. 영지 순찰이면 그럴 수도 있잖아. 도둑을 소탕하거나 들짐승을 죽인 거겠지.”
전쟁을 지휘하는 그가 피를 흘리는 건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일지도.
“그런데…… 왜 이렇게 불길한 기분만 드는 걸까.”
시안나는 벽에 바짝 붙어 숨죽인 채 기다렸다. 공작이 들어간 응접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틈 사이로 응접실의 환한 빛이 새어 나오다 사라졌다. 공작이 복도 모퉁이에 바짝 붙은 시안나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왔다.
‘헉. 이쪽으로 오잖아?’
머리끝이 쭈뼛거렸다.
수상해 보이는 공작이 그녀를 목격한다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녀가 살며시 뒷걸음질 치는데 툭, 어른 덩치만 한 관엽 식물의 화병에 발뒤꿈치가 부딪쳤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복도에 흩어졌다.
“누구냐?”
적막한 중앙 홀은 개미만 한 소리도 날카롭게 만들었다.
불온함을 감지한 긱스가 시안나가 있는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휙, 모퉁이를 내다보았다.
긱스가 표정을 찌푸렸다.
“넌…….”
허리까지 오는 주황색 머리카락에 흰 제복을 입은 헤이스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손수건으로 바닥을 닦고 있었다. 그가 움킨 손수건에 붉은 얼룩을 발견한 긱스는 제가 피를 흘렸음을 깨달았다.
“자국을 닦고 있었습니다.”
“내가 깔끔치 못했군.”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작님께선 들어가 쉬십시오.”
“부탁하지.”
둘의 대화는 어떤 의심도 없이 술술 흘러갔다. 슬쩍 헤이스 주변을 살펴본 긱스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발소리는 느릿하게 중앙 로비에 향했고, 계단 위로 서서히 올라가더니 점차 작아졌다.
로비에 적막이 내려앉자 헤이스가 뒤를 돌았다.
“나오십시오.”
그의 말에 커다란 관엽 식물 뒤에 숨어 있던 시안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안나의 팔보다 길쭉하고 몸통보다 두꺼운 이파리는 성인 여성을 숨겨 주기에 충분히 컸다.
시안나는 웅크렸던 무릎을 피고 쭈뼛쭈뼛 헤이스에게 다가갔다.
“휴……. 고마워 헤이스. 나를 숨겨 줘서, 덕분에 살았어.”
조금 전. 꼼짝없이 공작과 대면하나 싶었는데, 헤이스가 그녀의 팔을 죽 잡아당기더니 화분 뒤로 숨겨 주었다. 시안나는 그와 약혼 관계가 된 뒤 뻘쭘해진 마음을 숨기느라 혼이 났다.
“그런데, 아까 좀 위험한 상황이었던 거지? 어째서 날 숨겨 준 거야? 발루아로 후작가는 아슈토르가를 몇 대에 걸쳐서 섬기는 충성스러운 가문이잖아.”
그가 따라야 할 사람은 시안나가 아니라 긱스였다.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걸 알아차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지만, 어둠 때문에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찌를 듯한 시선이 느껴져 살갗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시안나 님께선 제 약혼녀이지 않습니까?”
어쩐지 목소리가 그윽했다.
잠시 시안나, 헤이스 두 사람은 말이 없어졌다. 서로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는 듯했다.
아슬한 고요를 깨뜨린 건 헤이스였다.
“시안나 님께선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난 공작님을 뵈려고 했어. 그런데 공작님께서 지나가신 길에 피가 뚝뚝 흐르고 있어서, 잠시 지켜봤지.”
바닥을 살핀 그는 검은 물방울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것에 인상을 썼다.
“오늘 일은 함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대체 공작님께서 무슨 일을 벌이고 계신 거야?”
주제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자 두 사람 사이로 정적이 찾아왔다. 헤이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건 밝힐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역시 헤이스가 섬기는 사람은 긱스잖아. 진짜 약혼녀로 대해 주고 있다고 착각해 버리면 어떻게 해.
시안나는 헤이스를 밀치고 응접실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나도 마음대로 할 거야. 공작님께서 응접실에서 무엇을 하신 건지 확인해 봐야겠어.”
조금 전 공작은 피가 묻은 겉옷을 입지 않은 채 응접실에서 나왔다. 겉옷을 어디에 은폐해 놓았는지 확인해야 했다.
응접실로 향하는 시안나를 헤이스는 그저 지켜보았다.
끼익.
긴장되는지 차분히 문을 여는 소리가 바이올린처럼 날카롭게 들렸다.
시안나는 벽에 걸린 헌팅 트로피를 지나쳐 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테이블에 놔둔 보랏빛 라벤더를 지나 화려한 문양의 태피스트리, 벽난로에 툭 떨어졌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와 함께 소각장에서 날 법한 매캐한 냄새가 폐부에 스며들었다. 공기가 조금 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