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19화 (19/70)

[19]

“고마워. 그나저나 몸이 좀 더운 걸 보니 이제 그만 마셔야겠어.”

시안나가 손으로 부채질했다. 헤이스와 대화 몇 마디 나누었을 뿐인데 몸에 열이 데워진 것처럼 뜨거웠다.

그녀가 주춤주춤 앞으로 걸어나려는데, 순간 취기가 오른 탓에 발을 헛디디었다.

“읏!”

“아가씨! 괜찮습니까?”

쓰러진다!

시안나가 땅바닥과 키스를 하려는 차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아픈 곳이 없었다.

대신 손바닥에 나무 바닥이 아닌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기도 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

살며시 눈을 뜨니 그녀는 헤이스의 탄탄한 제복 가슴팍을 짚고 있었다. 당황한 시안나가 허둥지둥거렸다.

“읏, 미안! 괜찮아?”

“저는 괜찮습니다.”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헤이스의 안면이 붉었다.

술을 먹은 건 난데 왜 헤이스가 빨개?

곧 시안나는 깨달았다.

‘아. 이 자세는…….’

마치 그녀가 밑에 깔린 헤이스를 덮치는 자세였다.

“읏!”

시안나도 덩달아 귀가 붉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헤이스도 자세를 의식하는 듯했다. 뜨거운 시선이 그녀의 눈동자에 파고들더니 아래로 내려가 새하얀 목덜미에 고정되었다.

그가 침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한 와인 창고에서는 숨을 쉬는 소리조차 확성기처럼 커다랬다.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일어날…….”

순간 헤이스가 팔목을 으스러져라 잡았다. 그대로 가만히 있으라는 듯이.

그의 눈동자가 그녀의 목덜미를 따라 입술 사이를 맴돌자, 시안나는 당혹스러워졌다.

“나 얼, 얼른 가 볼게.”

시안나가 저를 붙잡는 손을 있는 힘껏 뿌리쳤다. 그녀가 잽싸게 달아나 제 방으로 달려들었다.

쿵. 문을 닫아서야 그제야 안심이 들었다. 그녀가 문에 기대었다.

“읏……. 헤이스는 왜 시뻘건 손자국이 날 정도로 붙잡은 거지?”

동시에 헤이스의 입술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피쉬쉬. 이마에서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

한편, 헤이스는 와인 창고에 홀로 남게 되었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펴길 몇 차례 반복했다. 방금 손에 쥐었던 연약한 피부를 되새기듯이.

***

쏴아아. 시안나는 곧장 와인 냄새를 지우려 샤워를 했다.

옷까지 갈아입은 뒤, 그녀는 디트리히의 방을 방문했다.

10년이 지났어도 디트리히에 곁에 그대로 있는 건 그의 전속 시녀도, 예법 선생도 아닌 오로지 그녀였다.

“으……. 누님.”

시안나가 노크하자 방문이 열렸다.

근사한 외모의 남자가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강아지처럼 버선발로 그녀를 맞이했다.

더 이상 디트리히는 시안나가 내려다보는 꼬마애가 아니었다.

시안나의 머리 하나보다 더 큰 키는 물론이요.

길고 굵어진 얼굴선과 삐죽 위로 솟아오른 눈매, 짙은 눈썹과 풍성한 속눈썹, 반듯한 코와 얇은 입술. 그는 시안나의 심장이 시도 때도 없이 내달릴 만큼 미남으로 성장했다.

‘크윽, 역시 남주!’

그가 아직 ‘후으……’ 같은 말꼬리를 붙이지만 귀공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후으……. 누님. 저 얌전히 기다렸어요. 상, 주세요…….”

디트리히가 다가올수록 묵직하게 자리 잡은 가슴 근육이 포엣 셔츠 사이로 튀어나왔다.

읏 안 돼! 더 이상 보다간 코피를 터뜨리겠어!

게다가 지적할 것도 있었다. 시안나는 화색인 디트리히를 껴안는 대신 딱밤을 때렸다.

“디트리히, 아기 말투 대신 어른스럽게 말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하는 거니?”

“흐……. 네…….”

풀이 죽은 게 불쌍해 보였기에 시안나는 검은 머리칼을 헤집어 주었다.

환한 금안이 오랜 기다림 끝에 물을 만난 사람처럼 반짝였다.

기분이 좋은지 그녀의 손바닥에 제 머리를 문질러댔다.

“좋…… 좋습니다. 누님…… 좀 더…….”

디트리히의 뺨에 붉은 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디트리히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어리광쟁이가 되다니. 게다가 나도 참 문제야. 저번엔 잘생긴 외모를 감상하느라 온종일 쓰다듬었잖아.’

시안나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손바닥을 떼어 놓곤 제멋대로 풀린 가슴팍 끈을 잡아 묶었다.

행여 포엣 셔츠 사이로 불룩 튀어나온 가슴에 손가락이 닿을까 조심해야 했다.

“또 옷 제대로 안 입었지? 가슴팍 끈을 잘 동여매야 한다고 했잖아.”

“읏, 그렇지만…… 숨이 너무 답답해. ……아니, 답답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누님.”

시안나가 노려보자 디트리히가 다시 말투를 고쳤다.

사실 이해가 갔다. 오랫동안 꾸준히 검술 연습을 한 디트리히의 몸은 웬만한 남자들보다 탄력 있고 건강했다.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디트리히는 성인이니까 이제 갑갑한 건 참을 줄 알아야 해.”

“우으……. 알겠습니다…….”

디트리히가 눈썹을 내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처연한 느낌이 날 때면 시안나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인내해야 했다.

‘귀여움, 처연미, 잘생김 다 잡으면 어쩌라는 거야!’

채근 머리 없는 주접은 넣어 두고, 시안나는 책을 여러 권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디트리히가 얼른 책상 의자에 앉았다.

디트리히가 다른 사람은 극도로 거부했기에 시안나가 그의 교양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몇 달 후면 건국제고, 이제 디트리히도 건국제에 참가해야 해. 저번 수업 때 한 이야기 기억나니?”

건국제. 소설 속에서 그녀가 죽음을 맞이하는 디트리히 독살 사건은 건국제 다음에 일어난다.

즉 원작이 임박했다는 소리였다.

디트리히의 어깨가 가련해 보일 만큼 쳐졌지만 시안나는 봐줄 수 없었다.

“중요하니까 집중해야 해. 혹여나 왕께 실례했다간 공작가가 지도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고. 자, 일단 이것부터. 이번에 새로 등극한 왕의 이름은 뭐지? 성까지 붙여서.”

“카, 비…….”

“카릴 시베너. 기억 안 나? 어릴 적 너와 검술 대결을 한 눈처럼 새하얀 머리칼을 지닌 남자아이.”

디트리히가 천장을 올려다보다 기억이 났는지 고개가 끄덕였다.

“나쁜 사람!”

황당한 대답에 시안나는 이마를 땅에 박을 뻔했다.

“설마 싶지만 왕의 면전에 대고 나쁜 사람이라고 하면 못써. 혹시 예전에 펼쳤던 검술 대결 때문에 그런 거니?”

도리도리.

“누님…… 을 보는 눈초리가…… 이상했습니다. 엄청 흥미로운…… 보석을 발견한 느낌…… 이었습니다.”

“그랬어?”

시안나가 의아해하며 당시 상황을 재생시키려 했지만, 무려 10년 전 일이다.

하얀 요정 같았다는 전체적인 인상만 떠오를 뿐, 눈빛은 블러 처리가 된 것처럼 흐릿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어쨌든 카릴 왕자님은 왕위를 이어받아 명실상부한 제1 권력자셔. 왕비님도 기억나지? 눈의 여왕처럼 새하얗던 분 말이야. 그분은 전 왕비님이 되셨어. 아차, 왕비님께선 서거하셨으니까 함부로 이야기 꺼내면 안 돼. 알겠지?”

원인 불명의 병이었다. 왕의 자리는 공석이었기에 카릴은 성인이 되자마자 바로 왕위 즉위식에 올랐다.

왕, 여왕, 카릴이 멀쩡히 살아 있던 소설과는 달랐다.

‘어째서 소설과 다른 전개가 펼쳐지는 거지? 만약 소설과 다르게 흘러간다면 카릴은 내게 독살 지시를 내릴까?’

디트리히의 침울한 목소리가 그녀를 상념에서 건져 올렸다.

“절 두고……. 다른 생각, 하시면 싫습니다…….”

어째서 잠시 딴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나라 잃은 비탄이 묻어나오는 거냐고.

“윽, 자꾸 그렇게 처연하게 쳐다보지 마. 그나저나 저번에 준 왕의 혈통 명단은 외웠니?”

시안나는 일부러 디트리히의 얼굴을 외면하며 물었다.

디트리히의 눈썹 사이가 우글쭈글해졌다. 디트리히가 책상 옆에 서 있는 시안나의 배에 툭 머리를 내렸다.

“그냥 누님이랑……. 같이 있고 싶습니다. 안 됩, 니까?”

순간 말랑말랑한 복숭아 향이 코에 훅 끼쳤다.

디트리히가 시안나의 둥근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디트리히는 울적해 보이는 모습도 얼굴에서 빛이 나는 거지?’

신기한 건 이렇게 디트리히가 날이 갈수록 응석을 부리는데도 긱스가 아무런 제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함께 식당을 갈 때도 손을 잡거나 천둥이 치는 날엔 함께 잠이 드는데도 긱스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칠 뿐 둘의 행동을 묵언했다.

‘틀림없이 그때 그 약속 때문인 게 분명해.’

10년 전 시안나에게는 비밀로 한 디트리히, 긱스 사이의 약속. 디트리히와 함께할 수 있다는 건 기뻤지만, 바닥에 뾰족 튀어나온 돌처럼 걸렸다.

“공부하기 싫은 거니? 샤, 샤워 도와줄까, 디트리히?”

으악! 나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화제를 돌리려 했을 뿐인데 더욱 코피 쏟는 상황으로 악화됐잖아.

디트리히는 심장에 좋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허리를 한껏 끌어안았다.

“흐……. 네. 저 씻겨 주세요…….”

씻어야 하는 건 자기 심장인 게 틀림없었다. 이렇게나 열심히 뜀박질 치다니, 달리기하는 사람보다 땀을 흘릴 게 분명했다.

“다음 시간부턴 제대로 공부해야 해!”

디트리히가 씻겨 달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시안나는 지난 10년간 이따금 디트리히의 목욕을 도왔다. 디트리히가 다른 여자의 손길을 거부하기도 했고, 그녀도 다른 시녀들이 디트리히를 씻기는 상상을 할 때면 기분이 불쾌해졌기 때문이다.

시녀들은 다 큰 성인 남녀가 욕실에 들어가는데도 이해한다는 입장이었다. 디트리히는 저택 내에서 돌보아야 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긱스도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목욕 건을 눈치채고 있을 터였다.

“네!”

디트리히는 꼬리를 마구 흔드는 강아지처럼 활기차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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