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네? 무슨 말씀하신 건가요?”
“아니……. 아무것도.”
소년은 의미심장하게 말한 것치고 미련 없는 표정으로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신경이 쓰였지만 도통 알 길이 없었다.
일단 디트리히는 공작가 장자로서 카릴과 힘 싸움을 하는 적대 관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장차 공작이 될 디트리히와 힘 싸움을 한다면 부담감을 느끼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단, 디트리히가 정상적인 상태라면 말이다.
지금으로썬 저주에 걸린 디트리히는 결코 카릴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디트리히가 아니어야 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깊게 고민하고 싶은데 옷깃을 쭉쭉 잡아당기는 손길이 그녀의 정신을 흩트려 놓았다.
디트리히가 진한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포크에 꽂은 채 시안나에게 내밀고 있었다.
“이거, 드세요.”
어쩐지 눈썹이 시무룩했다. 설마 카릴이랑만 이야기한다고 삐진 건 아니겠지?
“혹시 나한테 주는 거야?”
긍정하는 듯 디트리히의 커다란 황금색 눈망울이 반짝였다.
시안나는 식사 자리에서 디트리히에게 음식을 매번 챙겨 주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닌, 제가 주는 음식을 오물오물 씹어 먹는 디트리히가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디트리히가 밥을 깨작거리는 시안나를 보고 똑같이 따라 하고 있었다.
디트리히의 행동은 마치 어미 새가 음식을 주려는데 도리어 몰래 모아 둔 먹이를 건네는 아기 새를 연상케 했다.
‘작은 동물을 키우는 것 같아.’
디트리히가 먼저 시안나에게 음식을 건네다니.
심장이 북소리처럼 둥둥하고 울렸다. 게다가…….
‘안심 부위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위인데. 설마 디트리히도 식사 시간 때 날 지켜보고 있던 거야?’
디트리히가 얼른 받으라며 재촉했다.
“누…… 누님.”
디트리히는 포크를 더욱 들이밀며 시안나가 입을 벌리기만 애타게 기다렸다.
시안나가 꿀꺽 스테이크를 삼키자 그제야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변했다.
각자 개별 접시에 담긴 파스타는 포크를 쓰기 어려워하는 디트리히가 먹기 힘들어하는 음식이었다.
“자, 이번엔 내가 파스타 먹여 줄게. 아.”
시안나가 디트리히의 포크를 집어 들고 파스타를 돌돌 말아서 디트리히의 입에 앙, 넣어 주었다.
우물거리는 디트리히의 만면에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저렇게 입에 다 묻히고 먹다니, 파스타가 그렇게 좋아?”
“누…… 누님이…… 먹여 줘서, 우웁.”
디트리히의 말은 시안나가 손수건으로 더러워진 입가를 닦아 주는 바람에 끝맺지 못했다.
두 사람을 주시하는 카릴이 못마땅한 낯으로 변했다.
‘아주 잘 노는군. 배알이 뒤틀릴 만큼.’
서로 장단이 잘 맞는 그들의 모습에 카릴이 서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잠시 관찰해 보니 디트리히는 입으론 음식을 씹으면서도 시종일관 시안나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시안나도 마찬가지. 일거수일투족을 그림으로 남겨 보관하려는 사람 같은 집요함이 느껴진다면 예민한 걸까.
‘귀찮아하기는커녕 저런 바보 같은 웃음이나 짓고.’
공작의 자리에 관심이 없다는 것도, 공자를 살뜰히 챙기는 것도 야욕을 숨기려는 방패라고 여겼는데 착각인 듯했다.
스스로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알지 못한 채 카릴은 그들의 영역을 깨부수고 싶었다.
순간 관자놀이 따끔거렸다. 아, 또 익숙한 아픔이다.
카릴은 욱신거리는 관자 놀을 누르며 비틀린 웃음을 흘렸다.
“이거 꽤 재밌는 광경인걸.”
“네?”
언짢은 목소리에 시안나는 화들짝 놀랐다.
카릴의 존재를 망각한 채 디트리히랑만 이야기하다니, 크나큰 실례였다.
그래서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시안나 양이 이 집의 시녀로 들어온 걸 줄이야.”
“방금, 뭐라고 하신…….”
시녀인 줄 알았다는 말에 생글생글 웃던 시안나는 벙찐 얼굴로 변했다.
공작의 입양아는 아닐지라도 엄연한 아슈토르 공작저의 일원이었다. 그런 소녀를 시녀라 칭하다니. 식당은 한순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그녀의 웃음이 사라지자 카릴은 알 수 없는 가학심이 끓어올랐다.
‘모욕당한 걸 아는 머리는 되는 걸까.’
바보가 아닌 이상, 시녀 같다는 건 공녀 같지 않다는 비꼼이라는 걸 눈치챌 것이다.
입술을 쉬이 물었다 떼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꽤나 난처해 보였다.
‘아예 아메바는 아니군.’
카릴은 잘게 떨리는 시안나의 어깨를 흡족하게 보며 턱을 괴었다. 소년은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비열한 흥분감에 도취되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시안나의 반응은 그의 예상에 한참 벗어났다.
“……군요.”
“뭐?”
“제가 그 정도로 디트리히를 살뜰히 챙기는 거로 보이는군요.”
카릴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크게 뜨였다. 숙였던 고개를 든 얼굴이 흥분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본다면 모욕을 당했다기보다 칭찬을 받은 거로 여길 법했다.
시안나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에 입가 근육을 다잡지 못했다. 실실 웃음꽃이 피었다.
‘와. 내가 정말 디트리히를 잘 챙겨 주고 있구나. 다행이다. 이로써 죽음에서 한발 멀어진 느낌!’
왕자가 저렇게 느낄 정도면 디트리히가 날 미워해서 죽이진 않겠지?
들떠서 춤이라도 추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에 반해 카릴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썩어들어 갔다.
‘시녀 같다는 소릴 듣고 왜 좋아하는 거지? 머리가 모자란 건가, 아니면 미쳐 버린 건가.’
시안나 영애가 저주에 걸렸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는데.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시녀란 소리를 들어도 상관없을 만큼 공자가 좋은 걸까? 모욕을 웃고 넘길 정도로?
그 순간 카릴은 화가 치미는 원인을 깨달았다.
공녀가 공자를…….
“혹시 바보라는 말 자주 들어?”
“네? 바보라니요!”
어떻게 막말을 할 수 있냐며 시안나가 진심으로 화를 내듯 씩씩거렸다.
유모라는 비꼼보다 바보라는 유치한 말에 더 화가 난 듯 보였다.
그 모습에 카릴은 속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대체 이 소녀는……. 조롱은 웃어넘기고 별것도 아닌 말은 질색하고.’
사람이 황당함을 넘으면 웃음이 나온다고 했던가? 펄펄 끓던 분노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저렇게 멍청한 여자애를 보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스스로가 어이가 없으면서도 속에서 피어오르는 알 수 없는 열기에 카릴의 눈동자에 해일이 몰아닥쳤다.
그에 반해 시안나는 갑자기 바보 소리를 들어 억울해졌다.
‘참나. 왕자면 다야? 왕자면 아랫것한테 막말해도 되는 거야?’
카릴에게서 독살 명령이라도 떨어질까 봐 느꼈던 공포심은 바보라는 말에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때, 음식을 나르는 시종장이 들어왔다.
시종장은 디트리히가 좋아하는 닭고기 푸딩을 내놓고 갔다. 순간 카릴의 눈이 커진 것 같았다.
‘아. 닭고기 푸딩은 에르마야가 카릴에게 해 주었던 음식이지. 혹시 먹고 싶은 건가?’
소설에서 디트리히가 닭고기 푸딩을 즐겨 먹는 걸 보았기에 시안나가 주문한 거였다.
한 번쯤은 카릴에게 줘도 괜찮겠지.
시안나가 카릴에게로 닭고기 푸딩을 밀었다. 카릴이 닭고기 푸딩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시…… 아나 누님, 괴롭히지 마.”
이게 무슨 소리지?
시안나는 카릴을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는 디트리히를 발견했다. 진심으로 화가 난 듯 포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놀란 시안나가 디트리히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왕자님한테 그러면 못 써!”
“왕, 왕자님이 먼저, 누님에게 바보라고…… 말했는…… 걸.”
시안나는 잘했다고 칭찬해야 할지 다그쳐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카릴은 저주에 걸린 디트리히가 그저 우스웠다.
꼭 제 주인에겐 꼬리를 살랑 흔들고 다른 사람에겐 이를 드러내는 강아지 같았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이를 진지하게 상대하다간 우스워지는 건 나뿐이겠지.’
하지만 저 도전적인 눈동자를 꺾어 주고 싶다는 욕망이 샘솟았다.
그는 티 없이 맑은 미소를 지으며 턱을 괴었다.
“혹시 공자는 검을 다룰 줄 아나?”
그의 눈동자 너머로 보이지 않는 불꽃이 타탁 타오르고 있었다.
***
하늘이 포근한 미소를 짓고 나비가 훨훨 날아다니며 향긋한 냄새를 흩뿌리는 화창한 오후였다.
동동 떠다니는 구름 아래, 세 사람은 정원 구석에 있는 꽃밭으로 나왔다.
나란히 걷던 디트리히와 카릴은 서로 눈이 마주치더니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직 대결 전인데도 긴장감이 팽배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시안나가 두 사람을 가로막았다.
“왕자님. 제발 다시 재고해 주세요. 디트리히가 검술을 배우긴 했지만 대결이라니! 안 될 말이에요!”
시안나가 두 사람을 떼어 놓으려는 듯 양팔을 위아래로 휘저었다.
그녀의 시선이 두 사람이 쥔 연습용 검에 닿았다.
아무리 목검이라도 카릴이 자상이라도 입는다면 디트리히는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디트리히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카릴의 태도도 불안을 더욱 부추겼다.
“내게 상흔을 남겨도 죄를 묻지 않겠다. 그래도 걱정인가?”
카릴은 어쩐지 이렇게 재밌는 소녀의 사랑을 받는 소년이 부러워졌다.
시안나가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호소했다.
“헤이스도 디트리히가 누군가와 대련할 실력은 아니라고 이야기했어요. 이미 왕자님께서 이기신 것과 다름없다고요.”
저주에 걸렸어도 후계자 수업은 착실히 진행되었고, 디트리히는 헤이스에게 검술을 가르침 받았다.
하나 불행하게도 디트리히는 찌르기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헤이스가 열성적으로 가르쳐 주었지만 저주의 영향이 커 보였다.
이대로 가다간 디트리히는 카릴에게 흠씬 뚜드려 맞기만 더 할 것이다. 아니면 처벌을 받거나. 이기든 지든 디트리히가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릴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디트리히를 향해 턱짓했다.
“글쎄, 공자는 생각이 좀 다른 모양인데?”
카릴의 말처럼 맞은편에 있는 디트리히도 눈썹을 삐죽 세우고 카릴을 노려보고 있었다.
결국 세 사람은 장애물이 없는 꽃밭에 도착하고 말았다.
“시작하겠어.”
어째서 카릴이 승부욕을 불태우는 걸까?
시안나는 두 사람 다 그만둘 생각이 없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검을 든 카릴이 디트리히를 먼저 도발했다.
“그냥 대결하면 재미가 없으니 내기의 상품이 있는 건 어때?”
“후으?”
“가령, 공녀가 승자의 소원을 들어준다든지 말이지…….”
“왕자님!”
얼떨결에 검술 대결의 우승 상품이 된 시안나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