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그는 속으로 자책했다.
어떻게 그녀가 제게 마음을 줄 때까지 느긋이 기다리려 했단 말인가.
헤이스는 그녀의 마음이 디트리히에게 가 있다는 걸 알았다. 저주에 걸리긴 했지만 허우대가 꽤나 우수하니 이해가 갔다.
하지만 결코 그에게 밀린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저주에 걸려 백치가 된 남자와 번듯한 자신을 두고 본다면 그의 압승이었으니까.
하지만 저렇게 헐벗은 채 서로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모습을 보자 불안이 번졌다.
그녀를 밖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새장, 아니 새 모이를 줄 바늘구멍만 낸 네모난 상자 안에 가두고 저만 봐야 안심이 될 성싶었다. 새장조차 다른 사람들이 새를 눈에 담을 수 있으니 위험했다.
“사실 시안나 님에게 들켜도 상관없지만 디트리히 님께 드러낸 건 치명적이군.”
만약 디트리히가 성녀에 의해 치료를 받는다면, 오늘 일을 기억한 그는 헤이스를 내칠 게 분명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찌를 듯한 시선을 보내는 남자를 가만 놔둘 리가.
그녀가 상처받을지언정 시안나가 저택에 쫓겨나게 손을 써야 했다.
미친 사람처럼 온 저택을 헤맨 보람이 있는지, 헤이스는 정문에서 마차에 올라타려는 공작을 발견했다.
놓칠세라 그가 얼른 접근했다.
“공작님. 급히 보고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뱀과 칼이 그려진 마차에 올라타려던 걸 멈춘 긱스가 다급히 뛰어오는 헤이스한테 서늘한 눈빛을 보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베어 버리겠다고 눈으로 말하는 것만 같았다.
헤이스는 잠시 어깨를 움츠렸으나 곧 등을 똑바로 펴고 보고했다. 분명 디트리히와 관련된 이야기라는 걸 알면 풀어질 공기라 여겼다.
“시안나 님과 도련님의 관계가 심상치 않습니다. 방금 전 디트리히 님께서 알몸인 상태로 시안나 님과 침대에서…… 뒹굴고 계셨습니다.”
시안나와 디트리히의 관계에 유독 예민하게 반응하는 긱스였다. 항상 둘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을 빠짐없이 보고하라며 동태를 주시했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녀가 일주일간 방에서 외출 금지를 당하면 좋을 것 같았다. 디트리히조차 만날 수 없도록.
하지만 보고를 들은 긱스의 낯은 미지근한 차처럼 고요했다.
“시안나가 목욕이라도 시켰나 보지. 그것뿐?”
긱스의 여상한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건 헤이스였다. 그는 어떻게든 두 사람이 수상쩍어 보이도록 안간힘을 썼다.
“목욕이라고 하기엔……. 디트리히 님께서 시안나 님을 덮치는 자세였고…… 또…….”
“하아……. 물러가.”
긱스가 손목을 내저은 뒤 마차에 착석했다. 더는 들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흥미가 식은 낯이었다.
그러다 잠시 무언가 떠올랐는지 종이에 메모를 휘갈기고 창문 너머로 쪽지를 건넸다.
“급한 볼일이 생겼다. 출타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시급한 일이 생기거든 이 주소로 서신을 보내도록.”
그 말을 뒤로 한 채 긱스가 마차를 출발시켰다. 마차는 점차 헤이스에게서 멀어졌다.
헤이스는 여상한 반응이 기가 막혀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제길…….”
헤이스가 발로 애꿎은 땅을 쳐 댔다. 최소한 실의에 빠진 시안나를 달래 주는 계획이 틀어지고 말았다.
그녀를 위로해 줄 기회가 날아간 게 몹시 아쉬웠다.
한창 앞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리는데, 뒤늦은 의문이 들었다.
“……얼마나 급한 일이시기에 저렇게 바삐 가시는 거지?”
눈에 넣어도 아파하지 않는 도련님을 제치고 먼저 확인해야 하는 일이라니!
어렸을 적부터 저주에 걸린 디트리히의 말 상대를 해 주며 아슈토르 공작가를 드나든 헤이스로서 이렇게 예정도 없이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공작은 처음 보았다.
“도련님에 관한 것보다 더 큰 일이 생긴 건가…….”
10년 넘게 그를 보필해 온 헤이스는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그 큰일이란 무엇일까?
설마 저주를 풀 수 있는 단서를 얻으신 건!
“어쩌면 시안나 님을 더 손쉽게 가질 수도 있겠군.”
파란의 예감이 들었다. 헤이스의 눈길이 언덕 너머 기다란 길을 따라 굴러가는 마차에 달라붙었다.
***
“공작님께서 갑자기 출타하셨다고?”
시안나의 곱슬머리를 빗질하던 미셰리가 흥분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다니까요. 시안나 님도 긱스 님이 평소답지 않게 급히 계단을 내려오시는 모습을 보셨어야 해요. 아마 뒤로 넘어지셨을 거예요.”
“뭐, 큰일이야 있겠니.”
시안나는 머리를 톡톡 두드리는 손길을 느끼며 심드렁히 맞장구쳤다.
냉혈하고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지만 그에게 가장 소중한 건 디트리히였다. 분명 별일 아닐 것이다.
속으로 그렇게 결론을 내린 시안나는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았다.
맑은 하늘 아래 손바닥만 한 붉은 단풍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엊그제가 새해의 시작 같았는데 벌써 가을이었다.
“그러고 보니 미셰리가 저번 주에 족제비 털로 만든 목도리를 꺼내 놓았지. 아직 겨울이 온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는 거야?”
“아가씨께서 감기라도 걸리시는 날엔 제가 도련님께 혼난답니다.”
“디트리히가 화를 낸다고?”
“그럼요. 긱스 님보다 더 엄격한 얼굴이 되어 버린답니다.”
“디트리히가 무서운 표정을 짓는다니, 말도 안 돼.”
오늘 디트리히가 헤이스에게 화낸 것도 디트리히가 무언가 착각한 게 틀림없어.
시안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미셰리는 할 수만 있다면 시안나에게 냉기가 흐르는 얼굴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런데 도련님은 정작 그 무시무시한 표정을 시안나 님이 지나가기라도 하면 감쪽같이 감추었다.
여우가 따로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디트리히가 성인이 된 지 2년째였지.”
시안나는 무언가 기억이 날똥 말똥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턱을 쓸어내렸다.
잠시 뒤, 위화감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소설이 시작되는 디트리히와 여주 에르마야의 첫 만남.
배경으로 샛노란 단풍이 축복처럼 내렸다는 소설 구절이 불현듯 스친 까닭이다. 또 에르마야의 머리카락은 단풍보다 고운 붉은색이라는 구절도 인상 깊었다.
‘소설은 에르마야가 공작저에 오면서부터 시작했지!’
긱스는 지난 10년 동안 디트리히의 병을 고쳐 줄 성녀를 은밀히 찾아 헤맸다.
그러나 바다 건너까지 수소문했지만 성녀는 코빼기도 찾을 수 없었고 단서 또한 먼지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긱스도 해를 거듭할수록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 그가 예정에 없던 여행길에 올랐다.
‘혹시 정말로 성녀를 찾아 버린 건가?’
사실 시안나는 이 세계가 원작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다며 스스로 안심하고 있던 차였다. 원작 소설과 다른 설정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가령 카릴이 왕이 된 거라든지.
‘소설과 다른 부분이 조금씩 있잖아. 그렇다면 여주와 남주가 이어지지 않는 것도 가능한 거 아니야?’
만약 그렇다면 저주를 풀 수 있으면서도 시안나가 일으킨 독살 사건이 사라질 수도 있다.
가슴 한구석이 봄날이 찾아든 것처럼 설레었다.
그날 밤. 그녀는 베개에 머리를 누이며 제발 여주 에르마야가 디트리히를 만나지 않길 빌고 또 빌었다.
하나 그녀의 바람은 긱스가 돌아온 날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
긱스는 하루, 이틀이 지나도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시안나는 자수를 하고 있었다. 사실 긱스의 부재가 길어지자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심란해졌다.
마침 미셰리가 간단한 다과를 내왔다. 그녀가 테이블에 마들렌이며 차를 내려놓고 물었다.
“오늘 긱스 공작님께서 오신다는 소식 들으셨어요?”
“응……. 아침에 헤이스가 귀띔해 줬어. 점심시간이 지나서라지?”
“그건 아세요? 글쎄, 공작님이 웬 젊은 여성을 데리고 오신대요. 소문에는 치료사라나?”
그 순간 머리에서 불협화음이 쿵, 울린 것만 같았다.
시안나의 손가락에 날카로운 바늘이 푹 박혔다.
“어머! 아가씨, 괜찮으세요?”
미셰리가 호들갑을 떨며 손수건으로 피 묻은 손가락을 감쌌다. 피가 뚝뚝 흘러내렸지만 시안나는 아픔을 느낄 수 없었다.
여자? 치료사?
성녀인 에르마야를 연상시키는 단어가 그녀를 지배했다.
간단한 응급조치 후 미셰리가 입을 다시 나불거렸다.
“듣기로는 잘렸던 팔다리를 원상 복구시켜 준대요. 소문이라도 너무 과장된 것 같은데, 정말 유일하게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그 성녀 아닐까요?”
성녀라는 단어가 다시금 시안나의 심장에 푹 박혔다.
시안나는 자수를 하던 손수건을 테이블로 치웠다.
“혹시…… 이름은 뭔지 아니?”
미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안나의 입술이 벌벌 떨렸다.
“그건 모르겠지만, 매우 아름다운 아가씨래요. 태양처럼 타는 듯한 붉은색 머리카락에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외모라고 하더군요.”
붉은 머리칼. 시안나의 바람과 달리 그녀가 여주 에르마야가 맞다고 쐐기를 박는 증언이었다.
이럴 수가. 결국 에르마야와 디트리히는 서로 맺어질 운명인 거야?
게다가 에르마야가 디트리히의 저주를 해제하면, 디트리히는 나와 함께 보낸 시간을 기억할까? 날 어떻게 생각할까?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 칠 때였다.
이힝!
운명의 장난처럼 마침 밖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말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안나가 창틀로 바짝 다가섰다. 긱스가 타고 갔던 바로 그 마차가 분수대를 지나치고 있었다.
“에구머니나.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셨네요. 어머, 그렇게 뛰지 않으셔도 돼요. 시안나 님.”
시안나는 무섭게 요동치는 심장을 내리누르며 방을 나섰다. 현관에는 이미 헤이스와 디트리히, 여러 시종까지 나온 뒤였다.
그 앞에 멈춰 선 마차의 문이 열렸다.
긱스가 마차에서 내리자 모든 시종인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 뒤가 이상했다. 긱스는 마차 문을 닫지 않고 마차에서 튀어나온 새하얀 손을 에스코트해 주었다.
긱스의 도움을 받아 아름다운 여성이 마차에서 내렸다.
시안나는 가까스로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단풍빛 머리카락, 쳐진 눈매, 그 안에 담겨 있는 석류같은 눈동자, 작고 오뚝한 코와 오밀조밀한 입술. 평민복 차림의 쥐색 드레스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가리지 못했다.
그녀가 땅에 발을 딛자마자 주변에 나비가 꼬여 들었고 꾀꼬리도 그녀를 환영하듯 쪼로롱 청아한 울림을 냈다.
시안나는 이름을 듣지 않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여주인공이라는 것을.
눈앞에서 디트리히와 에르마야의 첫 만남이 성사되기 일보 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