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25화 (25/70)

[25]

***

다음 날부터 공작가는 분주해졌다. 갑작스러운 디트리히의 결혼 때문이었다.

일주일 만에 결혼식을 올리는 건 쉽지 않았다. 무려 왕국에 제일가는 공작가의 결혼식이라 규모는 성대했으며 왕도 참석하는 자리였다.

결혼식은 신전에서 치르기로 결정이 났지만 손님 대접은 공작가에서 하기로 정해졌기에 저택을 꾸미고 최대한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게 홀을 배치해야 했다.

시녀, 하녀 구분할 것 없이 모두가 팔을 걷어붙이고 홀에 테이블이며 꽃병을 옮겼다. 저택 바깥에서도 식자재를 실은 짐마차가 성문에 끊임없이 들어왔다.

미셰리도 힘이 들었는지 시안나와 마주칠 때면 잠시 쉴 심산으로 꼭 말을 걸었다.

“갑작스럽게 평민 아가씨와 결혼이라니, 다들 놀란 눈치라니까요. 더욱 신기한 건 그 아가씨, 딱히 도련님을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 그래?”

미셰리의 눈썰미는 그녀도 알아주었기에 시안나는 에르마야의 진심이 궁금해졌다.

“그럼요. 아침에 도련님과 에르마야 양이 결혼식 드레스를 맞추러 살롱에 갈 때 샬럿을 데려갔거든요. 샬럿이 말하길, 두 사람 분위기가 아주 심상치 않다고 하더라고요. 식사도 함께했다던데, 누가 보면 오래된 연인으로 착각할 정도라니까요?”

“그렇구나……. 잘됐네.”

시안나는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들어 올렸다. 눈치 백단 미셰리에게 디트리히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아무튼 구두에 부케까지 둘러보는 동안 분위기가 좋았데요. 그 아가씨, 정말 도련님을 마음에 두고 있기라도 한 걸까요? 뭐, 진짜 성녀이든 아니든 이참에 평민에서 신분 상승할 기회를 붙잡으려는 걸지도요.”

저택 내에서는 에르마야가 성녀인지 아닌지 의견이 반반 갈렸다. 그 누구도 성력을 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셰리의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시안나는 점심을 먹고 나서도,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을 때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결국 책을 덮은 그녀가 뒤통수에 팔을 베고 천장을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정말로 에르마야는 디트리히에게 첫눈에 반한 걸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두 사람은 소설의 여주, 남주니까.

자신은 아무리 해도 디트리히의 옆에 자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온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 때문일까?

시안나는 결혼식을 준비하는 일주일 내내 감기라도 걸린 듯 오한에 시달려야 했다.

일주일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시안나는 결혼식 전날 폭풍이 내리치길 기도하며 잠이 들었다.

꿈에서까지 소원을 빈 게 무색하게도 성당 위에 드리운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평화로웠다.

***

시안나는 마차에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슈토르 공작가에서 마차로 이동하길 두 시간째.

멀리서 첨탑이 우뚝 솟은 하얀 성당이 보였다. 신성하게 빛나는 하얀 건물은 신도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해 주는 것만 같았다.

시안나는 궁금해졌다. 신마저 기꺼워하는 것 같은 결혼식을 정말 막을 수 있을까?

성당을 향해 금테를 두른 마차가 속속들이 도착했다. 왕국의 위세 있는 공작가답게 끝없는 행렬이었다.

성당 안쪽까지 들어온 하객들은 모두 갑작스러운 결혼에 놀란 기색이었다.

“소문 들으셨어요? 결혼 상대가 보잘것없는 평민이라는 거요.”

“몰락 귀족인 거 아니에요? 설마 진짜로 평민일까요.”

“듣기로는 공자가 첫눈에 반했다고 하더군요.”

저들끼리 숙덕숙덕 추측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온갖 소문이 난무하는 사이, 왕국의 인장이 박힌 황금색 마차가 들어왔다. 마차 문이 열리고 남자가 내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깨끗한 피부만치 하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반듯한 이마, 눈꼬리는 처져 있지만 강단 있는 눈매와 바다 같은 눈동자, 오만해 보이는 높은 콧대와 굳게 다물려진 입술. 그가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어깨 장식과 표장을 지닌 하얀 제복이 신성한 분위기를 더욱 돋우었다.

감탄하는 군중들을 가로지른 카릴이 높은 성당 문에 다가서자 귀족들이 중앙으로 갈라졌다. 그들이 일제히 벼처럼 고개를 숙였다. 시안나와 긱스도 마찬가지였다.

“귀한 발걸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이시여.”

“이렇게 공자가 갑작스럽게 결혼식을 올리다니, 아침까지도 꿈인가 싶었지 뭔가.”

순간 긱스와 카릴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두 사람 사이에서 묘한 공기가 흘렀다.

시안나는 과연 로드브뤼셀 왕국의 보물이라고 일컬어질 만한 용모에 입이 벌리면서도 작은 의문이 들었다.

지금 그는 좌중을 압도시키는 위압감을 뿜어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카릴은 부드럽고 어딘가 처연한 분위기의 다정남이었다.

성년이 된 남자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자꾸만 그녀가 모르는 곳에서 소설과 다른 부분이 생겨난다. 어째서일까?

“어쨌건 결혼을 축하…….”

좌중을 빙 둘러보던 그는 근처에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에르마야를 발견했다.

그는 숨이 멎은 사람처럼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이쪽이…… 그 소문의 아가씨이군.”

역시 오늘의 주인공답게 아름다운 자태였다. 붉은 정수리에 반짝이는 티아라, 하얀 목을 장식하는 큼지막한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눈부셨다. 그러나 카릴이 멈춘 건 그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에르마야…….”

못이 박힌 사람처럼 한참 동안 에르마야를 응시한 카릴에게서 숨길 수 없는 떨림이 묻어 나왔다.

붉은 머리카락이 나풀거리고 가느다란 목선이 들리자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했다.

‘카릴이 에르마야에게 첫눈에 반하는 건 소설대로구나.’

비록 두 사람이 만난 곳이 원래 설정대로 황성 무도회가 아니라 할지라도, 카릴이 에르마야를 좋아하는 건 변함이 없었다.

만약 카릴이 에르마야에게 감흥을 느끼지 않았다면 이곳이 여전히 소설 속이 맞는지도 의심해 봐야 했을 거다.

그렇다면 소설 대로 흐르지 않는 일은 무엇이 원인인 걸까?

에르마야가 하얀 드레스 자락을 부여잡으며 허리를 숙였다.

“제국에서 가장 밝은 태양, 위대하신 왕께 인사드립니다. 에르마야라고 합니다.”

“반갑…… 군.”

카릴이 떨리는 목소리로 하얀 장갑을 낀 손을 불쑥 내밀었다. 에르마야는 황송해하면서도 악수를 했다.

“저…… 전하?”

의례적인 악수는 끝이 났다. 그러나 에르마야의 손을 쥔 카릴의 손은 떨어질 줄 몰랐다.

그녀의 손바닥 감촉을 맛보듯 손끝으로 느리게 쓸기까지 했다. 이제 곧 결혼하는 신부에게 보이는 관심치고는 지나친 면이 있었다.

당황한 좌중이 술렁거릴 때였다. 결혼식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신전에 가득 울렸다.

“곧 예식을 시작하겠습니다.”

하객들은 예배당 안으로 삼삼오오 모여들더니 버진로드를 필두로 양옆으로 갈라섰다.

축복을 내리는 건 교황이었다. 재단 앞에 선 그가 성호를 긋고 신랑 신부 입장을 외치자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에르마야가 디트리히와 팔짱을 낀 채 단상에 올라섰다. 시안나는 애꿎은 드레스 자락만 움켜쥐었다.

‘헤이스가 어떻게든 해 준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결혼식이 끝날 때까진 모르는 거야.’

결혼식 복장으로 단상에 올라선 디트리히는 완벽한 신랑의 자태였다. 시안나는 하늘이 야속하기만 했다.

“저 영애는 얼마나 대단한 가문이기에 왕국 최고의 공작 가문과 결혼을 하는 거래요?”

“이럴 줄 알았다면 혼담 신청이라도 넣어 보는 건데.”

당연하게도 하객들은 혜성처럼 등장한 여자에 의구심을 쏟아 냈다. 또 소문과 달리 멀쩡한 디트리히의 겉모양에 시샘하기도 했다.

주례사가 이어지고 두 사람에게 축복을 내릴 때까지도 시안나의 입술은 일자 모양으로 굳어 있었다. 당장 결혼식이 무산되길 바라는 추악한 마음과 달리 식장은 내내 빛났다.

드디어 모든 절차가 끝나고 맹세의 키스만 남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디트리히에게 에르마야가 양손을 붙잡았다. 디트리히가 에르마야에게로 휙 고개를 든 순간, 두 사람의 입술이 짧게 부딪쳤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며 결혼을 축하하는 환호성과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함성에 놀랐는지 디트리히의 어깨가 튀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시안나와 눈이 마주쳤다.

“…….”

시안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결국 두 사람은 정식 부부가 되었구나, 정말로.’

디트리히 또한 시안나를 발견해 조금 환해진 만면이 단숨에 시무룩해졌다.

그렇게 무사히 결혼식이 끝이 났다.

이 소설 속 세계에서도 결혼이 끝나면 신혼여행을 가는 풍습이 존재했다. 본래라면 신혼여행으로 제국의 유명한 섬에서 휴식하거나 휴양지를 둘러보았지만 디트리히는 성치 않은 몸이었다. 그 탓에 두 사람은 저택에 머무르는 것으로 결론 났다.

결혼식이 끝나고 손님들은 아슈토르 저택으로 이동했다. 정문에서 하객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시안나는 손님들이 축하 인사를 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졌다.

결국 하루 종일 마음고생 하랴 응대를 하랴 녹초가 되고 말았다.

하객들이 돌아간 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이었다.

시안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제 방 침대에 드러누웠다. 잠시 쉬고 싶었다. 그녀를 뒤따라 헤이스도 방 안에 들어왔다.

그는 침대 옆에 선 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결혼식을 막지 못했습니다.”

제 방에 들어오려는 헤이스를 제지할 기운도 없었다. 시안나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니야. 나야말로 괜한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워서 미안해. 헤이스가 무슨 수로 두 사람의 결혼식을 파투 내겠어. 내가 시무룩해서 일부러 다독이려고 해 준 거지?”

처음부터 어린아이처럼 억지를 부린 건 저였다.

“죄송합니다. 시안나 님.”

사실 헤이스는 기쁨에 춤을 추는 입꼬리를 간신히 잠재우고 있었다.

그는 애초에 두 사람의 결혼식을 막을 생각 따위 없었다.

디트리히가 알아서 그녀에게서 떠나 준다니, 손대지 않고 코를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지 않은가. 그는 디트리히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헤이스가 음흉한 속내를 숨기고 다시금 동아줄을 가장한 썩은 줄을 내밀었다.

“아직 결혼을 되돌리는 방법은 존재합니다.”

시안나가 침대에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뭐? 두 사람의 결혼을 깨뜨릴 수 있다고?”

“그렇습니다.”

확신하는 헤이스의 회색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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