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23화 (23/70)

[23]

“디트리히. 인사해라. 앞으로 같이 지내게 될 에르마야 양이다.”

긱스가 멀뚱히 서 있던 디트리히 앞으로 여성을 이끌었다.

긱스의 소개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여자의 꾀죄죄한 차림을 보아 평민이었다. 그런데 공작인 긱스가 그녀를 유리라도 다루는 듯 귀하게 대하고 있었다.

디트리히를 본 에르마야의 뺨에 발간 꽃물이 들었다.

은하수가 수놓아진 밤보다 반짝이는 것 같은 윤기 있는 머리칼, 날카로우면서도 품격 있는 분위기에 시선이 강제로 잡아끌리는 느낌이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녀가 수줍게 미소하자 따뜻한 햇볕 냄새가 주위에 퍼졌다. 시종인들도 온기를 느꼈는지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다만 디트리히만은 예외였다. 그는 털이 곤두선 고양이처럼 바싹 경계를 내비치더니 시안나의 등 뒤로 꼭꼭 숨어 버리곤 빼꼼 고개만 내밀었다.

긱스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성대한 한숨을 내쉬었다.

“에르마야 양이 이해해 주게. 앞서 설명했지만 내 아들이 지독한 저주에 걸려 일상생활도 어려운 편이라네. 디트리히. 제대로 인사해야지.”

시안나의 등 뒤에 숨은 디트리히를 질질 끌고 나왔다. 디트리히는 어쩔 수 없이 에르마야 앞에 섰다.

드디어 디트리히와 에르마야의 첫 만남. 과연 디트리히는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느끼는 걸까? 운명적인 사랑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지을까?

그 광경을 시안나는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디트리히 아슈토르…… 입니다.”

기대와 달리 디트리히는 누가 봐도 무성의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응? 뭔가 이상한데? 소설에서 디트리히는 에르마야에게 환영의 인사로 하얀 꽂을 건네준다. 분명 첫눈에 반한 사람의 행동이었다.

에르마야는 시큰둥한 반응에도 능숙하게 미소하며 손을 맞잡았다.

“저는 에르마야라고 해요.”

사무적인 인사일 뿐인데도 두 사람을 지켜보는 시안나는 심장에 쓰라림이 번졌다.

“먼 길을 오느라 에르마야 양이 시장할 것 같군. 이르지만 점심을 같이하지. 중요한 이야기도 있으니.”

어라? 하얀 꽃은 건네주지 않는 거야?

미묘하게 원작과 다른 흐름에 시안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고민에 빠졌다.

꼭 신께서 그녀의 소원을 중요한 건 빼고 겉껍데기만 들어주는 느낌이었다.

에르마야와 디트리히는 당연한 것처럼 나란히 이동했다. 시안나는 그 둘의 등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참 아름다운 한 쌍이었다. 에르마야는 걸친 옷만 누추할 뿐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 인상이었고, 디트리히 또한 고고한 분위기의 귀공자였다.

잘 어울린다는 감상과 동시에 현기증이 찾아왔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아 몸이 크게 휘청거릴 때였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팔뚝을 붙잡고 기대게 했다. 등 뒤로 건장한 남성의 단단한 체격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석양 같은 주황색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헤이스였다.

“괜찮으십니까? 아까부터 안색이 파랗습니다.”

“내가 그랬어?”

“네. 정확히는 저 여성을 뚫어져라 쳐다본 직후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혹시 아시는 분입니까?”

“……아니. 첫 대면이야.”

시안나는 퍼뜩 고개를 내저었다. 헤이스는 속을 헤아리듯 그녀를 의미심장하게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그가 원하는 대로 일을 계획할 수 있겠다 싶었다.

***

촛불이 불을 밝히는 식탁 위는 화려한 음식이 즐비했다. 경사스러운 날을 기리는 듯 칠면조 통구이의 훈제 향이 코를 강하게 찔렀다.

하지만 시안나는 배가 고프기는커녕 입맛이 없었다.

긱스가 말한 중요하게 할 이야기란 무엇일까?

의문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긱스까지 식당에 모이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다 먹은 수프 그릇이 치워질 때쯤에 식탁 중앙에 앉은 긱스가 나이프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잠시. 디트리히에 관해 중대한 발표가 있다.”

그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에르마야를 흘긋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난 오랫동안 디트리히의 병을 낫게 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디트리히는 사악한 흑마법에 걸려 있고, 치료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성력뿐이다. 성력을 다룰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 신의 사랑을 받는 ‘성녀’밖에 없지.”

여기까진 시안나도 아는 이야기였다.

“한동안 잠잠했는데,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린다는 기적의 치료사가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원래 거짓말은 반응하지 않으면 가라앉기 마련이지만 이번엔 더욱 크게 부풀어 오르더군. 설마 하면서 기사를 보냈는데……. 마침내 디트리히의 저주를 풀어 줄 사람을 찾아냈다. 그게 지금 여기 있는 에르마야 양이다.”

이 세계관을 이미 알고 있던 시안나는 무덤덤했지만 문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헤이스는 놀란 듯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

“여기까지 말하면 짐작했겠지만, 에르마야 양이 바로 그 성녀다. 신전에 보내지기 전 그녀를 빼돌렸지.”

“풉, 네?”

시안나의 손에 쥔 포크가 바닥으로 찰캉 떨어졌다.

교회에서 오랫동안 고대하던 와중 몇백 년 만에 나타난 성녀였다.

유일하게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 미래 예지도 가능하고 악한 힘을 없앨 수 있는 사람.

그런 그녀를 교회 몰래 데려오다니, 만약 교회에서 이 사실을 안다면 교황이 성 기사단을 이끌고 아슈토르 저택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다.

어쩐지 에르마야가 평민복을 입고 있는 이유는 그거였나. 아직 그녀는 성녀가 되기 전인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긱스는 어째서 원작과 달리 그녀가 성녀가 되기도 전에 몰래 데려왔는가? 어째서 에르마야는 순순히 긱스와 동행했는가?

그냥 일반 평민보다야 성녀로서 모두의 존경을 받는 삶이 더 윤택할 것이다.

그의 폭탄 발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일 테지. 그러니 두 사람의 결혼을 신속히 추진할 계획이다.”

정원을 산책한다는 정도의 가뿐한 말투였다.

시안나는 이번에도 숨을 헉 들이켰다. 디트리히와 에르마야가 만나자마자 결혼이라니.

소설에서 두 사람은 결혼에 결 자도 꺼내지 않았다.

설마 그녀의 개입으로 내용이 바뀌어 버린 걸까? 내가 디트리히와 친하게 지내서?

디트리히의 저주가 에르마야를 만난 뒤 바로 해제된다면 좋지만……. 그렇긴 한데…….

그녀는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펄떡펄떡 뛰는 심장을 애써 억눌렀다.

“결혼은 최대한 빨리 치르기로 했다. 빠르면 일주일 뒤에 열 계획이고, 그 이후엔 디트리히의 저주를 푸는 데 착수할 거다. 그리 알도록.”

“후으?”

디트리히는 타들어 가는 시안나의 속도 모르고 크림소스가 묻은 숟가락을 우물거렸다. 또 다른 에르마야인 당사자도 조용했다.

저건 찬성의 의미일까?

처음 보는 사람과 결혼이라니, 당황해야 하지 않나?

그 후로도 긱스가 무어라 이야기했지만 말이 입자처럼 흩어져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뒤, 시안나는 좀비처럼 터덜터덜 식당을 나섰다. 정처 없이 걷다 도착한 곳은 그녀의 아지트인 와인 창고였다.

햇빛 하나 들지 않는 지하가 오늘따라 더욱 컴컴했다. 그녀는 빛무리 같은 먼지, 알싸한 와인 향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 항상 앉던 자리에서 웅크리려 했다.

그런데 오크 통에 무릎을 쿵 찧고 말았다.

“아얏, 아파…….”

무릎에 붉은 생채기가 났다. 입술처럼 쭉 갈라지고 진득한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이상했다. 부딪친 건 다리인데 심장이 저릴 만큼 아팠다.

“디트리히가 원작보다 더 빨리 저주에서 해방되면 잘된 일이잖아. 나도 저주에 풀린 디트리히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

아니. 디트리히가 결혼하는 마당에 다 무슨 소용일까? 눈가가 찌릿했다.

디트리히에게 사용하는 손수건을 괜히 더럽히기 싫었던 시안나는 서랍 통을 열며 닦을 것이 없나, 하고 살폈다.

끼익. 그때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누구……?”

키가 크고 건장한 남자의 몸이 문에 들어온 빛 때문에 역광으로 그늘졌다.

선반 못에 걸린 등잔불이 금빛 단추가 달린 하얀색 제복, 허리보다 긴 주황빛 머리카락을 그리기도 전에 시안나는 누군지 알아챘다.

자신을 와인 창고에서 찾는 남자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역시, 여기서 울고 계셨군요.”

헤이스는 코를 훌쩍이며 어둠 속에서 서랍을 뒤적거리는 시안나를 발견했다. 얼굴에 달라붙은 눈물이며 반질거리는 콧물이며 엉망이었다.

시안나는 얼른 눈가를 문질렀다.

“흑, 우는 거 아니거든……. 여긴 왜 온 거야?”

“디트리히 님과 관련된 일에 시안나 님은 예전부터 민감하셨으니까요.”

그녀를 몇 년 동안 보았는데 모를 리가. 자그마치 10년이 넘은 시간이었다.

그러니 결혼 발표 후 백지장처럼 질린 시안나가 와인 창고에 간다는 건 어렵지 않게 유추 가능했다.

헤이스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려다 까진 무릎을 발견하고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곧 허리를 굽혀 어느 서랍에서 연고를 꺼내 상처에다 발라주었다.

“디트리히 님께서 결혼하시는 게 서운하신 겁니까?”

시안나는 눈물을 손등으로 벅벅 닦아 내며 도리질 쳤다.

“아냐, 디트리히가 결혼을 하면 경사인데 서운하다니…….”

“……그런 걸로 해 두죠.”

연고를 다 바른 헤이스가 말없이 일어섰다. 그는 동그란 뒤통수를 잡고 제 품으로 밀어 넣었다.

시안나는 어깨를 떨면서도 가만히 그에게 안겼다. 잠시 뒤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감정에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단지 저주에 걸려 귀여우면서도 나중엔 멋있게 성장하는 디트리히가 좋았다. 그래서 최애캐였다.

한데 결혼 발표를 듣고 울컥 치미는 이 감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매일 식사를 하고 긱스와 대적할 때도 항상 그녀의 편을 들어주던 디트리히와 떨어진다. 황금색 구슬 같은 눈이 다른 여자를 담는다.

더 이상 디트리히는 소설 속 인물이 아니었다. 손을 뻗으면 실체가 잡히는 실존 인물이었다.

상상만으로도 심장에 유리 조각이 박히는 듯한 아픔이 선연해졌다.

굳은살 박인 손이 다독이듯 곱슬 머리카락을 살살 어루만졌다.

“걱정 놓으십시오. 도련님과 에르마야 양이 그렇게 쉽게 결혼할 리가 없습니다.”

구원 같은 말에 시안나의 고개가 휙 들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다른 사람도 아닌 왕국의 2인자인 긱스 공작님께서 추진하시는 일이셔. 뜻을 꺾을 리 없으시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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