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긱스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시안나를 모질게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긴 했다.
“아.”
가족…….
긱스의 입에서 절대 나올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단어가 흘러나왔다.
디트리히를 편애하면서도 그녀가 가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걸까.
그래도 진심인 듯했다. 목숨을 바쳐 타인을 구한다면 그게 가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긱스는 시안나가 벙찐 모습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듯했다. 어린아이에게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며 후회하는 기색이었다.
“……아까 정원에서 있었던 일은, 미안하다.”
시안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긱스에게서 사과를 듣는 날이 올 줄이야.
그녀의 행동이 그의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를 움직인 듯했다. 놀란 시안나의 입이 닫힐 줄 모를 때였다.
“우…….”
“앗. 디트리히! 괜찮니?”
시안나의 품에 웅크려 있던 디트리히가 머리를 붕붕 털곤 빠끔히 얼굴을 내밀었다. 시안나가 디트리히의 통통한 뺨을 붙잡고 요리조리 살폈다.
바람에 머리가 뒤집힌 것 말곤 멀쩡해 보였다.
디트리히를 일으켜 세우며 같이 일어선 시안나는 발치가 간지러운 것을 느꼈다.
“아……. 사람이 다니지 않아 울창해진 풀이 완충 작용을 한 건가?”
하지만 그녀의 가설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절벽 꼭대기는 뛰어내리면 머리통이 토마토처럼 으깨질 정도로 멀었다. 뼈가 부서져야 정상인 위치였다.
어째서 긱스는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인 거지?
“후으, 누님 죄송해요……. 나 때문에…… 누님이…….”
울상을 지은 디트리히가 무릎을 꿇고 시안나의 드레스 아래로 짐승이 할퀸 것 같은 붉은 생채기를 닦았다. 나뭇가지에 다리가 긁힌 모양이었다.
자신 때문에 다쳤다는 미안함이 물씬 풍겼다.
“디트리히도 엉망이잖아.”
어째서 이런 아이에게 화를 냈던 걸까? 시안나는 스스로가 이상했다고 자조하며 손수건으로 젖은 속눈썹을 닦아 주었다.
그때 갑자기 디트리히가 손을 들어 올렸다. 손에는 리시안서스가 산들거리고 있었다.
이 모든 건 그녀에게 꽃을 주기 위해 벌어진 소동이었다.
“디트리…….”
“도련님! 공작님! 시안나 님!”
헤이스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다급히 뛰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디트리히를 무사히 찾을 수 있었다.
약간의 의문은 남겨 놓은 채,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
디트리히도 안정이 필요했고 시안나도 몹시 지친 기분이라 각자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침대에 누웠다.
다행히 긱스는 산속에 들어간 일을 꾸짖지 않았다. 디트리히도 무사히 찾았으니 잘 마무리된 거겠지?
분명 다친 곳은 없는데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는 심리적인 부담감 때문일까. 촛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려는데 등이 욱신거렸다.
똑똑.
등을 주무르며 눈물을 삼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저택 시종인은 전부 잠자리에 들 시간인데, 누구지?
“들어와.”
시안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끼익 문이 열렸다.
기껏해야 하녀일 줄 알았는데,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헤이스였다.
헤이스가 자신을 직접 방문할 정도로 두 사람은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다.
시안나는 놀란 나머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어, 응……. 그런데 늦은 밤에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거야?”
헤이스는 시안나가 디트리히에게 해코지하지 않는지 경계해 왔다. 그런데 저런 걱정 가득한 눈빛은 무어란 말인가.
‘절벽에서 떨어진 뒤 마주쳤을 때 낯빛이 심상치 않긴 했지……. 설마 미안한 감정이라도 드는 거야?’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데, 침대에 다가온 헤이스가 돌연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거대한 함성 같은 사과가 귓가에 꽂혔다.
죄송해? 무엇을?
시안나가 어리둥절해하자 헤이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제가 당신께 무례하게 대한 것 말입니다.”
시안나는 한 대 맞은 듯 머리가 띵해졌다.
눈만 마주쳐도 비꼬던 헤이스가 사과한다고? 장난인가 싶어 표정을 살폈지만, 농이 아닌 듯 웃음기조차 찾을 수 없었다.
“……답지 않게 왜 그러는 거야. 혹시 죽을 때라도 된 건가.”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곧 죽을 때라고 합니다.’
예전에 헤이스가 한 말이었다. 되돌려 받는 기분이 어때?
그녀의 뾰족한 대꾸에 그의 고개가 들렸다.
주황색 머리카락 아래 얼굴이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듯 왈칵 일그러져 있었다. 그가 꾹 다물린 입을 움직였다.
“아가씨께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처음엔 아가씨께서 공작 자리를 노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습니다. 발을 건 일도 악의적으로 행한 일이라 여겼고요.”
뜨끔. 디트리히의 발을 걸었다는 건 그녀가 빙의하기 전의 일이었으니 헤이스의 직감이 맞았다.
그래도 빙의한 이상 상관없는 일이니 꼬집어 줄 필요는 없겠지.
시안나는 짐짓 모른 체하며 계속 경청했다.
“시안나 님께서 디트리히 님을 동생처럼 느낀다고 하신 것도 그냥 하시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목숨을 걸면서까지 구하실 줄 몰랐습니다.”
그는 눈앞에 있는 소녀에게 경외감을 느꼈다.
그가 디트리히를 구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하더라도 절벽으로 선뜻 몸을 내던질 수 있느냐 하면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디트리히를 보호해야 하는 호위 기사임에도 말이다.
그래서 시안나가 한 무모한 일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뒤늦게 달려온 뒤, 소녀의 다리에 아가리를 벌린 붉은 상처를 본 순간 얄팍한 선입견을 품은 저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녀가 디트리히를 생각하는 마음에 거짓은 없던 셈이니까.
“아가씨께 보인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헤이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기분이 좋은데?’
꼬박꼬박 의심의 눈길을 보내던 헤이스가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머리를 조아리니 속이 후련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넓은 아량을 베푼다는 듯 가슴을 폈다.
“난 디트리히를 돌볼 목적으로 아슈토르 공작가에 온 거였으니 헤이스가 예민했던 거 이해해. 우리 서로 지금까지 오해했던 건 전부 퉁 치고, 없던 일로 해.”
시안나가 눈을 찡긋거리는 데 반해 헤이스의 얼굴이 무서울 만치 굳어졌다.
“……알고 계셨습니까? 시안나 님이 오신 이유가 디트리히 님 때문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지. 공작님께서 저렇게 티를 내시는데.”
반쯤 찍은 거였는데 그런 거였나! 하지만 짐작했던 일이라 그리 충격은 크지 않았다.
여상하게 말하는 시안나의 태도에 헤이스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필요에 의해 오게 된 거라는 걸 알고 계셨어. 그런데도 어떻게 태연한 거지?’
눈앞에 있는 여자아이는 저보다 세 살 어린 소녀였다.
부모님을 전부 여위고 몸만 공작가로 온 아이. 그런 아이가 스스로가 이용당하고 있다고 의연하게 말하다니.
어린아이인 외양 안에 단단한 돌이 들어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느낀 순간, 생경한 감각과 동시에 헤이스의 심장에 납덩이가 쿵, 내려앉았다.
그가 일생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어째서 이런 소녀를 삐딱하게 바라봤던 걸까. 심사가 단단히 꼬인 게 틀림없었다.
헤이스는 그녀에게 가졌던 편견이 단번에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복도에서 부딪쳤던 시안나의 울음에 젖은 얼굴이 떠올랐다.
바보같이, 아무렇지 않을 리 없잖아. 분명 속은 곪아 있을 테지.
저보다 꼬맹이인 주제에 상처받지 않은 척 씩씩하게 구는 게 심장이 저려 왔다.
헤이스는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거리다 진지하게 말했다.
“청할 것이 있습니다.”
“무슨?”
“무리하지 마시고, 다치지 말아 주십시오.”
그의 진심이었다.
그의 주인은 긱스 공작님과 디트리히 도련님밖에 없다고 여겼다.
완전한 오판이었다. 오늘 일로 공작 저에 살고 있지만, 외부인이라고 여겼던 그녀에게 마음의 짐을 지게 되었다.
“위험한 일은 저에게 시키시면 됩니다.”
그가 눈을 내리깔고 주머니에서 붕대를 꺼내는 모습을 어스름한 촛불이 그려 주었다. 소년이 능숙하게 소녀의 다리에 붕대를 돌돌 말았다.
익숙한 손길에 시안나는 새삼 그가 연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가까이서 내려다보니 각이 진 어깨, 굵은 목젖은 어른에 가까운 소년이었다.
붕대를 전부 감은 헤이스가 자리에서 일어서서야 시안나는 질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헤이스가 기사란 이유로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어.”
“도련님을 지키는 게 제 일입니다. 당연히 시안나 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제게 기대어 주십시오.”
심장이 목소리를 낸다면 이와 비슷한 음성일까. 따뜻했다.
마음을 녹이는 것 같은 목소리, 결연하게 빛나는 잿빛 눈동자. 마음속에서 몽실몽실한 감각이 솟아올라 뻣뻣한 등이 느슨해졌다.
“헤이스는 왜 그렇게까지…….”
날 신경 써 주는 거야?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헤이스가 당혹스러웠다.
그 순간 서로의 시선이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엉키고 두 사람의 호흡이 멈추었다.
각자의 고민과 떨림과 망설임이 손에 잡힐 듯이 뚜렷해졌다.
조금 놀란 듯한 헤이스는 다시 차분한 눈길로 시안나를 더듬거렸다. 물기가 가시지 않은 까만 눈동자는 진주알처럼 빛났고 상기된 뺨 위의 자국은 가슴이 미어질 만큼 새빨갰다.
눈앞에 있는 소녀는 보호 본능을 지나치게 자극했다.
그는 제 감정을 바닥끝까지 모조리 파악했다. 강렬한 욕망도.
쉽사리 드러냈다가 눈앞에 작은 포획물이 몸을 떨며 도망갈지도 모르기에, 그는 제 속내를 숨기며 대답했다.
“제게는 아픈 형이 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당신을 보고 있으면 가슴 한구석이 무너지는 것처럼 안쓰럽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중에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그것보다…….”
헤이스가 어깨에 손을 올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시안나 님께서 힘드실 때마다 제게 털어놔 주십시오. 아픔을 함께 짊어지고 싶습니다.”
시안나는 헤이스의 진심이 궁금해졌다. 공
작보다 자신을 더 신뢰한다고 믿어도 되는 걸까?
헤이스를 완전히 믿진 않았지만 지치기도 했다.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손길에 시안나는 모든 걸 헤이스에게 맡기고 싶어졌다.
어른처럼 성숙한 소년이 시안나에게 팔을 뻗었다. 그녀의 가는 몸을 감싸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누군가의 위로만으로도 몸 온도가 올라간다는 걸 시안나는 처음 깨달았다.
쿵쿵.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에 휩싸인 두 사람의 체온이 급속도로 뜨거워졌다. 디트리히를 제외하고 처음 받은 온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