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
다음 날.
아슈토르 공작저에 손님이 찾아왔다. 로이스네카 백작과 그의 딸, 두 사람이었다.
시안나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예절 교본을 보던 중 공작의 호출을 받았다.
그녀가 디트리히의 손을 잡고 응접실에 들어가자 배가 툭 튀어나와 거만해 보이는 중년 남성과 소녀가 소파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디트리히의 또래로 보이는 소녀가 일어서더니 주름치마를 부여잡고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엘리네 로이스네카라고 합니다.”
확 트인 창문 너머로 소녀의 연한 갈색 머리카락이 햇볕에 반짝였다.
축 처진 눈꼬리, 작고 얇은 입술, 분홍빛 뺨.
툭 건드리기만 해도 울 것 같은 소녀였다.
소녀는 말간 웃음을 지은 후 디트리히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엘리네의 뺨에 붉은 기가 감돌더니 고개가 휙 돌아갔다. 명백히 디트리히에게 호감을 느낀 행동이었다.
“시안나. 디트리히가 잘 어울려 놀 수 있게 자리를 지켜 주렴.”
긱스는 디트리히를 잘 부탁한다며 시안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백작과 자리를 떴다. 긴밀한 이야기는 집무실에서 할 모양인 듯했다.
문이 닫히고 순식간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방금 알게 된 아이를 상대하려니 난감했다.
시안나는 응접실에 체스나 블록 상자가 있다는 걸 깨닫고 커다란 서랍장을 열었다.
“안녕. 혹시 체스 둘 줄 알아?”
“조…… 조금…….”
그렇게 체스를 하는 거로 결정 났다.
시안나는 체스의 룰을 설명하면서도 마음은 이미 딴 데 가 있었다.
디트리히와 엘리네 영애가 잘 어울릴 수 있게 부탁한다니. 설마 긱스는 디트리히와 엘리네라는 소녀를 이어 줄 생각인 건가?
결국 여주 에르마야와 이어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거기다 오늘따라 디트리히도 말썽이었다. 디트리히는 시안나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체스판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디트리히, 손님이 있는데 버릇없이 무슨 행동이니? 영애와 놀아야지.”
디트리히의 얼굴에 회색 먹구름이 꼈다. 금방이라도 장마가 내려칠 기세였다.
“후으. 누님 말고,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요…….”
왜 이렇게 말을 안 듣지? 설마 디트리히도 긱스의 묘한 기색을 눈치챈 걸까?
시안나는 억지로 배에 둘린 팔을 떼어 내고 디트리히를 엘리네와 마주 보게 만들었다.
“영애를 곤란하게 하면 멋진 신사가 될 수 없잖니.”
“으……. 그렇지만…….”
옥신각신하는 둘을 번갈아 보던 엘리네가 공손하게 말을 걸었다.
“공자는 체스에 흥미가 없는 거 같아요. 그 대신 저를 위해 춤 연습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춤은 어떤 신가요?”
엘리네의 말대로 디트리히는 최근 춤 연습을 시작했다. 정확히는 카릴과 디트리히가 검술 대결을 한 다음 날부터.
다시금 긱스의 싸늘한 눈빛을 떠올리자 심장이 벌렁벌렁거렸다.
두 사람의 검술 대결에서 승리한 대가로 시안나는 디트리히에게 이마에 가벼운 뽀뽀를 받았다. 그 광경을 목격한 긱스는 표정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그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시안나는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긱스가 노려봤다니, 그저 내가 예민했던 거겠지. 설마 지금 태풍의 눈 속이라거나…… 그렇진 않을 거야. 앗, 지금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잖아?’
퍼뜩 현실로 돌아온 시안나가 디트리히의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을 주었다.
“자, 그럼 디트리히가 열심히 연습한 춤 춰야지.”
“싫어. 누, 누님이랑만…… 연습한 건…… 그거 때문에…….”
하지만 시안나가 여느 때보다 완고하자 디트리히는 마지못해 엘리네와 춤을 출 수밖에 없었다.
시안나는 구석에 자리한 피아노를 칠 연주자를 불렀다. 이윽고 피아노 건반이 율동하고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졌다.
발랄한 왈츠 곡에 반해 두 사람의 춤은 엉망진창이었다.
디트리히는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엉거주춤한 자세로 발을 헛디뎠고, 중간중간에 힐끔힐끔 시안나를 돌아보기까지 했다.
춤을 추는 상대가 모욕적으로 느낄 정도였다.
‘디트리히. 기본적인 동작은 잘해 냈잖아?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춤은 결국 연주 중간에 막을 내렸다. 소녀가 모멸감에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엘리네가 울적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시안나는 불편한 상황 앞에서 머리를 싸맸다.
“큼큼.”
응접실의 공기가 유독 무겁게 느껴져 목청을 가다듬는데, 순간 사방이 탁 트인 정원이 번쩍 떠올랐다. 시안나가 반색하며 엘리네의 손을 감싸 안았다.
“혹시! 정원 구경하지 않을래? 아슈토르가의 정원은 계절마다 꽃을 다르게 심어서 볼거리가 풍성하거든.”
시안나가 부러 활기차게 제안했음에도 소녀는 소리 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
정원으로 향하는 길. 세 사람은 양옆으로 꽃이 활짝 만개한 길을 걸었다.
살짝 기운 없어 보이던 것도 잠시, 엘리네는 디트리히에게 쉼 없이 말을 걸었다.
“공자님. 수도에 새로 문을 연 과자 집을 아세요? 아침부터 마차들로 북새통을 이룬다던데.”
“……몰라.”
“아, 디저트 말고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
엘리네가 손뼉을 치며 명랑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과 대비되게, 토끼 인형을 안은 디트리히는 시안나의 소매를 꾹 잡아당길 뿐이었다.
그러니 대화가 이어질 리 없었다.
엘리네의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소년이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가 뭘까?
소녀는 시안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공녀와 공자는 정말 친해 보이시네요……. 누나면 공자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계시겠죠?”
“누나가 아니라…… 공작님께서 나를 거두어 주셔서 함께 살고 있어.”
“아……. 그래서 성이 디트리히 님과 달랐군요.”
뜻밖의 말에 소녀는 놀라면서도 속이 부글, 끓어올랐다.
소녀의 머릿속에 로이스네카 백작이 소녀에게 한 경고가 부상했다.
‘이 밥벌레가! 티끌만도 쓸모없는 네게 중요한 명령을 내리겠다. 아슈토르 공작가에 저주받은 아들을 아느냐? 반푼이라 결혼은 꿈도 못 꾼다지. 그러나 그 아슈토르 공작의 공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공자와 친해져 약혼 이야기가 오고 가게 만들어라!’
할 수만 있다면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런 자유 따위 허락되지 않았다.
고아 소녀인 엘리네가 지금 뛰쳐나간다면 그녀는 길거리에서 구걸을 해야 할 것이다.
‘만약 못하면 오늘부터 또 밥을 굶게 될 줄 알아라! 알겠나?’
백작의 끔찍한 다그침에 목이 졸리는 것만 같았다.
헉헉. 숨소리마저 거칠어지고 시야가 까맣게 물들어 간다고 여긴 순간.
“엘리네 영애! 갑자기 멈춰 서서 무슨 일이야?”
시안나가 발걸음을 뚝 멈춘 엘리네의 어깨를 흔들었다. 엘리네의 얼굴은 악몽을 꾼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소녀를 찬찬히 살펴보던 시안나는 프릴 소매에 비치는 푸른 자국을 발견했다.
“어디 부딪치기라도 한 거야? 어디 보자, 연고가 어디 있더라.”
디트리히를 위해 구비해 두었던 연고를 꺼낸 시안나가 엘리네의 소매를 걷어붙였다.
엘리네가 질겁하며 도리질 쳤다.
백작에게 맞은 멍을 들키고 말 것이다.
“괜, 괜찮…….”
소녀의 바람에도 시안나는 팔목에서 팔꿈치까지 퍼렇게 든 멍을 목도하고 말았다.
‘이건……. 부딪친 게 아니라 맞은 상처잖아!’
깨알같이 난 붉은 색 점, 불을 지진 듯한 둥그렇고 검붉은 자국. 명백한 학대의 증거였다.
설마 백작이 한 짓인가? 아무래도 소녀에게 주먹을 휘두를 만한 사람은 그밖에 없어 보였다.
엘리네는 기왕 상처가 들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상처를 바르는 손길을 받았다.
그녀의 마음 한쪽에 질투심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공녀는 어째서 나랑 같은 처지인데도 행복해 보이는 거지?’
그 답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디트리히. 그녀만을 따르는 작고 귀여운 생명체.
‘나도 시안나 영애처럼 더 좋은 집안에 입양 갔더라면!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았더라면!’
분노는 잘못된 방향으로 날아갔다.
마침 장미 하나를 똑 딴 디트리히가 두 사람을 향해 아장아장 걸어왔다. 그리고 방실거리며 연고를 전부 바르고 연고 통을 닫는 시안나에게 건넸다.
“누님……. 꽃…… 이거.”
그때 엘리네가 디트리히에게 다가가 토끼 인형을 가리켰다. 그녀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공자님. 제게도 선물을 주시면 안 될까요? 전 이 토끼 인형이 갖고 싶어요.”
이대로 집에 가면 분명히 백작에게 얻어맞을 것이다. 디트리히와 잘되고 있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년이 토끼 인형을 옷에 파묻힐 정도로 끌어안으며 자신을 노려보았다. 그냥 줄 기세가 아니었다.
이쯤 되니 이판사판이었다. 맞는 것보다 누군가의 미움을 사는 편이 더 나았다.
엘리네가 디트리히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토끼 귀를 콱 붙들었다.
“저는 토끼 인형이 정말로 필요해서, 그러니까 제발 저한테 토끼 인형을 주세요!”
토끼 귀가 빳빳하게 펴질 정도로 당기는 힘이 강했다.
시안나는 이해할 수 없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대체 저 토끼 인형이 뭐기에 엘리네 영애가 과민 반응을 보이는 거지?
그렇지만 엘리네의 행동이 지나친 것도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힘으로 빼앗으려 하다니, 결코 칭찬할 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시안나가 서로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다그쳤다.
“엘리네 영애, 다른 인형이라면 공작가에 많으니 원하는 게 있으면 말을…….”
“안 돼요. 저 토끼 인형이 아니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 순간.
부욱. 실밥 터지는 소리와 더불어 힘을 이기지 못한 토끼 인형의 귀가 찢어졌다.
털썩. 힘의 반동으로 디트리히가 풀밭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디트리히의 손에서 떨어져 나간 토끼 인형이 한쪽 귀를 잃은 볼품없는 모습으로 풀잎 사이를 나뒹굴었다.
“내 토끼……?”
디트리히가 떨리는 눈으로 망가진 인형을 바라보았다. 솜이 튀어나오고 풀과 흙이 덕지덕지 묻어 더러운 꼴이었다.
잠시 뒤, 촘촘한 속눈썹에 이슬이 맺혔다.
“흑, 토, 끼…… 으흑……. 으그, 으앙!”
삽시간에 서러운 통곡이 하늘에 번졌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시안나가 쩔쩔매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나타났다. 한참 정원을 둘러보던 긱스 공작과 백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