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겁에 질린 엘리네가 양팔을 감싸 쥐며 부들거렸다. 로이스네카 백작이 마귀처럼 저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빛이 무슨 얼간이 같은 소동이냐고 다그쳤다.
‘또 집에서 맞고 감금당하고 굶는 거야?’
그건 싫어!
잔인한 현실이 들이닥치자 엘리네는 회피 본능이 발동했다. 그녀는 저처럼 약해 보이는 시안나에게 화살을 돌렸다.
“제가 그런 거 아니에요! 시안나 공녀가 다짜고짜 공자를 밀치더니……!”
실밥이 터져 나온 토끼 인형. 엘리네가 쥐고 있는 토끼 귀.
어떻게 된 일인지 긱스의 눈에 대번에 그려졌다.
소녀가 토끼 인형을 탐낸 모양이었다. 불운하게도 그 토끼 인형은 디트리히가 가장 아끼는 것인 데다 공작 부인의 유품이었다.
모든 걸 이해한 긱스가 시안나 앞에 섰다. 사실이 어떻든 그는 시안나를 혼낼 심산이었다.
“디트리히를 해코지했다는 게 사실이냐? 네게 실망이 크구나.”
공작이 밑도 끝도 없이 그녀를 의심하자 시안나는 심장이 푹 꺼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니에요! 제가 그런 게 아니라 엘리네 영애가!”
찰싹!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뺨을 때리는 매서운 소음이 정원을 갈랐다.
시안나의 고개가 돌아갔다. 어째서 뺨에 화끈한 통증이 번지는지 몰라 눈만 깜빡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설마 나 맞은 거야?
덜덜 떨리는 손이 손자국이 난 뺨을 감싸 쥐었다. 따끔거리자 그제야 뺨을 맞았다는 게 실감 났다.
머리가 굳어 버린 듯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만 눈앞에 자신을 딱딱하게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미치도록 선명했다.
“변명 따위 필요 없다.”
분노를 품은 음성은 조용했지만 시안나의 가슴을 묵직하게 때렸다. 그녀가 마른 신음을 흘렸다.
‘하하……. 저 여자애의 말을 그대로 믿는 거야? 정말 나에 대한 신뢰라곤 눈곱만큼도 없구나.’
새삼스레 실망할 일도 아니다. 공작이 디트리히만 챙기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 거 한 달 동안 잘 깨닫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째서 가슴이 종이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는 기분일까.
고개가 돌아간 곳에 금붕어처럼 벙찐 엘리네가 보였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거짓말한 상대에게 동정을 받다니, 스스로가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놓인 건지 깨달았다.
속에서 울컥 뜨거운 감정이 솟아올랐다.
“자숙할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구나. 그만 네 방으로 돌아가.”
함께 사는 저보다 다른 사람을 믿는 태도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시안나가 긱스를 향해 눈을 홉떴다.
“제 말을 들어 보지도 않으시는군요…….”
기운 없는 어조에도 공작의 석고처럼 굳은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냉기가 흐르는 회색 눈동자에 시안나의 마음은 더욱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공작의 명이 없더라도 디트리히와 보내는 시간이 행복했다. 이제는 그녀의 손을 보고 무서워하지 않는 것도 좋았고, 아기 새처럼 받아먹기만 하다 그녀를 챙겨 줄 때면 가슴이 뿌듯해졌다.
그래서 공작에게 한 줌 애정을 받지 않더라도 괘의치 않았다. 그렇게 착각하고 있었다.
누구든 이유 없는 차별을 받는다면 가슴에 응어리가 맺힐 것이다.
따귀를 맞으니 그간 꾹 억눌러 왔던 설움이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눈물이 차오르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던 시안나가 고개를 숙였다.
“항상 공작님은 디트리히만 보세요. 주변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건 누구든 예외가 아니다.”
그냥 웃겼다. 누구든이라니, 디트리히는 아니면서.
이쯤 되니 디트리히를 괴롭힌 원작 시안나의 심정에 백번 천번 공감이 갔다. 공작이 대놓고 차별을 일삼는데 삐뚤어지는 게 당연했다.
더 이상 공작과의 대화는 무의미할 것이다. 시안나의 손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숙…… 하겠습니다.”
시안나는 고개를 숙인 채 공작을 빠르게 지나쳤다.
탁, 탁. 저택에 도착한 그녀는 와인 창고로 달려 나갔다. 아무도 없는 곳에 꽁꽁 숨고 싶었다.
삐걱. 문을 여니 미세한 먼지가 바람을 일으키며 폴폴 흩날렸다.
시안나는 정면에서 보이는 오크 통 뒤에 섰다. 털썩 주저앉은 그녀가 고개를 무릎 사이에 푹 박았다.
“윽, 흐윽, 으극. 흑.”
와인을 마시지 않는 긱스 때문에 와인 창고는 작은 편이었지만 그녀의 몸을 숨기기엔 충분했다. 또 와인은 습도, 온도에 민감했기에 적정한 온도와 창고의 어둠이 그녀의 어깨를 조용히 감싸 주는 것만 같았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와인 병과 포도 냄새를 풍기는 오크 통에 둘러싸인 그녀가 코를 훌쩍였다.
“흑, 나쁜 공작 놈. 대체 어떻게 마음을 얻어야 하는 거야.”
시안나는 죽음을 피하고자 헤이스, 긱스와 친해질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긱스는 그녀에 대한 적의를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가주를 목표로 하는 것도 긱스가 탐탁지 않게 여기는 마당에 무슨 수로 마음까지 얻는단 말인가?
난 못 해…….
그녀는 쉬어서 울음이 토해지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꺼이꺼이 울었다.
목구멍에서 쇳소리만 나오게 되어서야 와인 창고에서 빠져나왔다.
흐린 시야로 터덜터덜 힘없이 걷고 있는데 누군가와 부딪쳤다.
“윽! ……아가씨?”
헤이스는 눈이 새빨갛게 부은 시안나를 발견했다. 시안나는 기력이 없는지 그와 부딪혔는데도 그대로 쌩하니 걸어 나갔다.
항상 씩씩하고 쾌활했던 모습과 딴판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
헤이스가 시안나를 붙잡으려 팔을 뻗었지만 이미 거리가 벌어진 뒤였다.
마침 다른 시종인이 지나가고 있었다.
“배드. 혹시 시안나 님께 무슨 일이 생겼어?”
“그게 정원에서 시안나 님이 공작님께 뺨을 맞은 모양이더라고…….”
저택 내부만 담당하는 하녀들까지 알 정도로 소문이 쫙 퍼진 상태였다.
“그럴 수가.”
자초지종을 들은 헤이스가 탄식을 흘렸다.
헤이스의 안타까운 시선이 멀어지는 시안나의 등에 꽂혔다.
***
2층 복도의 커다란 창문에서 비치는 햇살이 힘없이 걸어가는 시안나에게 쏟아졌다.
그녀의 방 앞엔 뜻밖의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디트리히?”
시안나의 등장에 우울한 낯으로 문에 기대어 찢긴 토끼 인형을 꼭 끌어안고 앉아 있던 디트리히가 벌떡 일어났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두덩이 아래 번들거리는 눈물 자국과 여기저기 뜯겨 있는 입술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퉁퉁 부은 얼굴로 짓는 웃음이 귀엽기보다 처연했다.
디트리히가 가만있는 시안나에게 와락 안기었다.
“누님!”
미소가 떠오른 디트리히와 달리 시안나의 낯엔 그들이 드리웠다. 몸을 끌어안는 팔이 족쇄 같았다.
아무래도 조금 전 공작에게 뺨을 맞은 원인은 간접적으로 디트리히였다. 평소라면 까만 머리칼을 헤집어 주며 달래 주었겠지만 지금은 진저리가 쳐졌다.
“누님 괜찮, 으세요?”
속에서 알 수 없는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디트리히. 나는…….”
너랑 말하고 싶지 않아.
목구멍 끝까지 치밀어 오른 말이 목젖 부근에서 고였다. 바싹 마른 입천장에 침음을 삼킨 그녀는 디트리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곤 지그시 밀어냈다.
디트리히로선 처음 당하는 거부라 눈이 동그래졌다.
“후으……? 누님, 어째서…….”
“미안. 머리가 너무 아파서 지금은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나중에 들러 줘.”
항상 디트리히를 받아 주던 시안나였다. 거절당한 게 어지간히 충격적인지 금안에 물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울상을 지은 디트리히가 치맛자락을 쥐며 애걸했다.
“싫어. 나 누님이랑 같이……. 나, 누님 좋아. 흑, 그러니까…….”
몸이 안 좋은 게 분명했다. 디트리히가 달라붙는 게 귀엽기는커녕 찰거머리처럼 느껴지다니.
흐느낌에 두개골이 두 쪽으로 쩍 갈라지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어째서 가만히 놔두질 않은 거야?
결국 꾹꾹 억눌러 왔던 마개가 팡 터지고 말았다.
시안나가 인상을 쓰며 디트리히를 퍽 밀쳤다. 팔을 둘러 찹쌀떡처럼 붙어 있던 디트리히가 반동으로 휙 튕겨 나갔다.
“으윽……!”
디트리히가 복도에 주저앉는 것을 보자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빙판처럼 꽁꽁 언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머리가 아프니까 나중에 이야기해.”
“그, 그래도…… 누님이랑 있고 싶어…… 요.”
그 순간 머릿속에 있던 실이 툭 끊어졌다.
디트리히가 저를 쉬지 못하게 일부러 골탕 먹이는 것만 같았다.
통제할 겨를도 없이 뾰족한 말이 튀어나왔다.
“피곤하다고 했잖아! 넌 왜 그렇게 항상 제멋대로니?”
마음속의 응어리를 쏟아 내듯 고함을 내질렀다.
결코 디트리히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스스로 더 큰 화를 막아 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시안나의 고함은 처음이었기에 디트리히는 놀라자빠질 듯한 시선으로 시안나를 응시했다. 물기 어린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으…… 으…….”
울먹임이 둘 사이에 맴돌았다. 시안나는 충격 받은 디트리히를 외면한 채 문고리를 잡았다.
“나 이제 방에 들어갈 거니까 따라오지 마. 너도 얼른 네 방에 가.”
쾅!
격앙되자 방문을 닫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문을 닫자마자 몰려오는 피로감에 문에 등을 기대고 주르륵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못났어. 너 사실은 공작한테 큰소리치고 싶었잖아. 디트리히가 뭘 잘못했다고.”
누가 심장에 돌을 던진 것처럼 아파 왔다.
그때였다.
“누님…… 내가 잘못했어. 후으……. 누님, 열어 줘…….”
쾅쾅쾅. 등을 기댄 문이 세차게 요동쳤다.
디트리히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문을 어떻게든 열려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심장이 미어터질 것 같으면서도 짜증이 솟구쳤다.
시안나는 눈을 꾹 감고 두 팔로 귀를 막았다. 아무런 대답도 없자 흐느낌이 거세졌다.
“흑, 누님……. 나 착한 아이, 끅, 할게. 착한 아이가……. 열어 줘. 누님!”
듣기 싫어. 속마음과 무거운 죄책감이 화살이 되어 시안나를 마구 찔러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