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몸이 노곤해짐과 동시에 시안나는 어리광부리듯이 헤이스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헤이스. 고마워.”
머릿속에서 처음 헤이스를 만났을 때 상황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시안나가 디트리히에게 친절하게 대하자 무슨 속셈이냐고 다그쳤지.
그 신경질적인 목소리의 주인이 이젠 그녀의 몸을 보듬어 주고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시안나는 너덜너덜한 몸을 좀 더 기대었다. 긴 꿈을 꾸려는 사람처럼.
“…….”
헤이스는 가만히 그녀를 안고 생각에 잠기었다.
‘……분명 시안나 님의 뺨을 때린 건, 그때의 보고 때문이겠지?’
며칠 전만 하더라도 디트리히에게 껌처럼 딱 달라붙은 시안나를 흡족하게 여기던 공작이었다.
그런데 단 며칠 새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다니. 그가 시안나와 디트리히가 너무 친근하다고 보고한 탓이 커 보였다.
그 사실을 고하면 공작이 이럴 거라는 걸, 헤이스는 진작에 눈치챘다.
‘그렇지만 뺨까지 칠 줄이야.’
헤이스는 붉게 부풀어 오른 시안나의 뺨을 속죄하듯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시안나의 마음은 아프겠지만 결과적으로 시안나가 자신에게 기대게 되었으니 잘된 일이었다.
“그럼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헤이스는 시안나의 허리를 감은 팔을 풀고 인사했다. 그는 슬쩍 화병에 꽂힌 꽃 두 송이를 의미심장하게 본 뒤 방을 나갔다.
탁. 시안나는 방에 홀로 남게 되었다.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고스란히 남아 그녀의 몸을 움찔움찔 떨리게 만들었다.
“앗, 그러고 보니 디트리히에게도 할 말이 있었잖아.”
그녀는 협탁 위에서 촛농을 뚝뚝 흘리는 촛불을 후, 불었다. 그녀는 아침에 디트리히를 만나겠다고 결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
시안나는 사과하기 위해 디트리히의 방 앞에 섰다. 긱스에게 뺨을 맞은 일을 괜히 디트리히에게 풀어 버려 마음이 가시방석이었다.
시안나가 똑똑 방문을 두드렸다.
“디트리히. 잠시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잠시 뒤, 우당탕거리는 소음이 들리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
“시, 시안나…… 누님!”
뺨에 든 복숭아 물은 여전했지만, 전체적으로 핼쑥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디트리히가 그녀에게 매달렸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그렁그렁한 눈물을 매단 채.
“누님…… 잘못, 했어요. 누님이 있으면 토끼 인형…… 필요 없어요. 아빠도…… 미안.”
디트리히는 어제 상황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디트리히는 어제 어째서 그녀가 뺨을 맞은 건지, 왜 화를 낸 건지 필사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토끼 인형 때문에 울어서 버림받은 건 아닐까. 그런 결론을 내렸겠지.
‘이런 아이에게 화를 내다니. 나는 정말 쓰레기야.’
마음 한구석이 격통에 시달렸다.
시안나가 반쯤 무릎을 꿇고 디트리히의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어제 일은 내 탓이야. 디트리히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갑작스러운 포옹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도 잠시, 디트리히도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온기를 갈구하듯 품에 파고든 디트리히가 쉰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흑, 하지만……. 토끼 때문에 누님, 화났잖아. 날 떠나갔잖아. 소중하다고…… 했는데.”
고사리 같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상처와 원망이 담긴 대답에 시안나는 목이 메었다.
어제 거부당한 디트리히가 문이 부서질 듯이 쳐 대며 지르던 외침이 귓가에 맴돌았다.
‘후으……. 누님, 버리지 말아 주세요.’
어떻게 이런 애에게 제멋대로라고 비난을 퍼부었을까. 죄책감에 허우적거리던 시안나는 제 양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더는 디트리히를 울리지 말아야지.
시안나는 엉겨 붙는 디트리히를 떼어놓고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디트리히. 약속할게. 난 절대로 널 떠나지 않아.”
“흐……. 정말?”
“응. 약속.”
금빛 시선이 새끼손가락에 머물렀다.
울음을 그친 디트리히는 제 새끼손가락을 단단하게 건 뒤 작은 입을 오물거렸다.
“절대, 떠나지 마세요. 곁에서, 사라지면…… 싫어.”
“당연하지. 난 평생 디트리히와 같이 있을 거니까.”
시안나가 새끼손가락에 힘을 주자 눈물 젖은 속눈썹이 둥글게 휘었다. 꼭 비 온 뒤에 무지개가 맺힌 것처럼 얼굴이 활짝 개었다.
“토끼 인형은 어디 있어? 흉물스럽게 귀가 다 뜯겼으니까 예쁘게 꿰매 줄게.”
그녀는 실밥이 다 터진 인형을 고쳐 줄 생각으로 실과 바늘을 챙겼다. 그런데 방을 요리조리 살펴도 토끼 인형은 숨바꼭질하는 듯 보이지 않았다.
“이제, 토끼 인형은…… 필요 없어요.”
“뭐?”
시안나는 제가 잘못들은 줄로만 알았다.
토끼 인형은 전 공작 부인이 남긴 소중한 유품이었다. 그런 토끼 인형을 흥미가 식은 목소리로 쓸모가 없다고 말하다니.
설마 귀가 뜯어졌다고 싫증이라도 나 버린 걸까.
“그래도 공작 부인의 마지막 유품인데 가지고 다니는 편이…….”
“누님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지만, 디트리히는 천사 같은 얼굴로 헤실거리고 있었다.
“후으…… 약, 속했어요. 떠나지 않는다고…… 절대.”
디트리히가 시안나의 허리를 다시 한번 안았다.
순금을 들이부은 것 같은 눈동자가 찬란하게 빛났다.
***
그날 저녁. 식사 시간은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아무리 공작이 사과했다지만 시안나도 응어리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고, 원체 살가운 대화가 오가지 않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래서 시안나도 말없이 빵을 우물우물 씹었다. 빵은 식사 자리만큼 딱딱했다.
그런데 옆에서 시안나를 빤히 응시하던 디트리히가 제 볼을 톡톡 두드렸다. 그녀를 줄곧 주시한 모양이었다.
“누님…… 볼에, 부스러기…….”
“뺨에 빵조각이 묻었어? 알려 줘서 고마워.”
“내가, 할래.”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디트리히의 입이 시안나의 뺨에 닿았다. 순간 디트리히에게 가벼운 뽀뽀를 받았을 때 경직된 긱스가 떠올랐다.
‘안 돼! 또 공작한테 한 소리 들을 거야!’
역시나 그 광경을 지켜본 긱스가 들었던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디트리히. 시안나에게…….”
“약속!”
디트리히가 또렷한 눈동자로 긱스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약속이라니? 충분히 어리둥절한데 더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긱스의 무표정한 낯이 쩍, 하고 어긋나더니 성대한 한숨을 내쉬곤 한발 물러서는 게 아닌가?
“……알았다.”
긱스의 찌를 듯한 시선이 두 사람에게서 거두어졌다. 그리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식사가 재개되었다.
시안나가 어리둥절해하며 입을 벙긋거렸다.
‘볼에 뽀뽀를 받는 걸 그냥 넘어간 거야? 겨우 디트리히의 말 가지고?’
카릴과의 검술 대결에서 승리한 대가로 뽀뽀를 받았을 때와 극명히 대비되었다.
설마 절벽에서 디트리히를 구했던 일 때문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디트리히가 말한 ‘약속’이라는 단어가 걸렸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헤실헤실한 웃음을 띤 디트리히가 시안나의 팔을 콕콕 찔렀다.
칭찬해 달라는 듯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건 덤이었다.
“후으……. 누님.”
시안나가 디트리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공작님과 무슨 약속을 한 거야?”
“후으……. 비밀…….”
디트리히가 입 위로 손가락 하나를 올렸다. 쩝. 아무래도 공작이 약속에 대해 단단히 엄포를 놓은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건 절벽에서 디트리히에게 몸을 날린 덕분에 긱스에게도 신뢰를 얻은 듯했다.
이대로라면 죽을 위험에서 벗어난 게 틀림없겠지?
시안나는 그녀의 죽음에 관련된 디트리히, 긱스, 헤이스 세 사람의 마음을 무사히 얻을 수 있었다.
이제 원작 소설대로 진행이 되는지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시안나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디트리히의 결이 고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
공작가 정원 꽃밭 중앙에는 선대 공작이 어렸을 적부터 함께한 갈참나무가 존재한다. 하늘 높이 치솟은 가지에 두꺼운 지름을 보고 있노라면 거대한 거인이 어깨를 떡하니 핀 것만 같았다.
어른 스무 명은 족히 그늘에 쉬어 갈 정도로 광대한 갈참나무가 몇 년을 옷을 갈아입었다.
당연하게도 시안나 또한 성장했다.
10년이란 세월은 누군가에겐 길고 누군가에겐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사람 간의 관계가 변하고 마음이 변하기엔 충분했다.
“아가씨. 요즘 들어 미모에 물이 오르신 것 같아요.”
“어머? 아부하는 거야?”
“솔직한 본심이라고요!”
하하하!
시안나의 허리에 단단히 페티코트를 조이며 발끈하는 미셰리에 시안나는 유쾌하게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미셰리는 그녀가 어릴 적 배정받은 전속 시녀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붙어 다닌 친구가 있다면 미셰리와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그럼 미셰리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볼까?”
시안나는 전신 거울에 비친 겹겹이 쌓인 눈 같은 페티코트를 가늠하듯 한 바퀴 빙 돌았다.
10년 동안 그녀의 몸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작은 코는 길고 오뚝해졌고, 귀엽게 느껴졌던 커다란 눈은 풍성한 속눈썹과 함께 까만 보석으로 변모했다.
하얀색 브래지어가 받치는 가슴도 한 손에 쥐어지지 않을 정도로 제법 풍만했고, 연두색 곱슬 머리카락은 잘록한 허리까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나 감탄할 만한 우아함을 뽐내는 귀족 영애의 표본이었다.
“어머. 농담이라면서 그렇게 거울을 빤히 보시면 어쩌자는 거예요.”
“하하.”
그녀는 미셰리가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집어넣자 팔을 올리며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그녀도 엑스트라인 시안나가 훌륭한 귀족 영애로 성장할 줄은 몰랐다. 소위 나올 때 나오고 들어갈 때 들어간 모델 같은 몸이었다.
‘물론 가장 예쁜 건 여주 에르마야지만.’
소설 속에서 여주의 외모 찬양은 시시때때로 나왔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외모라느니, 모두가 돌아볼 만큼 아름답다느니.
딱히 심술은 나지 않았다.
엑스트라인데다 남주를 괴롭히는 역인데 이 정도만으로도 감지덕지지!
이윽고 미셰리의 능수능란한 솜씨에 캐미솔이 입혀지고 스커트까지 착용되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10년이란 시간은 그녀를 아무것도 모르는 빙의자에서 어엿한 귀족 영애로 만들었다.
이제 왕국의 기원은 술술 읊었고 왕실의 지리, 주변 제국과의 관계 등……. 이 세계의 정치, 경제는 머릿속에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가 대견하다 여기며 폭포수 같은 머리를 땋는 미셰리의 손길을 익숙하게 받아 냈다.
“그나저나 공작님께선 언제쯤 시안나 님을 차기 공작으로 인정하려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