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9화 (9/70)

[9]

***

디트리히는 온전히 자신에게 기대고 있었다. 그녀의 바람대로 죽음의 가능성이 한층 낮아진 것이다.

이제 마음을 돌려야 하는 사람은 헤이스와 공작, 두 사람이었다.

사실 공작은 디트리히가 잔병치레했을 때, 시안나가 간호해 주는 모습을 눈여겨본 듯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어쩌면 당연했다. 긱스는 왠지 모르겠지만 시안나를 싫어하고 있었다. 아마 식당 때 반응으로 보아 그녀가 디트리히의 자리를 빼앗을 거라고 여기는 듯했다.

“하아, 대체 긱스의 마음은 어떻게 들리지?”

어떻게 공작의 마음을 돌릴지 고민하고 있는데, 뜻밖의 손님이 아슈토르 공작가를 찾아왔다.

디트리히가 완전히 나은 후 며칠 뒤.

공작저는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시녀들이 중앙 홀을 광내듯이 닦는가 하며, 공작가의 전면 유리창도 빠짐없이 닦는 모습이 곳곳에서 들어왔다.

“어라? 분명 대청소는 월초에 한다고 들었…… 으악!”

얼마나 계단이 미끄러운지 생각에 잠긴 시안나는 그만 굴러떨어질 뻔했다.

계단을 내려와서도 위험천만하긴 마찬가지.

바로 앞에서 대걸레 통을 든 시녀가 휘청거리는 걸 본 시안나는 그녀를 부축해 준 뒤 질문을 던졌다.

“아침부터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오늘 손님이라도 오시니?”

로판 소설을 읽은 덕에 아가씨 말투가 술술 튀어나왔다. 근처에서 꽃을 장식하던 시녀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공작님께서 왕비님과 점심 약속이 잡혀 있으십니다.”

“뭐? 왕비님? 왜 왕께서 행차하지 않으시고…….”

그 말에 시녀가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예? 왕께선 몇 년 전에 서거하지 않으셨습니까?”

“뭐?”

어라? 분명 소설에선 왕이 살아 있었는데?

소설 <에르마야의 비밀 일기>의 로드브뤼셀 왕국에선 분명 왕과 왕비가 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녀의 의문은 다음 말에 곧바로 사라졌다.

“왕자님께서도 방문하신다고 합니다.”

“카릴 왕자님도?”

시안나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서브 남주이자 먼 미래에 시안나를 죽게 만든 원흉이 저택에 오고 있다는 소리였다.

에르마야의 사랑을 두고 디트리히와 헤이스가 반목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왕자는 달랐다. 카릴은 디트리히와 에르마야에게 시련을 주는 악역이기 때문이다.

디트리히를 죽이려 암살자를 보내기도 하고, 시안나에게 디트리히를 죽이라며 독약을 건네기까지.

‘끝내는 디트리히에게 가려는 에르마야를 왕성에 붙잡아 두었지.’

파도처럼 밀려오는 걱정에 시안나가 이를 딱딱 부딪쳤다.

‘아직 에르마야를 만나기 전이잖아. 카릴이 디트리히를 싫어할 리 없으니 괜찮을 거야.’

그러나 그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

해가 산 중턱에 걸리기 전.

공작가의 모든 시종인이 공작 저 정문에 나와 왕국의 가장 권위 있는 여왕을 맞이할 채비를 했다.

시안나도 그중 하나였다. 앞마당에 끝도 없이 행렬로 서 있는 시종들을 감상하니 공작가의 어마한 규모가 새삼 피부로 와닿았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정문이 열리고 왕실의 문양이 박힌 커다란 마차가 들어왔다. 양옆에 기마병을 낀 거로 보아 마차에 범상치 않은 인물이 탔음을 짐작하게 했다.

왕실 마차는 선두에 서 있던 공작의 앞에 멈추었다.

마차 문이 열리고, 우아한 분위기의 여성과 디트리히보다 좀 더 성숙해 보이는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분이 여왕님…….’

머리카락도, 드레스도 전신이 새하얀 그녀는 괜히 여왕이 아니었다.

사람을 그대로 얼려 버릴 것 같은 싸늘한 눈빛을 지닌 여자는 지배자의 카리스마를 드레스처럼 입고 있었다.

“위대하신 노렌 여왕님과 카릴 왕자님을 뵙습니다. 귀한 발걸음을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공작이 예의를 차리자, 다른 시종들도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여왕은 제게 고개를 숙인 사람들을 쓱 둘러보다 공작의 옆에 서 있는 시안나를 발견했다. 그녀가 시안나에게 다가갔다.

“어머, 이 아이가…….”

활자로 느낄 수 없었던 무게감 있는 목소리에 시안나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여왕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안을 건넸다.

“백작이 그렇게 된 건 참 유감이야.”

무슨 소리인 걸까.

시안나는 한참 생각해서야 시안나의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알아챘다. 백작 부부가 돌아간 것에 대한 조의를 표하는 듯 보였다.

기억도 나지 않는 부모님이었지만 시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여왕님께서 손수 위로를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왕자와 시안나 양은 첫 대면이로구나.”

데뷔당트도 치르기 전이라 작은 백작 가문의 여식이었던 시안나는 카릴과 첫 대면이었다. 여왕이 손짓하며 왕자를 앞에 나오게 만들었다.

‘와아, 역시 서브 남주라 그런지 눈 돌아갈 만큼 화사한 외모인데?’

축복받은 것처럼 한 올 한 올 하얗게 빛나는 머리칼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섬세한 용모와 온화하게 처진 눈꼬리. 의젓하게 걸어 나오는 자태는 어린아이인데도 기품이 흘러넘쳤다.

디트리히가 하늘에서 떨어진 하얀 천사라면, 카릴은 손대면 사라질까 두려운 깨끗한 요정처럼 보였다.

‘하지만 축 처진 눈꼬리에 유순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캐릭터는 보통 통수캐지.’

저런 착해 보이는 소년이 훗날 에르마야를 감금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요정 같은 외모 위로 폭군의 싹이 움트는 것만 같았다.

올라오는 한기를 무시한 채, 시안나는 드레스를 들어 올리며 예의를 갖추었다.

“왕자님을 뵙습니다. 시안나 드뷘모르가라고 합니다.”

“안녕? 네가 시안나구나. 연둣빛 머리카락이 곱다고 느낀 건 처음이야.”

악역이라는 걸 아는 시안나도 깜빡 속아 넘어 갈 만큼 눈이 부신 미소를 지었다.

시안나가 고개를 들자 아이답지 않은 태도로 카릴이 손등을 추어올려 입을 맞추었다. 달큼한 감촉에 시안나는 성년이 된 귀족 영애가 된 것 같았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왕비가 웃었다.

“두 사람을 보니 제법 잘 어울리는걸. 그렇지 않나? 공작?”

“……여부가 있겠습니까.”

굳이 시안나에게 왕자를 소개해 준 까닭이 있다는 듯 눈초리가 의미심장했다.

‘설마……. 시안나와 왕자를 이어 주려는 건가.’

시안나가 슬금슬금 공작의 눈치를 보았지만 그는 정말 시안나와 왕자가 결혼해도 상관없다는 무감한 표정일 뿐이었다.

‘아이참, 공작님. 어찌 왕자와 어울릴 수 있겠습니까, 라고 받아쳐야죠!’

왕자와 엮이다간 언젠간 독살하라는 명령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거부했다간 목이 댕강 잘려 나가고 말테지.

‘제발 왕자랑 안 엮이게 해 주세요!’

두 사람을 의미심장하게 지켜보던 왕비가 정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아슈토르 공작가의 정원은 사시사철 보기 드문 꽃이 피어난다지. 점심 전에 정원 구경을 하면 좋겠어.”

정원에서 은밀히 할 이야기가 있다는 소리였다.

왕자님께 먼저 식사 대접을 하라고 이른 공작은 왕비와 함께 정원으로 사라졌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시녀 하나가 카릴에게 인사를 하고 식당으로 이끌었다.

“우리도 가…… 어라? 디트리히, 왜 그래?”

어쩐지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디트리히의 입술이 붕어빵처럼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디트리히가 볼멘소리를 냈다.

“누님이랑 손……. 나도.”

“응? 악수?”

설마 카릴과 손을 잡은 걸 보고 질투한 거야? 요 깜찍한 것.

시안나가 디트리히의 손을 맞잡았다.

디트리히가 말똥한 눈으로 시안나를 보더니 봄볕같이 화창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카릴과 시안나, 디트리히는 식당으로 향했다.

***

“이리 극진하게 대접해 주다니, 고마워.”

시안나와 디트리히의 맞은편에 앉은 카릴이 호화스러운 식탁을 바라보며 유하게 웃었다.

뷔페 뺨치는 공작가의 점심은 오늘따라 더욱더 화려했다. 요즘 씨가 말랐다고 소문이 자자한 캐비어까지 떡하니 올라와 있었다.

평소엔 그냥 짭짤한 바다향이 도사리는 뷔페라면 지금은 신들의 만찬이었다.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온순한 양 같은 미소에 넘어가지 않으리!

굳게 다짐한 시안나는 샐러드만 깨작거리기 시작했다. 카릴 때문에 입맛이 없었다.

왕자의 연한 하늘색 눈동자가 디트리히를 향했다.

“공자가 많이 아파서 상심이 클 것 같은데…….”

디트리히가 저주에 걸렸다는 건 딱히 비밀이 아닌 듯했다.

“한데 다행이야.”

카릴이 파스타를 돌돌 포크로 말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의 시선은 무슨 뜻인지 몰라 눈만 깜빡거리는 시안나에게 이동했다.

“시안나 양이 있으니 차기 공작 자리는 안심이겠어.”

뜬금없는 소리에 시안나는 0.5초간 사고가 정지했다.

아, 지금 차기 공작 자리에 관심이 있냐고 떠보는 건가?

왕국에서 제일가는 아슈토르 공작가이니 누가 차기 공작이 되는지는 지대한 관심사일 것이다. 이러다가 엮이는 건 아니겠지?

시안나는 왕자를 똑바로 쳐다보는 시선만큼이나 확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 이 집에 입양 온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공작 작위를 물려받을 수도 없고, 공작 자리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시안나의 위치는 참 미묘했다. 긱스 공작이 공작 저로 데리고 왔는데 입양은 아니라 공녀라는 어정쩡한 위치였다. 소설에서는 분명 입양이었는데, 어째서지?

어찌 되었건 상관없었다.

평소에 만약 내가 로판에 빙의한다면 어려운 일, 힘든 일은 안 할 거라고 다짐했었거든.

예상하지 못한 대답인지 왕자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의외로군? 아까 전부터 날 뚫어져라 쳐다보기에 관직에 관심이 있는 야심가인 줄 알았어.”

“죄, 죄송합니다.”

이럴 수가. 너무 빤히 쳐다본 모양이었다.

허둥대는 시안나를 보며 카릴이 작게 혼잣말을 했다.

“그대가 차라리 공작이 된다면 척을 지지 않아도 될 텐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