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에이, 말도 안 되지.’
디트리히와 함께 자다간 깜찍한 모습에 제 심장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시안나가 다시금 고개를 가로젓자 실망한 디트리히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후으……. 어, 째서.”
터질 것같이 커다란 눈망울이 그녀를 향했다.
좀 귀엽지나 말든지……!
시안나가 난처해하며 뒤통수를 긁었다.
“디트리히는 혼자 잘 수 있는 나이잖아. 그 정도는 스스로 해내야지.”
“이렇게 부탁할게요……. 누님……. 안, 돼요?”
디트리히가 두 손을 모으며 수달처럼 빌었다.
처연한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죽죽 흘릴 기세였다. 위험했다.
심장을 가까스로 진정시킨 시안나가 까만 머리칼을 가볍게 헤집었다.
“쪽쪽이를 문 아이처럼 행동하면 어떡하니? 그런 것까지 해 달라고 하면 좋…… 지 않지.”
휴, 좋다고 할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볼을 풍선처럼 부풀린 디트리히가 짐을 인 사람처럼 시선을 떨구었다.
“흐……. 알겠어요……. 누님.”
머리 위에 축 처진 강아지 귀가 보이는 듯했다. 시안나는 디트리히를 애써 외면하며 방을 나갔다.
하지만, 그날 밤하늘은 디트리히의 편을 들었다.
***
한 시간 전만 하더라도 여느 때보다 밝게 빛나던 달이 구름에 가려지고 풀벌레 소리마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거센 폭풍의 징조였다.
우르릉. 쾅쾅!
밤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갑작스러운 폭우가 내리쳤다. 세상을 전부를 물에 빠뜨려 버릴 듯 정신없는 비였다.
하늘에서 울리는 고함 때문에 시안나는 두 귀를 막았다.
똑똑.
그래서 나지막한 노크 소리를 인지하지 못했다.
노크가 다섯 번이 넘어가서야, 빗물 소리에 섞인 소음을 인식한 시안나가 몸을 일으켰다.
“…디트리히니?”
폭우 소리에 말이 묻혔나 싶었지만 제대로 들었는지 문이 열렸다.
딸깍. 특유의 가엽게 보이는 눈망울을 한 디트리히가 베개를 끌어안은 채 나타났다. 하얀색 잠옷을 입은 디트리히는 영락없는 하얀 아기토끼였다.
“누님……. 밖에, 무서워. 같이…… 자 주세요.”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이 울먹거리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시안나는 갈등에 휩싸였다.
‘아까는 단순히 떼를 쓴 거지만 지금 천둥소리가 무서운 건 진짜겠지?’
고민하는 사이, 침대 가까이 온 디트리히가 시안나를 와락 안았다. 쫓아내지 말라는 듯이.
“누님. 제발……. 부탁해요.”
“윽!”
시안나가 디트리히의 팔을 떼어 놓으려는데, 창문에서 번개가 번쩍 내리쳤다. 방 안이 새하얗게 빛나자 놀란 디트리히의 눈이 댕그래졌다.
“윽, 무서워, 흐으…….”
그녀는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시안나는 들어오라는 듯이 이불을 젖히고 침대를 팡팡 두드렸다.
“이리 와. 디트리히.”
디트리히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었다.
이내 침대로 달려든 디트리히는 토끼 굴을 파는 토끼처럼 꼬물꼬물 이불 속으로 파고들더니 시안나의 옆에 얌전히 누웠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기어 오는 행동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시안나가 까만 머리칼을 쓸며 흐뭇하게 물었다.
“디트리히. 나랑 같이 잠드는 게 그렇게 좋아?”
“후으……. 누님에게서, 풀잎, 향기가 나고, 좋아요.”
이불을 꼭 쥔 디트리히는 마치 천국에라도 들어와 있는 표정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볼이 유난히 붉었다.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 있으니 디트리히의 얼굴이 시안나의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기다란 속눈썹 아래로 병아리 같은 샛노란 눈동자는 사랑스러웠고, 옷에서 달짝지근한 복숭아 향이 풍겼다. 단정한 검은색 머리카락은 생기가 흘렀고 피부는 눈처럼 깨끗했다.
……나대지 마, 심장아!
“누, 누님. 코에…….”
“응?”
“피…….”
디트리히의 손가락이 시안나의 얼굴을 가리켰다.
손가락 하나로 코를 쓱 훑으니 끈적끈적하고 붉은 피가 묻어 나왔다.
이럴 수가. 아무리 디트리히가 좋다지만 이젠 코피까지 펑펑 터뜨리다니!
“시안나 누님……. 아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디트리히가 몸을 바짝 붙이더니 잠옷 소매로 시안나의 피를 죽죽 닦아 냈다.
하얀 잠옷에 시뻘건 피가 뭉텅이로 얼룩지자 금안에 비가 올 듯 눈물이 차올랐다.
“죽지 마, 흑, 죽지 마……. 누님.”
방이 울음바다로 변할세라 시안나는 수습에 나섰다.
“하, 하. 죽는다는 게 아니라…… 디트리히가 너무 좋아서 그래.”
“……후으? 나 때문에 피를……?”
디트리히가 시무룩해졌다.
피를 흘리는 원인이 자신이라고 곡해한 듯했다.
오해가 풀리기는커녕 차곡차곡 쌓여만 간다.
“안 좋은 뜻이 아니라, 디트리히가 귀여워서 그래!”
“후으……. 귀여워?”
눈을 댕그랗게 뜬 디트리히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하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크윽. 그렇게 눈을 크게 뜨면 심쿵사한단다.
스스로의 깜찍함을 알지 못하는 디트리히에 발끈하듯, 시안나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당연하지! 디트리히가 너무 귀여워서 밤을 꼴딱 새워 버릴까 걱정이 들 정도인걸?”
그 말에 우유처럼 새하얀 낯에 또다시 먹구름이 끼었다.
“그러면, 누님은…… 귀여운 건 잠을 못 자게 하니…… 싫다는 거지?”
어떻게 해석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그게 아니라…… 잠을 제대로 못 자겠다는 건 디트리히가 너무 귀여워서니까 나쁜 게 아니야! 싫지도 않고!”
시안나가 황급히 변명했지만, 디트리히는 이해하기 어려운지 입을 동그랗게 벌릴 뿐이었다.
작게 앓는 소리가 들린 뒤. 디트리히의 생각은 아주 바람직한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누님이, 잠을 못 자는 건 싫은데…… 귀여운 건 좋아?”
“응!”
“후으……. 그럼 나 더 귀여워질래.”
어둠 속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디트리히의 등에 날개가 활짝 펼쳐진 것만 같았다. 시안나의 심장이 난리 법석을 피웠다.
‘신이시여. 오늘이 정령 제가 땅에 묻히는 날입니까?’
처음에는 성인일 때 디트리히가 아니어서 조금 아쉬워했는데 지금은 어린 시절로 빙의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늘에 절이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남자주인공의 깜찍한 어릴 적을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니, 대체 얼마나 손해 볼 뻔한 거야?
행복한 내적 비명을 지르는 그녀에게 또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흐……. 그러니까 누님, 껴안고 자도 돼요?”
“뭐?”
디트리히가 햄스터처럼 올려다보는데 어떻게 뿌리칠 수 있을까.
둘은 이미 어깨가 닿을락 말락 한 거리였다.
지금도 심장이 야단인데 또다시 코피가 터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디트리히가 더, 덥지 않을까.”
“토, 토끼 인형이 없어서.”
그러고 보니 디트리히는 베개만 껴안고 왔을 뿐이었다. 애착 인형이 없어 허전함을 느낀 건지 디트리히가 몸을 달싹였다.
어쩔 수 없나.
시안나가 두 팔을 번쩍 벌렸다.
“이리 와.”
디트리히의 눈동자에 진한 기쁨이 어렸다.
시안나의 품에 엉금엉금 붙은 디트리히는 새끼 고양이처럼 몸을 말았다.
얌전히 안긴 디트리히가 배시시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머니께서 주신, 토끼 인형보다…… 누님이 훨씬 좋아요.”
“응? 디트리히가 가장 아끼는 인형이잖아?”
혹자는 인형 따위가 뭐가 중요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
며칠간 디트리히를 돌보아 준 시안나는 토끼 인형이 공작 부인의 유품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도 그녀가 죽음을 직감하고 디트리히에게 마지막으로 안겨 준 물건이었다.
의미가 묵직한 인형보다 저가 좋다니 의외였다.
시안나의 반문에 디트리히가 우물쭈물거렸다.
“흐, 당연히, 누님이 더……. 흐으…….”
디트리히는 입술을 달싹거리다 그대로 닫아 버렸다. 말을 하고 싶은데 잘 표현이 되지 않는지 끝내 울먹거렸다.
“후으……. 시안나, 좋아.”
“디트리히.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알겠어. 그러니까 울음 뚝.”
“흐…… 후으?”
“어떻게 아냐고?”
울음을 삼킨 디트리히가 시안나의 말을 기다렸다. 시안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돌아볼 때면 저만 바라보고 있는 환한 눈동자, 눈이라도 마주치면 시도 때도 없이 붉어지는 뺨, 꽃망울이 터지는 것처럼 벌어지는 입.
말을 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시안나는 디트리히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작은 체구 너머, 틈도 없이 달라붙은 옷깃에서 전이된 따스한 온기가 시안나의 심장을 달구었다.
밖에 비가 거세게 내렸다. 같이 자기 전만 하더라도 제 심장이 너무 시끄럽지 않을지, 어색하지 않을지 걱정했는데, 괜한 기우는 모조리 빗물에 떠내려갔다.
어둠은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안락함을 주었다.
그녀의 방은 어느새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별세계였다.
등 뒤는 구름에 드러누운 듯 보드라웠다. 느릿한 호흡이 귀를 타고 안쪽으로 번지자 디트리히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실체 있는 무언가로 변해 시안나의 손에 잡혔다.
그러자 갓 태어난 새끼 짐승처럼 그녀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디트리히가 눈에 보였다.
‘이제 디트리히가 내 죽음을 방관하는 일은 없을 거야…….’
시안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며칠 새에 디트리히가 그 누구보다 자신을 믿고 있다는 것을.
어느새 머리맡에서 색색거리는 숨이 들려왔다. 많이 피곤했던지 그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이제 디트리히는 시안나의 곁을 가장 편안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피식 웃은 시안나는 조심스레 디트리히의 등을 끌어안았다.
잠시 뒤, 시안나의 심장 부근 천이 천천히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도 깊은 꿈에 빠진 것이다. 꿈속에서까지 시안나는 디트리히와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