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24화 (24/70)

[24]

헤이스 또한 그의 고집과 철두철미한 성미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긱스 님의 말에 따르면 에르마야 양은 몇백 년 만에 나타난 성녀이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그녀에 관한 소문이 그 근방에 퍼졌을 겁니다. 그렇다면 성녀를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신전에도 소문이 흘러 들어갔을 거고요. 그녀가 성녀라는 게 밝혀지면 신전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 그런가.”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었다.

성녀는 신에게 바쳐진 여성으로 신만을 섬겨야 한다. 교황이나 신관도 결혼이 금지되어 있는데 하물며 성녀는 어떠할까? 신전이 뒤집힐 것이 틀림없다.

시안나의 잘게 떨리는 어깨가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헤이스는 그의 주장에 쐐기를 박았다.

“또 에르마야 양의 의사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하긴…….”

디트리히는 외모 때문에 로드브뤼쉘의 보물이라 불리는 카릴의 뺨을 칠 정도로 미남이었다. 하지만 저주에 풀리기 전 선뜻 결혼을 승낙하는 건 부담스러울 수 있다.

시안나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마음에 안정이 깃들어서일까. 그녀 대신 필사적으로 이유를 찾는 헤이스가 어쩐지 귀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와인 창고에 숨어 있을 때 헤이스가 찾아내는 것도 반복되는 일이었다.

헤이스의 가슴팍에 파묻힌 시안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헤이스는 내가 힘들 때 항상 곁에 있어 주는구나. 고마워.”

검은 물에 잠긴 마음을 헤이스가 건져 내 주었다. 디트리히가 그녀를 비춰 주는 햇살이라면 헤이스는 어둠 속의 등불 같은 존재랄까.

시안나가 헤이스의 손에 깍지를 걸었다. 위에서 숨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정수리에 옅은 입김이 닿았다.

“……당치 않습니다. 시안나 님께서 의기소침하시면 저까지 기분이 가라앉아 그런 것뿐입니다.”

눈앞이 깜깜해서일까. 유독 떨리는 목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침착하게 대답하려 안간힘 쓰는 헤이스라니.

시안나의 귀엽다는 감상과 달리 헤이스는 지금 당장 이 여자를 넘어뜨리고 싶다는 욕망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두운 실내가 그의 음흉함을 부추겼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마음 약해져 있을 때 기습하는 것도 좋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거리를 지키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다가 사냥의 때가 다다랐을 때 성큼 목덜미를 물 생각이었다.

쿵쿵. 갑작스러운 적막이 두 사람을 찾아왔다.

심장 소리와 숨소리만 서로의 귓가에 맴도는 와중.

어색한 공기를 지우려 시안나가 손뼉을 짝, 소리 나게 치며 화제를 돌렸다.

“그, 그러고 보니 헤이스는 에르마야 양을 보고 가슴이 찌릿하거나 심장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을 받지 않았어?”

헤이스는 이 소설 속에서 서드 남주였다. 그러니 헤이스도 에르마야를 보고 혼란스럽지 않았을까?

오히려 헤이스는 그녀의 물음이 뜬금없다고 여기는지 반문했다.

“왜 그런 걸 물으십니까? 혹시 신경 쓰이십니까?”

“에, 어?”

스스로가 들어도 삑사리 난 목소리였다.

헤이스의 회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서로의 가슴팍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 그의 시선이 뱀처럼 말의 저의를 찾는 모습이 너무도 잘 보였다.

숨이 막혔다. 그의 눈빛이 밧줄이 되어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손을 맞잡은 건 저인데도 꼭 헤이스가 꼼짝도 못 하게 그녀를 옭아매는 것만 같았다.

심장 소리가 아까 전보다 크게 요동치고 서로가 내쉬는 숨소리조차 귀에 선명히 꽂혔다. 긴장으로 맞잡은 손 사이로 열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더니 땀이 뱄다.

“혹시 신경 쓰이시는 거라면…….”

묘한 긴장이 흐르는데, 끼익, 문이 열리는 소음이 헤이스의 말을 중단시켰다.

‘누구지? 점심 식사는 이미 끝났는데?’

애초에 긱스가 와인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와인 창고에 하인이 드나드는 일은 드물었고 그 때문에 시안나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문으로 고개를 돌린 시안나의 눈이 커졌다.

빛이 반사되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헤이스처럼 훤칠한 체격을 지닌 남자는 저택 내 단 한 명뿐이었다.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디트리히가 문을 닫고 들어왔다.

깜깜한 창고 안에서 긴밀히 붙어 있는 시안나와 헤이스를 본 디트리히의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시안나는 황급히 헤이스를 팍 떨어뜨리고 젖은 얼굴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디트리히? 여, 여기엔 어떻게……?”

그는 시안나 앞에 오더니 힘없이 웅얼거렸다.

“누님께서…… 식사 시간 때, 입맛이 없어 보이셔서…… 준비, 했습니다.”

디트리히가 초콜릿 쿠키가 잔뜩 들어 있는 봉지를 내밀었다.

평소 디트리히를 챙겨 주는 건 시안나지만 디트리히가 한 번씩 생각지 못하게 그녀를 위해 줄 때면 가슴이 괜히 뭉클해졌다.

본래라면 고맙다며 검은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며칠 뒤 성녀와 결혼할 몸이었다.

시안나는 봉지를 쥐는 대신 디트리히로부터 한 발짝 물러섰다.

“누, 님?”

“디트리히. 혹시 결혼이 뭔지 아니?”

“같이……. 사는 거……?”

역시 디트리히는 결혼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가 차분히 설명했다.

“결혼은 긱스 공작님과 전 공작 부인께서 하신 것처럼 가족을 만드는 거야. 그러면 결혼한 사람 외에 함부로 대화를 나누거나 개인적인 선물을 받으면 안 돼. 디트리히도 곧 에르마야 양과 결혼할 거니까 조심해야 하고. 이해 가니?”

“후으……?”

디트리히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잘생긴 얼굴이 저렇게 시무룩하게 죽은 건 처음이었다.

가라앉은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하지 않으면, 쿠키를 받아 주시는, 겁니까?”

“디트리히는 딱히 결혼에 반대하지도 않잖아.”

괜히 힐난조가 튀어나왔다. 디트리히의 긴 속눈썹이 자책하듯 내리깔리며 애처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아버지께서 결혼을 해야지, 누님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는다 하셔서……”

뭐? 놀란 그녀가 디트리히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날 괴롭히지 않아? 그게 무슨 말이야? 좀 더 자세히 말해 줄래?”

“예전에…… 누님께서…… 아버, 지께 혼났을 때…… 약속했습니다.”

“예전이라니? 대체 언제?”

“절벽에 떨어지기 전에…….”

시안나가 10년 전 사건을 떠올리고 숨을 들이켰다.

긱스가 그녀에게 손찌검을 한 것 때문에 시안나도 애꿎은 디트리히에게 짜증을 부렸고, 그때문에 꽃을 구하러 간 디트리히가 절벽에 떨어져 버린 사건.

순간 절벽에서 뛰어내렸는데도 세 사람이 무사했는지 의문이 스쳐 지나갔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때, 결혼하면 날 괴롭히지 않겠다고 공작님과 약속한 거야?”

“흐……. 네…….”

긱스가 디트리히와 함께 잠이 들어도, 목욕을 시켜 주어도 잠잠했던 이유는 어차피 성녀와 결혼할 것이기 때문이었을까.

“어릴 적 식사 자리에서 두 사람이 ‘약속’이라고 했던 말이 그거였구나…….”

시안나가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녀를 구하려 한 일이 도리어 부메랑이 되어 상처 입었다는 걸 디트리히는 알까?

디트리히가 한 번 더 쿠키 봉지를 들이밀었지만, 시안나가 팔목을 붙잡았다. 명백한 거부였다.

어두컴컴한 와인 창고를 밝히는 침침한 등불만이 디트리히의 얼굴 윤곽을 그렸다.

불꽃의 일렁임 때문에 유독 금안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앞으로…… 쿠키를 누님에게만 주고 싶다고, 한다면…… 받아 주실, 겁니까?”

시안나는 디트리히가 제게 고백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결혼한 사람만 쿠키를 받을 수 있다는 설명에도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쿠키를 주려고 하고 있었으니까.

“……그럴 수 없어.”

하지만 현실은 에르마야가 쿠키를 받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심장이 애달픈 건 그녀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디트리히는 자꾸만 시안나의 말아 쥔 주먹을 펴고 봉지를 쥐여 주려 손가락을 긁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디트리히의 손에서 봉지가 툭, 하고 떨어졌다.

안에 들어 있던 쿠키가 투둑,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흐으…….”

마지막 희망이 부서진 사람처럼 디트리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쪼그려서 쿠키 봉지를 집는 디트리히의 정수리가 유독 쓸쓸했다. 시안나는 콕콕 찌르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결국 결혼하는 사이가 아니라도 쿠키 봉지쯤은 괜찮다는 결론을 내렸다.

“디트리히…… 나중에 미셰리에게 과자를 전달해 주면, 내가 찾아갈게.”

“흐……. 알겠…… 습니다.”

시안나는 눈물이 차오르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등을 돌렸다.

디트리히는 바닥에 떨어진 과자 봉지를 주웠다. 나가기 전, 디트리히가 작게 읊조렸다.

“누님…… 저는 누님에게만…… 쿠키를, 주고 싶었, 습니다.”

주위가 조용했기에 그녀에게 너무 잘 들렸다. 시안나가 뒤늦게 고개를 돌렸지만 문이 쿵, 하고 닫혔다.

잠시의 빛이 꺼지고 시안나는 새카만 어둠에 푹 잠겼다.

헤이스는 축 처진 시안나의 어깨를 느른히 문질렀다. 간지럽고 심장이 이상해지는 감각이었다.

헤이스는 드디어 목덜미를 제대로 물 때라는 걸 깨닫고 씩 웃었다. 커다란 장애물 앞에 놓인 그녀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시안나에게 구원의 말을 내뱉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을 막아 보겠습니다.”

“뭐? 헤이스가 무슨 수로?”

시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헤이스는 이 공작저에서 디트리히의 호위 기사일 뿐이었다. 후작 가의 장자에게 공자의 결혼을 막을 힘이 어디 있을까.

“어떻게든 손을 써 보겠습니다.”

굳건한 회색 눈동자에 불안한 마음이 삽시간에 불식되었다.

끊어질 것 같은 동아줄이라도 생명줄처럼 매달려야 하는 게 시안나의 처지였다. 시안나의 붉어진 안면 위로 옅은 웃음이 번졌다.

“……미안하지만 부탁 좀 할게.”

시안나가 헤이스의 음흉한 속내도 모르고 손을 간절하게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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