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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21화 (21/70)

[21]

헤이스는 점심시간 전 디트리히에게 별일이 없는지 확인자 방문하는 게 일이었다. 바짝 긴장했던 시안나의 등이 안도감에 내려갔다.

“헤이스라면 문제없지.”

헤이스에게 들키는 게 디트리히 전속 시녀에게 알려지는 것보다 백만 배 나았다.

10년간 스스럼없이 와인 창고에서 대화를 나눌 정도로 서로에 대한 믿음을 쌓았으니까.

아까도 그녀를 위로해 준 헤이스가 아니던가?

“시안나 님……. 이건 대체……!”

그래도 역시 묘한 자세라 그런지 헤이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 듯 디트리히와 시안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뺨이 경련했다.

‘그렇게 못 볼걸 본 사람처럼 얼굴을 굳히지 않아도 되잖아.’

꼭 바람피운 배우자를 목도한 표정이라 시안나는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헤이스의 눈빛마저 딱딱해지자 시안나는 얼른 오해를 바로잡으려 했다.

“헤이스. 오해하지 말고 잘 들어. 내가 디트리히를…….”

“그만.”

싸늘한 한 마디에 방의 공기가 한겨울처럼 얼어붙었다.

평소 헤이스의 음성은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중저음이었기에, 처음 듣는 살벌한 목소리에 시안나는 등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헤이스는 입술을 일자로 굳힌 채 피식자를 사냥하는 포식자처럼 느릿하게 침대로 다가왔다.

침대 앞에 선 그는 황당무계한 발언을 했다.

“저도 끼어도 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시안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왜 제복 단추를 끄르는 건데?!’

그녀의 경악과 상관없이 투둑, 단정하게 목을 감싼 목깃의 금색 단추가 하나둘씩 풀리고 양 쇄골이 맞닿은 부분마저 드러났다.

헤이스는 그녀를 잡아먹을 듯한 사나운 기운을 표출하며 스산하게 지껄였다.

“저도 끼어도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시안나는 되레 되묻고 싶어졌다.

왜 끼어들겠다는 건데? 뭔지 알고 끼어도 되냐고 묻는 건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헤이스.”

“시안나 님과 디트리히 님께서 하시려던 걸 같이하고 싶다는 바람뿐입니다.”

“뭘 하는 줄 알고?”

“뭘 하려고 하셨습니까?”

헤이스의 평이한 반문에 시안나가 머리를 떼구루루 굴렸다.

헤이스를 본 지 어언 10년.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성격은 아니니 농담을 하면 애써 이해하고 넘어가 줄지도 모른다.

시안나는 태연한 척하며 웃어넘기려 했다.

“디트리히랑 같이 그, 수영 연습하고 있었어!”

“저는 수영 연습 말고 다른 걸 할 거니까 안심하십시오.”

“그래? 그럼 안심…… 이 아니라!”

헤이스가 농담을 받아 주지 않을 줄이야.

침대에서 수영이라니 대꾸할 가치가 없을 만큼 썰렁한 농담이긴 했다. 그럼에도 헤이스에게서 느껴지는 기묘한 냉기는 떨칠 수 없었다.

따스함만 가득하던 회색 눈동자가 열렬한 갈증에 휩싸인 듯 바싹 메말라 있기 때문일까. 피부마저 따끔거렸다.

“저도 침대로 올라가겠습니다.”

헤이스의 하얀 제복이 뱀 허물처럼 벗겨지더니 러그 위로 떨어졌다. 이윽고 셔츠 단추도 똑, 똑 풀리며 하얀 셔츠마저 추락했다.

디트리히의 깨끗한 피부와 달리 구릿빛에 검의 상흔과 자잘한 상처가 난 몸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디트리히 못지않게 탄탄한 가슴이 들썩거렸다.

두꺼운 빗장뼈와 흉부가 훤히 드러난 헤이스는 한쪽 무릎을 침대에 걸쳤다. 그러곤 시안나에게 입맞춤하듯 고개를 내렸다.

수상한 낌새를 느낀 시안나가 굴러오는 바위를 막듯 헤이스를 밀었다.

“뭐 하는 거야!”

“수영 말고 다른 걸 하려고 합니다.”

“지금 디트리히가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거 안 보여? 디트리히는 배, 백치잖아.”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뭐?”

시안나의 눈이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커다래졌다.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며 옷까지 벗더니, 이젠 디트리히가 보든 말든 상관없다고 한다.

제 앞에 있는 남자가 그녀가 숨어 있을 때마다 온 저택을 뒤지고 위안을 주던 그 헤이스가 맞는 건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문득 대화 주어를 말하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혹시 서로 다른 행동으로 착각한 거 아니야?’

헤이스가 옷을 벗어서 야릇한 짓을 벌이리라 어림짐작했을 뿐, 구체적으로 무얼 하려는지는 듣지 못했다.

‘그래. 서로 말이 엇갈리는 게 분명해.’

그는 상냥한 서드 남주 포지션이었다.

어둡게 일렁이는 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업신여기는 듯 차가운 게 걸렸지만 시안나는 말리려 노력했다.

“서로 말이 이상한데 대화를…… 아니, 잠시, 더 다가오지 말고!”

그녀의 얼굴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읏!’

시안나가 질끈 눈을 감을 때였다.

“헤…… 이스. 비켜.”

시안나의 위에 덮치듯이 올라가 있던 디트리히가 헤이스의 팔을 꽉 붙잡았다. 헤이스가 인상을 쓸 정도로 강한 악력이었다.

헤이스는 굳센 의지를 지닌 황금색 눈동자와 맞닥뜨렸다. 가주로서 내리는 명이라는 듯 한층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보통 같으면 알겠다고 대답했을 텐데.’

디트리히의 밑에 시안나가 깔린 모양새가 반항심을 부추겼다.

헤이스가 입술을 비틀었다.

“이건 괴롭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시안나 님이 더 좋아하실 수도 있고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시안나는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디트리히의 기세가 더욱 험악해졌다.

“물러나라고…… 했을 텐데? 누님이 싫어하신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새끼 고양이 같던 디트리히가 지금은 까만 표범처럼 으르렁댔다. 제 것에게 강한 소유욕을 드러내는 짐승과도 같았다.

헤이스가 이를 꽉 깨물었다.

‘좀 더 늦게 자각해 주길 바랐는데.’

지난 10년간, 헤이스는 디트리히가 시안나에게 가진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닫지 못하게 교육했다. 물건을 가지려는 소유욕이라느니, 원래 자기건 남이 손대는 게 싫다느니, 사랑이라는 감정을 교묘하게 다른 것으로 바꾸어 회피시켰다.

하지만 어떻게 얼굴 위로 매섭게 타오르는 저 불꽃을 다른 감정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제 도련님은 시안나 님을 사랑하는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다니.’

지금까지 누군가의 앞에서 제 진심을 드러낸 적이 없는 그였다.

시안나의 앞에선 친절함이란 가면을 써 다독여 주었고, 저주에 걸린 디트리히의 앞에서도 차분함을 유지했다.

그 가면이 반쯤 깨져 버리고 말았다.

큰 낭패감에 딱딱한 눈빛을 거둔 그는 침대에 한 발짝 물러선 뒤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 오해이십니다. 저는 시안나 님께서 목욕시키시는 게 힘들어 보이셔서 도와드리려 했던 것뿐입니다.”

“……목욕이라고?”

“네. 시안나 님께선 목욕하기 싫어하시는 도련님을 떼어 놓으려고 하신 것 아닙니까? 거들려 했습니다만.”

의뭉스러운 표정을 연기한 헤이스가 말꼬리를 흐렸다.

시안나는 제가 한 말도 안 되는 착각에 양 뺨을 감싸 안았다.

‘이 바보! 그럼 그렇지. 성실한 헤이스가 야릇한 일을 떠올릴 리 없잖아!’

끼어도 되겠냐고 물은 것, 세 명이 함께하자고 한 것, 그녀가 좋아할 수도 있다고 말한 것. 디트리히가 봐도 상관없다고 한 것.

샤워를 도와주려 한 행동인 듯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디트리히가 홀딱 벗고 있으니 그럴 만하지.’

그녀로서는 디트리히가 맨몸으로 침대에 올라와 있는 상황에 대한 변명을 만들어 준 셈이었다.

시안나는 내려온 동아줄을 덥석 붙잡았다.

“하하. 그래! 내가 씻겨 주려고 했어! 디트리히가 샤워를 싫어해서……. 헤이스가 대신 해 줄래?”

“네.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디트리히 님께선 시안나 님이 아니면 싫다고 하시는군요.”

남자의 몸을 씻기는 불상사가 싫은 것과 별개로, 디트리히가 헤이스를 견제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녀를 두고 헤이스에게 경계심을 내보이는 것 같았다.

디트리히가 작게 대꾸했다.

“샤워……. 이미 했…….”

“하하하. 디트리히 몸을 깨끗이 해야지. 왜 이렇게 샤워를 싫어하는 거니? 내가 책임지고 씻길 테니까, 헤이스는 걱정 붙들어 매.”

시안나가 위에 올라탄 디트리히의 입을 틀어막은 후 호언장담했다.

헤이스는 거짓말을 하려면 머리카락에 물기나 닦고 이야기하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저는 급한 일이 생각나서 이만.”

바닥에 떨어진 제복을 주운 헤이스는 황금색 단추를 차례대로 잠갔다.

상의 제복을 걸친 후, 완벽히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와 같은 모습이 된 그는 그대로 방을 나섰다.

헤이스의 모습이 사라지자 시안나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위기가 밀물 썰물처럼 쉴 새 없이 몰아치니 진이 쏙 빠졌다.

괜히 억울해진 시안나는 제 옆으로 물러난 디트리히의 볼을 양옆으로 쭉 늘렸다.

“휴……. 문을 연 사람이 헤이스이길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어. 내가 저택에서 쫓겨날 뻔한 건 아는 거니?”

“읏, 아픕니다…….”

간 떨어질 뻔한 시안나의 속도 모르고 디트리히는 그저 눈물만 찔끔거렸다.

***

“당장 공작님께 이 일을 고해서 시안나 님을 저택에 내쫓아야겠어.”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헤이스가 정신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바삐 걷는 일은 흔치 않았다. 심한 동요에 복도 기둥을 닦던 시녀의 호기심 어린 눈길이 그의 등에 들러붙었다.

“그런 실책을 범할 줄이야.”

헤이스가 손등에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가녀린 엠파이어 드레스를 입은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연둣빛 머리카락의 여성.

그 위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여성의 몸을 덮고 있는 남성.

침대 위에서 나뒹구는 두 사람을 본 순간 헤이스의 이성은 툭 끊어지고 말았다.

희고 가는 목덜미와 부러질 듯이 연약한 팔목은 분명 평소에 보아 왔던 풍경인데도 창자가 뒤틀렸다.

“전부 시안나 님 탓입니다. 그렇게 무방비하게 계시지만 않으셨어도…….”

탐스러운 붉은 입술과 발그레한 뺨을 그의 도련님이 차지한다는 생각에 눈앞이 까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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