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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15화 (15/70)

[15]

멀찍이 두 사람을 지켜만 보고 있던 시녀들이 디트리히를 말렸다.

“도련님. 방에 모셔다드릴게요.”

“싫어! 시안나 누님. 잘못했어. 나 앞으로 누님 말 더 잘 들을 테니까, 제발…….”

“도련님. 한숨 코, 하시면 만나 주실 거예요.”

“시안나…… 누님. 소중해, 소중해!”

며칠 전 시안나에게 디트리히가 했던 말이었다. 필사적으로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 안간힘 쓰는 게 눈에 선했다.

“분명 내일이면 화를 푸실 거예요.”

문고리를 움켜쥐며 뼈 튕기는 디트리히에도 시녀는 기어코 손가락을 곱게 펴 준 뒤 어깨에 둘러업었다.

고용인들에게 끌려가는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형체 없이 사라졌다.

“드디어 간 건가. 하아…….”

혼자 남게 되자 자괴감이 몰려들었다.

방금 그녀가 한 짓은 꼬집거나 비웃지 않았을 뿐이지 디트리히가 화를 내지 못하는 걸 이용해 제멋대로 감정을 휘두른 비열한 짓이나 다름없었다.

원작 시안나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어쨌건 그녀에겐 휴식이 필요했다. 많은 일이 있던 탓인지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녀는 침대에 느릿느릿 기어가 누비이불을 덮었다.

고단했는지 베개에 머리를 붙이자마자 수마가 그녀를 덮쳤다.

***

디트리히는 결국 시녀들에 의해 강제로 제 방에 구겨 넣어졌다. 하지만 디트리히의 곡소리는 도무지 그칠 줄 몰랐다.

“끅, 흑, 으윽.”

침대에 누워 방이 떠나가라 울고 있는데, 방문이 스르륵 열렸다. 디트리히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끅, 아…… 버지……?”

방에 들어온 긱스를 디트리히가 원망이 박힌 눈으로 힐난했다.

침대에 내려온 디트리히는 긱스에게 쪼르르 다가가더니 말아 쥔 주먹으로 팡팡 때렸다.

“윽, 아버, 지. 흑, 누님. 때리고, 미워!”

“진정해라. 내가 울어도 된다고 허락했느냐?”

긱스가 다그쳤지만 울음은 잦아들기는커녕 점점 커졌다. 새빨간 코를 본 긱스는 무릎을 꿇고 엉엉 우는 디트리히와 눈을 맞추었다.

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달랬다.

“네가 한 가지 약조를 한다면 다시는 시안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으마.”

“누님……. 안 괴롭혀?”

그가 가볍게 머리칼을 헤집자 디트리히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래. 내 말대로 한다면 너와 시안나 사이에 일절 간섭을 하지 않겠다.”

“약속! 약, 속할래!”

시안나의 환한 얼굴을 떠올린 디트리히가 상기된 목소리로 긱스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굳어 있던 긱스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

쾅쾅쾅!

어느 순간 까무룩 잠이 든 건가. 잠잘 때만 하더라도 쪽빛이었던 하늘에 붉은 물감이 왕창 녹아들어 있었다.

붉은빛이 그녀의 침대 위를 덮었다.

쾅쾅쾅! 또다시 문이 부서지라 쳐 대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이렇게 문을 때려 부수려는 거야?

시계 알람처럼 고약한 소리에 시안나는 어쩔 수 없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가 기지개를 켜곤 허락을 내렸다.

“들어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녀가 부리나케 침대로 달려왔다.

“시, 시안나 님! 도련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비몽사몽인 와중 졸음이 확 달아났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시녀가 자초지종을 늘어놓았다.

디트리히는 시안나에게 거부당하고 나서 방을 호수로 만들어 버릴 기세로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울음이 점차 잦아들었고 완전히 그쳤기에 시녀들은 전부 끝난 줄 알고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그 뒤로 간식을 들고 들어갔지만 디트리히의 자취는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한다.

“흑, 놀이방과 정원을 둘러보았지만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시안나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행방불명이라는 거야? 나도 당장 디트리히를 찾아보겠어.”

시안나는 재빨리 복도를 지나 저택 현관문을 열었다.

그새 소식이 퍼졌는지 하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분수대 근처로 다가가자 긱스의 살벌한 외침이 들렸다.

“몸집이 작은 어린아이다. 개미 소굴만 한 틈이라도 주의 깊게 훑어!”

꼭 마른하늘에 벼락이라도 치는 듯한 목소리였다.

시안나는 손찌검한 긱스에게 말을 걸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엔 한 수 접고 들어가기로 했다. 디트리히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시안나는 무시무시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긱스에게 다가갔다.

“공작님. 디트리히가 어디로 갔는지 제게 짐작 가는 구석이 있습니다.”

진지한 눈매로 시안나를 내려다보는 긱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뒷산에 디트리히와 발을 들인 건가? 분명 멀리 가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근신은 디트리히를 찾은 뒤 달게 받을게요.”

자꾸만 시안나와 긱스 두 사람의 사이는 악화되어만 갔다.

긱스와 시안나, 그리고 헤이스까지. 세 사람은 공작가 정원과 이어진 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시안나가 후문과 이어진 산에 갔다는 근거는 그저 예감이었다.

디트리히는 그녀가 어떻게 해야 화를 풀지 곰곰이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다 하얀 꽃에까지 생각이 미치고 그 절벽으로 향했을 게 틀림없었다.

자연스레 꽃을 주자 그녀가 웃었던 걸 기억해 냈을 것이다. 그래서 꽃을 꺾으러 뒷산에 올랐겠지.

저택 어디에도 없었으니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다만 무작정 걸었던 터라 절벽이 있는 곳이 정확히 어느 위치인지 알 수 없어 당시 시안나와 디트리히를 발견했던 헤이스와 동행해야 했다.

시안나는 옆에 있는 긱스를 흘겨보았다.

‘죄책감 따위 없는 얼굴…….’

자신의 뺨을 친 남자는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이 손톱만치도 없어 보였다. 괜히 서러워져 코가 메워졌다.

그때 헤이스가 북서쪽을 가르치며 소리쳤다.

“저길 보십시오!”

시안나와 긱스의 고개가 일제히 손가락이 가르치는 곳으로 돌아갔다.

절벽에서 몸을 기울인 디트리히가 누가 일부로 심은 것처럼 벼랑에 아슬아슬 핀 꽃을 따려 팔을 쭉 뻗고 있었다.

시안나의 시선이 하얀 꽃에 머물렀다.

역시 디트리히는 꽃을 따려 산에 들어간 거였구나.

여주 에르마야와 이어 주려 한 일이 디트리히를 곤경에 빠뜨리다니, 심장이 그물에 걸린 듯 죄어 왔다.

“위험합니다!”

헤이스의 다급한 고함이 하늘을 갈랐다.

디트리히에게 외치는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무의식적으로 달리고 있는 시안나를 향한 것이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간다는 게 이런 걸까. 어디서 힘이 났는지 제 다리가 벌새처럼 날래게 움직였다.

그때, 마치 물러나라는 듯이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 짚었다.

긱스였다. 어른인 긱스는 시안나를 잽싸게 따라잡았다.

“절벽이라 위험해! 내게 맡기고 물러나!”

누가 할 소릴! 그러다 불현듯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여기서 디트리히를 구해 낸다면 헤이스, 긱스 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도.

하지만 일분일초를 다투는 시간 속에 계산은 빠르게 지워졌다. 디트리히의 조그마한 등이 열 걸음 남짓 남았다.

“하아, 하아, 디트리히!”

“으?”

앙증맞은 손이 꽃을 꺾으려는 순간, 시안나의 목소리에 디트리히가 등을 돌렸다.

누님이 이쪽을 향해 열심히 뛰어오며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디트리히는 다투었던 걸 떠올리고는 울상을 지었다. 얼른 꽃을 주고 다시 한 번 더 환한 미소를 보고 싶었다.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도 모른 채 디트리히가 꽃에 손을 뻗었다.

디트리히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지고 몸이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시안나가 손을 저으며 말렸다.

“디트리히! 꽃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물러나!”

시안나의 외침이 무색하게도 디트리히의 손이 꽃줄기를 휙 꺾었다. 그와 동시에 몸도 앞으로 크게 기울었다.

“디트리히!”

갸우뚱해진 디트리히의 몸은 반쯤은 허공이었다.

떨어진다!

손을 뻗으면 등에 닿을 것 같기도 했다. 이를 꽉 깨문 시안나가 발뒤꿈치에 힘을 주고 절벽에 몸을 날렸다.

그 순간, 옆에서 기다란 팔이 튀어나오더니 떨어지는 디트리히의 손을 콱 붙들었다.

‘아, 맞다. 긱스도 뒤따라오고 있었지.’

시안나는 긱스와 디트리히의 맞잡은 손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절벽에서 떨어지더라도 디트리히는 무사할 것이다.

한편으론 자신의 안위에 관한 걱정이 들었다.

자신은 뛸 필요가 없었다. 손을 뻗었더라도 이런 어린아이의 짧고 통통한 팔로는 디트리히를 구하는 게 불가능했다.

결국 그녀가 한 행동은 의미 없는 것이었다.

그 순간, 눈앞에서 번쩍하는 어둠이 터졌다.

시안나는 그대로 추락했다.

“으아아아악!”

콰앙!

엄청난 굉음이 잠자고 있던 숲을 울렸다. 나뭇가지에 걸쳐 있던 까마귀 떼가 까악, 거리며 노을 속으로 사라졌다.

시안나가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곧 죽는다는 공포, 발이 닿을 곳 없이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감각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곧 지면과 부딪쳐 뼈가 깨진 고통이 그녀를 잡아먹을 것이다.

“으음?”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몸이 부서지는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단단한 무언가에 둘러싸여 따뜻하고 편안했다.

시안나의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고개를 올리니 고통에 찬 긱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디트리히와 함께 남자의 품에 안긴 상태였다.

시안나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설마 긱스는 디트리히의 손을 붙잡은 뒤 그녀까지 구했단 말인가? 자신은 구할 필요가 없을 텐데, 어째서?

남자와 눈동자가 맞부딪쳤다. 그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낯으로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꼬맹이가 절벽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하다니……. 그 무시무시한 발상은 어디서 나온 거지?”

“그야…… 디트리히가 위험하니까…….”

시안나는 입술에 힘을 주려 애썼지만, 자꾸만 나오지 못하는 물음이 입가에 헛헛해 맴돌았다.

왜 절 구한 거예요? 디트리히가 없으면 전 아무것도 아닌 거 아니었어요?

시안나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알아차린 긱스가 픽, 하며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표정에 다 드러나는군. 자기에게 관심도 없는 냉혈한이 왜 목숨을 구해 주는지…….”

아니. 그건 너무 순화시킨 거고요.

바늘에 찔려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인간이 왜 구해 준 것인지 궁금한 거예요.

긱스가 상반신을 일으키곤 흙이 묻은 검은색 제복을 탈탈 털고서야 입을 뗐다.

“내게 가장 소중한 건 디트리히다. 그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시안나 네 목숨을 걸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너는…….”

긱스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어쨌건 아슈토르 공작가에 온 이상, 가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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