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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20화 (20/70)

[20]

***

아침부터 시종들이 부지런히 뜨거운 물을 옮긴 덕에 발을 내디딘 상앗빛 욕실 벽엔 물방울이 몽글몽글 맺혀 있었다.

따뜻한 수증기가 목덜미를 덮치자 느껴지는 한기에 시안나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누님……. 다 입었어요. 눈…… 뜨세요.”

시안나는 항상 디트리히가 하반신을 가릴 때까지 눈을 감고 기다렸다. 상체는 몰라도 엉덩이를 보는 건 죄악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안나가 조심스레 눈꺼풀을 들었다.

“흐업!”

보기만 해도 헉, 소리가 날 정도로 잘생긴 등이 등장했다.

물에 젖은 검은 머리칼이 달라붙은 목덜미, 그 아래 툭 튀어나온 경추. 조금 더 내려가면 보이는 널따란 승모근과 도드라진 날개 뼈는 등을 섬세하게 빚은 석고상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미려한 척추를 따라 내려가니 둔부를 가린 아슬아슬한 천이 걸쳐져 있었다. 헐겁게 묶어 잘못 걷기만 해도 스르륵 내려갈 것만 같았다.

시안나의 시선을 느낀 걸까. 디트리히가 양팔을 감싸 안더니 웅얼거렸다.

“빤히, 보시면…… 부, 부끄럽습니다…….”

“등을 씻겨 주는 건데 뭐가 부끄럽니?”

“나만 벗고 있으니까…….”

디트리히의 말대로 시안나는 가벼운 엠파이어 드레스 차림 그대로였다.

그도 그럴 게 씻는 건 디트리히인데 시안나까지 벗는다면 그림이 묘하지 않은가.

‘생각해 보니까 디트리히만 벗고 있는 상황도 충분히 야릇한데?’

디트리히가 의뭉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누님……?”

“앗, 미, 미안. 얼른 비누로 빡빡 씻겨 줄게.”

야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손에 땀이 나지?

얼굴이 새빨개진 시안나가 옆에 있는 욕조에 물을 떠 디트리히의 몸에 부었다.

촤악. 꿈틀거리는 근육 위로 물이 쏟아지고 아로마 향에 휩싸인 새하얀 몸에 윤이 났다.

시안나는 비누 거품을 잔뜩 묻힌 후 예술 작품을 만지는 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어깻죽지를 문대었다.

스윽, 스윽. 미끈거리고 단단한 감촉이 손아귀에 스몄다. 손바닥이 축축한 이유가 물 때문인지 묵직한 근육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진정해. 이건 돌덩이야. 디트리히 목소리로 말하는 바위라고. 그러니까 절대 흥분하지 마.”

“제가 돌…… 같습니까?”

아무래도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 모양이다.

시안나는 괜히 딴딴한 등에 비누 거품을 빡빡 마찰시켰다.

“하하, 디트리히가 검술 연습을 한 덕분인지 등이 정말 견고한걸?”

“그거야…… 누님을 지켜야, 하니까요.”

뜻밖의 말에 시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디트리히가 부연 설명을 했다.

“아, 버지한테서……. 누님을 지키기 위해서 더 강해지고, 싶습니다. 얼른 승계를 받고…… 싶어요.”

“아……. 공작님.”

그제야 의문스러운 말이 이해가 갔다. 아무리 저주에 걸린 디트리히라지만 공작의 태도가 시안나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건 아는 모양이었다.

‘설마 매일 검술 연습을 하는 이유가 그거였어?’

그녀를 지켜 주겠다는 기특한 이유일 줄이야. 디트리히는 계속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노력을 하고 있었다.

심장이 뭉클해졌다. 그런데 난데없이 디트리히가 몸을 틀었다.

“그러니까 누님…… 떠나면 싫…….”

“잠시! 디트리히! 멈춰!”

당황한 시안나가 간발의 차로 어깨를 턱 짚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극이 심하다. 그런데 디트리히의 앞모습까지 본다면? 농담 안 하고 기절할지도 모른다.

디트리히 앞에서 코피를 흘리는 게 벌써 몇 번째야! 더 이상 그런 추태를 보일 순 없어!

“샤워할 땐 나를 돌아보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내가 눈을 뜨고 있을 땐 안 돼.”

필시 부정맥이 올 게 뻔했기에 시안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후으……. 네.”

단호한 태도에 의기소침해진 디트리히가 얌전히 고개를 돌렸다.

다시 디트리히의 목욕이 재개되었다. 뽀득뽀득 소리가 이어지고, 물을 끼얹자 거품으로 둘러싸인 디트리히의 등은 금세 말끔해졌다.

“이제 앞쪽을 씻으면 될 것 같아. 그전에 준비 좀 할게.”

시안나가 수건 옆에 걸린 얇은 천을 쥐고 스스로 눈을 가렸다.

가슴팍, 너른 어깨, 복근 등 강렬한 시각 자극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제 돌아서도 좋아.”

시안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참방참방하는 소리와 함께 디트리히가 몸을 돌렸다.

그녀의 손이 까만 머리칼에 비누 거품을 듬뿍 묻히고 시원하게 긁어내렸다. 기분이 좋은지 디트리히가 갸르릉거렸다.

“기분 좋니?”

“네에……. 하루 종일 머리만 감고 싶을 정도로…… 좋습니다…….”

피식. 작게 웃은 시안나는 머리카락 다음으로 가슴과 복부에 거품을 묻혀 주었다.

솔솔 나는 향긋한 비누 향이 코끝을 훑었다. 이윽고 물을 시원하게 들이부었다.

몇 번을 헹구었을까. 거품이 전부 씻겨 내린 후, 물에 빠진 고양이가 된 디트리히가 머리를 털었다. 물방울이 욕실 벽에 사방으로 튀었다.

목욕이 끝났기에 시안나는 가렸던 천을 풀었다.

그다음 몸을 닦아 주려 수건을 집어 드는데, 갑작스레 디트리히에 의해 팔목이 붙잡혔다.

“디트리히? 왜 그러는 거니? 물의 온도가 마침 딱 좋아서 샤워를 계속하고 싶어?”

“제가 이번엔……. 누님을 씻겨, 드리겠습니다.”

뭘 해 준다고?

시안나의 사고가 정지했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만지며 비누 거품을 묻히는 그림은 상상만으로도…… 오, 신이시여.

“좋……. 안 돼!”

“우으……. 어째서…….”

실망한 디트리히가 불만스럽게 입꼬리를 내렸지만 시안나는 단호했다.

그녀가 디트리히를 씻겨 주는 건 저주에 걸렸기 때문이라는 타당한 근거가 존재했지만, 반대의 상황은 그냥 야했다.

“항상 누님에게 도움만…… 받았으니까……. 이번엔 제가, 누님을 씻겨 드리고 싶, 습니다.”

디트리히의 눈에서 불온한 기운이 흘렀다.

불안함을 느낀 시안나가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괜찮으니까……. 아니, 다가오지 마.”

그럼에도 디트리히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그의 금안이 위험하게 반짝였다. 목줄이 풀려 통제되지 않는 짐승의 눈동자였다.

‘곤란해……. 디트리히를 피해야겠어.’

그녀가 물기 젖은 바닥을 조심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요망과 달리 퇴로는 막혀 있었다. 퇴각해 봤자 욕실이었다.

등에 닿는 딱딱한 감촉에 시안나는 흠칫 놀랐다. 퇴보하던 발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앗!”

참방!

사방으로 물이 튀며 시안나가 젖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매끈한 대리석 바닥과 부딪친 엉덩이가 불이 붙은 듯 얼얼했다.

“누님……. 괜, 찮으십니까?”

디트리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엉덩이를 매만지며 찡그렸던 눈을 들어 올렸다.

젖은 머리칼이 뺨에 달라붙은 디트리히의 얼굴이 가까웠다. 그는 그녀 위에 올라탄 자세로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안나가 헐레벌떡 고개를 저었다.

“읏, 디트리히, 저, 저리 가……. 안 돼.”

순간 디트리히의 눈썹이 아래로 내려가며 입술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를 끝까지…… 거부하시는, 겁니까?”

디트리히! 그렇게 오해 살 만한 발언은 하지 말아 줘!

어둡게 가라앉은 음성에 심장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난리였다.

그가 그녀가 피할 수 없게 고개를 더욱 내렸다. 물기로 번들거리는 터질 듯한 대흉근이 시안나의 가슴과 맞닿을 듯 가까이 다가왔다.

서로의 거리가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차이까지 붙었다.

“얌전히, 받아들이십시오…….”

시안나는 눈까지 빨개졌다.

디트리히는 지금 저 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알기나 할까? 시안나의 손목을 움켜쥐고 얼굴을 더욱 가까이 붙이자 강렬한 금안이 태양처럼 다가왔다.

시안나는 온몸이 익어 버릴 것 같아 고개를 내렸다.

그때, 시야에 가득한 수증기 너머로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어라? 저건…….’

시안나는 곧장 기절했다.

***

“누, 누님……. 죽지, 마십시오.”

몽롱한 목소리가 혼미한 정신 속을 파고들었다. 눈꺼풀 사이로 빛이 스몄다.

‘눈부셔…….’

시안나는 손등으로 눈을 가리며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사물이 구름처럼 흐리멍덩했다. 하지만 초점 잡히지 않는 시야는 조금 지나자 뚜렷해졌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얼굴을 흐린 디트리히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이마를 짚은 그녀는 디트리히가 그녀의 위에 올라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디, 트리히……?”

“누님? 괜히 씻겨 주겠다고 해서, 죄송, 합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엉덩이가 화끈거렸다.

‘마지막에 현기증과 함께 기절했던 것 같은데, 왜 그런 거지?’

분명 엄청난 걸 보고 충격받았었는데?

기절할 정도였으니 굉장한 걸 본 게 분명했다. 하지만 머리를 끙끙 싸매며 골몰해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포기한 시안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것도 요원했다. 그녀를 어깨 사이에 가둔 디트리히 때문에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디트리히의 단단한 가슴팍이 보였다. 가슴?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디트리히, 너!”

상체를 일으키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디트리히의 가슴 근육이 꿈틀거렸다. 튜닉을 끈으로 묶어 줄 때도 툭 튀어나와 건드릴 일 없도록 조심해야 했던 그 가슴.

그렇다. 디트리히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전라였다.

이러다가 위험한 걸 보고 말겠어!

화르르 전신이 타오르는 느낌에 그녀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이번엔 근육이 선명히 올라온 팔이 그녀를 반겨 주었다.

파드득 떤 시안나가 혼비백산하며 시안나가 다부진 어깨를 밀었다.

“옷 입어야지. 옷!”

“후으?”

똑똑. 설상가상으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시안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헐벗은 디트리히와 그 아래 깔린 시안나의 모습은 뭇사람들의 오해를 사기 딱 좋은 광경이었다.

‘시녀가 이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빛보다 빠른 게 소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제발 그냥 지나가 줘!

온몸이 얼어붙은 시안나와 달리 문고리는 착실하게 돌아갔다.

잠시 뒤, 방에 들어온 방문자를 본 시안나의 안색이 누군지 깨닫고 곧바로 펴졌다.

“하아, 너였어?”

주황색 머리칼에 검을 찬 남자는 다름 아닌 헤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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