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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26화 (26/70)

[26]

시안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교황도 축복을 내리고 신도 인정한 결혼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하물며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은 결혼을 깨뜨리는 걸 불명예스럽게 여겼다.

“혹시 내게 위로를 건넬 생각이라면…….”

“아닙니다. 이번에는 확실합니다.”

마지막에 헤이스는 나지막이 권유했다.

“준비가 필요합니다. 오늘 밤, 제 방을 찾아 주십시오.”

***

어수선한 공작가를 정리하니 시간은 야심한 밤을 훌쩍 넘어선 뒤였다.

자정이 지난 시각, 헤이스의 방문 앞에 선 시안나는 주변을 흘끔 둘러보았다.

늦은 밤에 헤이스의 방문에 서 있는 자신을 누군가가 보기라도 할까 봐 불안했다. 그녀는 재빨리 똑똑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십시오.”

그녀가 문을 밀었다. 늘어지는 테이프 소리와 함께 숲속에 발을 디딘 듯 흙냄새와 풀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시안나는 숲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느끼며 등잔불이 겨우 비추는 어두운 방을 걸어 들어갔다.

그녀의 시선이 여기저기를 배회하며 벽에 걸려 있는 장식용 검과 은색 갑옷을 눈에 담았다. 명백히 기사의 방이었다.

침대에 반쯤 걸터앉아 있던 헤이스가 시안나를 맞이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정이 넘었는데도 오지 않으셔서 밤을 새워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따로 의자가 없어서……. 송구스럽지만, 침대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금방 마실 걸 내어 드리겠습니다.”

헤이스는 협탁 위에 놓인 주전자를 들고 물을 따르기 시작했다.

시안나는 쭈뼛거리며 멀뚱히 침대만 바라보았다.

늦은 시간에 남자의 방에서 태평하게 침대에 엉덩이를 붙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방문을 두드리는 것조차 큰 용기가 필요했으니 말이다.

“불편하십니까?”

“아, 아니.”

속내를 읽힌 것 같아 심장이 뜨끔거렸다. 그녀는 괜히 어색해지기 싫어 헤이스가 준 컵을 받곤 침대 위에 엉덩이를 놓았다.

얼른 볼일만 마치고 돌아가야지.

물 한 모금을 마신 시안나가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결혼을 깰 수 있는 방도가 뭐야? 혹시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혼식을 취소시키려는 거야?”

이 세계에서 결혼식 때 제일 중요한 건 당사자들의 의사였다. 정략결혼이라도 길거리에서 식을 올려도 두 사람의 동의만 있다면 결혼이 성립하였다.

그런데 현재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사랑하는 감정 따위 없었다. 그래서 무효라는 걸까?

헤이스가 그건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질투 작전입니다.”

“풉!”

물을 마시던 시안나는 사레가 걸린 사람처럼 켈록켈록댔다.

생각보다 단순하면서도 질 낮은 방법이었다.

헤이스는 멍청한 표정이 된 시안나를 뒤로한 채 건조한 투로 덧붙였다.

“결혼을 파기시킬 명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황이 축복까지 내린 마당에 공작가의 명예도 걸렸으니 공작님께선 파혼을 허락해 주시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디트리히 님을 혼란에 빠뜨려 변심하게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솔직히…… 좀 더 치밀한 작전일 거라 예상했어.”

시안나는 방법이 있다며 확고하게 말했던 헤이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 놓고 겨우 질투라니. 너무 유치한 방법이지 않은가?

“이보다 더 명확한 방법은 없습니다. 디트리히 님께선 결혼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계십니다. 만약 시안나 님께서 이전과 달리 차가운 태도를 고수하신다면 도련님은 이상하게 여길 겁니다. 곧 결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공작님께 엉엉 울며 매달리겠죠.”

시안나는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반박했다.

“디트리히가 싫어한다고 해 봤자 공작님께서 밀어붙이면 헛수고하는 거잖아.”

“그 공작님께서 유독 약한 것이 디트리히 님이십니다.”

헤이스는 커다란 책장에 다가갔다. 그의 손가락이 수많은 책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는 책 속에 끼워진 빳빳한 양피지를 시안나에게 건넸다.

시안나는 협탁에 물컵을 내려놓은 뒤 A4용지 크기의 양피지를 받아 들었다. 그녀의 동공이 좌우로 움직이며 한 자 한 자 읽어 내릴 때마다 휘청거렸다.

“이건……? 계약 약혼?”

맨 위에 큼지막하게 적혀 있는 단어에 시안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문서는 서로의 계약 약혼을 맹세하는 내용과 지켜야 할 수칙이 기록되어 있었다.

“공작님께선 곧 디트리히 님께 작위를 계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확실해?”

“긱스 님으로부터 직접 확언을 들었습니다.”

정말일까? 1초 동안 고민했지만, 시기상 들어맞긴 했다. 성녀가 성력으로 디트리히의 저주를 치료한다면 남주인 그는 승승장구할 것이다.

전쟁에서 큰 성과를 낼 것이 자명했고, 그가 공작 작위를 받는 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지.

“디트리히 님께서 공작의 작위에 오르면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이니 저와 계약 약혼을 하고, 모두에게 약혼 사실을 공표해야 합니다. 혹시나 싶어 계약에 관한 서류를 준비했습니다.”

헤이스는 침대에 걸터앉은 시안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사의 맹세처럼 결연함이 엿보였지만 실상 속내는 그녀를 제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생각뿐이었다.

곧이어 그의 손이 시안나의 부드러운 손을 거칠게 붙들었다.

“부디 저와 약혼해 주십시오.”

억누를 수 없는 열망이 담긴 목소리로 그가 고백했다.

앞선 대화가 없었다면 시안나는 헤이스가 정말로 저에게 청혼한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손에 닿은 온기가 물이 펄펄 끓는 것처럼 뜨겁다고 느낀 순간, 심장이 살짝 흔들렸다.

뭣 때문에 두근거리는 거야!

디트리히의 결혼을 파기시키기 위해 약혼하자는 것뿐이잖아.

그녀는 손등을 문지르며 주책없음에 나무랐다.

게다가 헤이스도 카릴처럼 언젠간 에르마야에게 끌릴지 모르는 일이다.

“약혼이라니, 좀 갑작스러워.”

휘몰아치는 전개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시안나는 강렬한 시선을 피해 고개를 휙 돌렸다.

“이런 극단적인 일까지 벌일 필요가 있는 거야?”

약혼 공표는 질투 유발을 넘어서 너무 일을 크게 벌이는 것 아닌가.

미적지근한 태도에 헤이스가 성대한 한숨을 쏟아 냈다.

“만에 하나 디트리히 님과 에르마야 님 사이에 아이가 들어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뭐라고?”

시안나는 뒤통수에 묵직한 무언가가 후려친 것만 같았다.

디트리히가 아이를 가진다니, 생각지도 못한 가정이었다. 그도 그럴 게 저주에 걸린 디트리히가 어떻게 아이를 만들겠는가.

“하지만 저주에 풀리고 작위 계승이 이루어진다면 말이 달라집니다. 후계에 대한 압박을 받겠죠.”

헤이스는 염려스러운 목소리를 더욱 과장했다.

“아시겠습니까? 결혼까지 한 이상, 에르마야 님과 디트리히 님 사이에 아이가 생기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그러니 한시라도 계약 약혼을 계기로, 도련님의 마음을 돌려놓아야 합니다.”

타당한 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겨난다면 이미 늦은 뒤다.

디트리히가 저주에 풀리기 전까지가 마지막 기회였다.

“나는…….”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잊어먹었지만, 원작에서 시안나와 헤이스는 약혼 관계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약혼을 할 운명이었는지도.

시안나가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힘주어 끄덕였다.

“알겠어. 나 헤이스와 계약 약혼할게.”

헤이스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그녀에게 위기감을 주어 안달 나게 만드는 일은 가슴 아프면서도 희열이 넘쳤다.

그는 비열한 표정을 갈무리하고 책상 위 깃털 펜을 들어 잉크를 적셨다. 잠시 뒤, 양피지를 시안나에게 건넸다.

“계약서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살펴보시겠습니까? 꺼림칙한 조항은 수정하셔도 됩니다.”

헤이스는 언제 이런 문서를 만들 생각을 한 걸까? 설마 오래전부터 계약 약혼 문서를 작성한 건 아니겠지?

갑자기 조금 무서워졌다.

그녀는 오싹함을 떨쳐 내려 고개를 가로젓고 양피지를 살폈다.

규칙은 아래와 같았다.

1. 두 사람의 약혼은 디트리히가 파혼할 때까지 유지된다.

2. 두 사람은 합의로 계약 약혼을 해지할 수 있다.

별반 문제가 되는 조항은 없었다. 만약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더라도 헤이스는 너그럽게 문서를 파괴해 줄 것이다. 두 사람의 사이가 그렇게 딱딱하진 않으니까.

깃펜은 계약서 위로 흔쾌히 춤을 췄다.

“자, 사인 다 했어.”

헤이스는 시안나가 건네준 계약서를 소중히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행여 구겨지는 것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소중한 귀중품을 만지는 듯한 손길에 어쩐지 쑥스러워진 시안나가 달아오르는 목을 쓱 문질렀다.

헤이스도 사인을 마친 뒤 양피지를 책상 위에 두었다.

“그러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야 말…… 윽!”

갑자기 시야가 하얀 옷깃에 파묻혔다. 헤이스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품에 가둔 것이다.

시안나가 덫에 걸린 사람처럼 버둥거렸지만 단단한 팔은 더욱 엉겨 붙었다. 빠져나오는 것에만 정신이 팔린 사이, 부드러운 것이 이마를 짓눌렀다. 입술의 감촉이었다.

시안나의 얼굴빛이 더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갛게 변했다.

“읏, 헤이스! 이게 무슨 짓이야!”

“시안나 님. 이제 저희는 공식적으로 약혼 관계입니다. 앞으로는 살을 맞대는 행위에 익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헤이스는 터무니없이 여상한 태도로 응수했다.

살을 맞대는 행위라니. 야릇한 단어에 숨이 턱 막혔다.

시안나는 낑낑거리다 제풀에 지쳐 넓은 가슴팍에 털썩 기대었다.

씩, 헤이스의 입매가 올라갔다. 입술이 이마에서 눈꺼풀로 내려가고 발갛게 부푼 뺨과 귓바퀴에 차례대로 달라붙었다. 새가 모이를 쪼는 듯한 감각에 머리끝이 쭈뼛 섰다.

“흐읏…… 그, 여긴 보는 사람도 없으니까 이러지 않아도 되잖아.”

계약 약혼은 말 그대로 디트리히에게 샘을 유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안나가 단단한 가슴팍을 밀자 이번엔 순순히 물러났다. 그는 그녀가 바르작거리는 모습이 기꺼운지 들뜬 음성이었다.

“기대하십시오. 완벽하게 계약 약혼을 연기해 보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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