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18화 (18/70)

[18]

미셰리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성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에 디트리히의 저주는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시안나는 디트리히 대신 공작과 연회에 대동해 귀족 사회에 인맥을 쌓았다.

공작가의 시종인 들은 공작이 그녀를 양녀로 받아들이는 건 아닌지 수군거렸다.

“몇 번이나 말했잖니. 난 지금이면 충분하다고. 공작 자리는 줘도 안 가지니 괜히 열 내지 마렴.”

“그렇지만 저주에 걸려서 말도 제대로 못 하시는 도련님보다는…….”

“그만.”

시안나가 더는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듯 손을 들었다. 새처럼 조잘거리던 미셰리의 입이 꾹 닫혔다.

이런 주제가 나올 때마다 친구 같은 미셰리조차 불편했다.

‘휴, 오랜만에 낮술이나 할까.’

고귀한 영애처럼 입은 시안나는 머릿속으로는 전혀 우아하지 않은 생각을 떠올렸다.

***

“아침에다 빈속이니 가벼운 와인을 마셔야겠어.”

와인이 좌락 진열된 와인 선반장 앞에 서자 나무 바닥이 끼익 소리를 냈다.

햇빛 한 점 없이 서늘한 이곳은 지하 와인 창고였다.

10년 전부터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이곳에 숨은 탓일까. 이젠 그녀의 안방만큼이나 친근한 곳이었다. 공작도 와인을 잘 마시지 않으니 와인 창고에 들르는 시종들은 적었다. 아지트로 삼기에 딱이지 않는가?

삐걱. 삐걱.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큼한 포도 향이 코끝으로 퍼졌다. 와인 선반을 느리게 훑은 그녀는 화이트와인 하나를 꺼냈다.

오프너로 코르크를 따자 뿅! 경쾌한 소리가 시안나의 심장을 톡 두드렸다.

그녀는 체통도 잊고 와인을 병째 들이켰다.

“역시 이 맛이지!”

와인 창고에서 마시면 방에 와인 냄새를 빼는 걸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좋았다.

식도가 타는 것 같은 알싸함을 맛보는데, 갑자기 와인 창고의 문이 열렸다.

어둠 속에서 빛을 등진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하아……. 아침부터 낮술인 겁니까?”

기사 제복에 늠름한 체격을 한 남자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코르크 마개를 줍곤 시안나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술기운에 반쯤 눈이 감긴 시안나가 늠름한 남자를 마주했다.

짙은 눈썹과 무표정한 회색 눈동자는 10년 동안 더욱 굳건해졌고, 작은 콧대는 높아져 와인 창고에 등잔 등에 비추자 진한 음양이 드리워졌다.

남자의 키가 자란 만큼 주황색의 긴 머리카락은 이제 끈으로 묶어도 허리보다 길었고, 단정한 하얀색 제복에 칼을 찬 모습은 소년 시절 볼 수 없었던 절도가 우러났다.

헤이스는 시안나의 손에 든 와인이 반쯤 비어 있는 걸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와인 창고에 쥐새끼가 사나 봅니다. 요즘 들어 와인이 야금야금 줄어드는군요.”

“어머. 창고를 관리하는 시종은 누구지? 쥐새끼 좀 단속하라고 단단히 일러두어야겠다.”

“그 쥐는 잡기 힘들 겁니다. 아침부터 와인 냄새를 풀풀 풍기며 저택을 버젓이 활보하거든요.”

한마디도 지지 않는 헤이스에게 픽 웃어 준 시안나가 다시금 와인을 입에 털어 넣으려 했다.

하나 무위로 돌아갔다. 남자가 더 이상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가녀린 손목을 움켜쥐며 물었다.

“……요즘 많이 힘드십니까?”

헤이스의 손을 뿌리치려던 시안나는 대신 그를 지그시 응시했다. 회색 눈동자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와인 병을 커다란 오크 통 위에 올려놓은 시안나가 도리질 쳤다.

“내가 뭐가 힘들겠어. 살롱에서 사귄 영애들과 새로 연 디저트 가게를 탐방하는 것만으로도 바쁜데.”

“그러면 아침부터 와인을 입에 대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그녀가 솔직하게 말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 그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시안나가 취기가 오른 뺨을 문질렀다.

“휴, 헤이스는 못 속이겠는걸. 사실 좀 우울해. 일단 난 공작가의 양녀가 아니잖아. 그런데 요즘 들어 다들 부쩍 공작 자리 이야기를 꺼내더라고.”

미셰리든 다른 시종인이든 공작 자리를 권유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원인은 디트리히의 저주가 성년이 되고서도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치인 디트리히가 어떻게 이 넓은 공작령을 슬기롭게 다스릴 수 있겠는가.

결국 사람들의 이목은 외부인인 듯하면서도 아닌 시안나에게로 쏠렸다.

“그것뿐만이 아닐 텐데요?”

헤이스가 눈썹을 들썩이자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 그녀는 은밀한 속내를 털어놓고 말았다.

“……요즘 들어 공작님께서 성녀님을 찾아 왕국 곳곳을 들쑤시고 다닌다고 하시더라고.”

이마를 짚은 시안나의 고개가 애처롭게 꺾였다.

그녀는 소설을 읽은 덕에 여주 에르마야와 남주 디트리히가 결혼할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함께하는 10년 동안 디트리히를 향한 시안나의 마음은 나무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처음에는 단순히 최애캐가 좋다는 마음이었다. 반면 지금은 디트리히와 맺어지고 싶다는 욕망이 강해졌다.

최애캐와 한 지붕 아래에 살고 매일 함께 생활하는데 아무 감정이 들지 않는다는 게 더 이 상했다.

“아, 디트리히가 저주에서 해방되는 게 싫다는 게 아니야. 혹시 두 사람이 결혼이라도 할까 싶어서…….”

요즘 긱스는 곳곳에서 사람을 풀고 현상금을 걸어 신비한 힘을 가진 여성을 찾고 있다고 한다. 두 사람이 만나는 건 시간문제일 터다.

“게다가 공작님이랑 사이도 여전히 경직되어 있고.”

그녀는 예법도 익히고 사교계에 인맥도 쌓는 등 여러 활동을 했다.

그리하여 시종들이면 누구나 다음 차기 가주는 시안나라고 치켜세우는 자리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공작만은 그녀를 돌아봐 주지 않았다.

어릴 적 긱스의 본심 한 조각을 엿보긴 했지만, 차갑고 무뚝뚝한 건 여전했다.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친밀한 사이도 아닌 것이다.

순간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시안나의 등을 헤이스가 단단히 받치었다.

“설마 결혼까지 하시겠습니까? 그저 성력을 빌리려는 것뿐이겠요. 게다가 시안나 님께서는 디트리히 님을 놓아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같이 자라왔다지만 결혼까지 참견이라니요.”

어처구니가 없어진 헤이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시안나는 정말 디트리히를 끔찍이 아꼈다. 제삼자가 보기에 지나치다 여길 정도로.

시안나는 소설 내용으로 반박하진 않았다. 아무리 허심탄회한 사이라 하더라도 책에 빙의했다고 말한다면 허무맹랑한 소리를 한다고 여길 것이다.

“맞아. 아는데……. 사람은 불가능한 걸 더욱 아름답다고 여기나 봐.”

시안나가 흐린 시선을 떨구었다.

대체 얼마나 퍼마신 걸까. 알싸한 포도주의 향이 혀끝에서 감도는 순간 머리에 열이 오르며 취기가 확 퍼졌다.

머리를 받치는 헤이스의 어깨가 유난히 넓었다.

아, 안 돼. 일어서야지.

하지만 어질거리는 정신에 시야가 휘청이고 남자의 가슴팍을 집었다.

언젠가 승마를 하기 위해 손을 대었던 말의 등처럼 단단했다. 순간 제복에 싸인 흉부가 움찔 떨렸다.

“아, 미아…….”

몽롱한 정신머리로 고개를 든 시안나가 흠칫거렸다.

긴 속눈썹 아래 그림자가 까맣게 물든 눈동자는 위험한 기운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위협만 느낀 게 아니었다. 열기, 욕망, 끈적끈적한 것들이 칵테일처럼 섞여 다가오면 위험하다고 으름장 놓는 것 같았다.

그가 마른 입술을 열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불가능한 걸 더더욱 원하는 건 지극히 당연합니다.”

등을 받치던 커다란 손이 미끄러지더니 허리로 떨어졌다. 이내 허리가 콱 붙들렸다.

놀라서 눈을 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읏, 헤이스…….”

헤이스도 시선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까만 어둠 속. 환풍구에서 비치는 먼지가 향초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헤이스만 이 어둠에 침식된 공간에서 선명히 보였다.

달짝지근한 향이 호흡을 메움과 동시에 쿵, 쿵, 심장의 진동이 들렸다.

뛰쳐나갈 듯이 커다란 소리는 알코올 때문일까,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아니, 알코올 때문이 틀림없다. 식도를 태울 것 같던 포도주가 이번엔 심장을 불태우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 남자의 입술이 멍하게 있는 시안나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졌다.

뜨거운 숨결이 입술에 닿아서야 시안나는 혼미한 정신을 추슬렀다. 그녀가 어깨를 밀었다.

“그, 그러고 보니, 건국제가 몇 달 후지. 헤이스는 춤 상대를 정했어?”

어색한 공기에 화제를 돌렸는데, 대화 주제를 잘못 선정한 건지 헤이스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춤…… 말씀이십니까?”

헤이스는 속으로 허탈한 숨을 삼켰다.

화재가 난 나뭇가지에 불을 붙이는 격이라는 걸 그녀가 알까.

불현듯 허리를 받치던 손을 떼어 낸 그는 그녀의 앞에 기사처럼 무릎을 꿇더니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제게 시안나 님과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어?”

어두운 와인 창고에서 그의 진지한 시선과 웃음기 없는 낯을 보니 꼭 고백을 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동안 두 사람의 관계도 변했다. 헤이스는 이젠 디트리히보다 그녀의 안색을 먼저 살핀다.

한번은 디트리히가 아니라 자신의 호위 기사 같다는 말에 ‘공작님께 말씀드려 볼까요?’라고 진지하게 묻기까지 했다.

시안나가 흥, 하는 콧소리를 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헤이스 손이라도 잡으려고 줄을 선 영애가 한 바가지라던데? 내가 눈에 차겠어?”

“줄을 섰다니 가당찮습니다.”

‘헤이스 이 거짓말쟁이.’

시안나의 입술이 불퉁하게 내밀어졌다.

발루아로 가문이 어떤 가문인가.

제국에서 손꼽히는 후작가인 발루아로는 바다 건너에서 오는 진귀한 물품을 교역하며 항만 사업을 성공시켰다. 지금도 발루아로가에 아쉬운 소리를 하며 진귀한 모직물이나 향신료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아슈토르가가 원래 탄탄한 집안이라고 하면 발루아로는 떠오르는 샛별이랄까.

그 덕에 시안나의 또래 중 약혼자가 없는 영애들은 한번씩 헤이스를 입에 올렸다.

‘집안도 빵빵한 데다 한번 보면 시선을 뗄 수 없는 외모에…….’

숙녀에 대한 예법도 완벽했다. 그러니 헤이스를 보고 가끔씩 귀가 화르르 타오르는 건 희한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묘한 감정이 들 때면 선뜻 마음이 가지 않았다.

마음 한편에 있는 디트리히가 제 옷깃을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망설임이 너무 긴 탓일까. 쓴웃음을 지은 헤이스가 굽혔던 무릎을 피고 일어섰다.

“아직 건국제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찬찬히 생각해 보십시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