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5화 (5/70)

[5]

“거짓말이라면 저를 내쫓으셔도 좋아요. 하지만 디트리히는 해산물을 먹으면 온종일 피가 날 정도로 피부를 긁고 고열에 시달려요. 부디 재고해 주세요.”

눈을 지그시 보며 진실을 가늠하던 긱스가 시종에게 턱짓을 했다.

“……그렇군. 치워라.”

이정도로 이 남자가 물러서다니. 다행이었다.

시안나를 제지하던 소년도 동작을 멈추었다. 시종이 접시를 수거하자 시안나의 눈빛이 달라붙었다.

‘아니, 나는 먹고 싶은데?’

제 의사도 묻지 않고 접시를 치워 버리는 공작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자, 잠시만요. 저는 먹고 싶어요.”

“마음대로 해라.”

공작은 관심 없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일이 일단락되자 주황 머리 소년도 물러났다.

시안나는 작게 혀를 찼다.

‘공작은 시안나에게 관심이 없구나. 뭐. 공작 부인은 죽고 아들은 저주에 걸리고, 제정신이 아니겠지. 참나, 그래도 나도 입이란 말이야.’

저런 이기적인 남자의 호감을 사야 한다니, 고생길이 훤히 보였다.

그런데 옆에서 디트리히의 시선이 시안나가 근처에 둔 콩피에 우물쭈물 향해 있는 걸 발견했다. 황금색 눈이 별처럼 반짝거린다.

‘콩피를 먹고 싶어 하는 건가? 그런데 왜 먹질 않는 거지?’

궁금증은 쉽게 풀렸다. 디트리히는 아예 나이프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아. 디트리히는 칼질을 못하는구나.’

저주 때문에 퇴행한 건 언어뿐만이 아니었다. 행동 발달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시안나는 콩피를 제 접시로 가져온 뒤 먹기 좋게 칼질을 했다.

스싹스싹. 전부 자른 뒤 시안나는 디트리히의 접시에 고기를 덜어 주었다.

“우으?”

“고기 먹고 싶었던 거지? 얼른 먹으렴.”

“고, 고마워요. 누님.”

시안나가 접시를 디트리히를 향해 밀자, 디트리히가 햇살처럼 맑게 웃었다.

투명하게 일렁이는 눈동자, 호선을 그리는 입술.

디트리히는 될성부른 떡잎인 게 분명했다. 웃는 모습부터가 남다르니 말이다.

디트리히가 까르르거리며 먹는 걸 긱스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시안나는 슬그머니 긱스의 눈치를 봤다.

그는 그녀의 목숨을 쥐고 있는 세 사람 중 하나였다.

디트리히의 알레르기를 지적해 주고 고기도 썰어 주는 등…… 어느 정도 긱스에게 신뢰의 밑천이 깔렸을 터.

지금이 그의 마음을 호의적으로 만들 기회였다.

시안나는 식기를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은 긱스를 직시했다.

“공작님. 사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저…… 가주 수업을 받고 싶습니다.”

소설에서 가주 수업을 받는 건 디트리히뿐이었다. 공작은 오로지 디트리히만 후계자로 점찍은 것이다.

긱스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을 수 있을까?

역시 능력을 인정받는 게 가장 빠를 것이다.

소설에서 아는 지식으로 그의 신임을 얻고, 그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장애물을 제거한다.

더불어 가주 수업을 받는 디트리히의 호감도 쌓고.

일석이조,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녀가 속으로 자화자찬하는 와중, 나이프와 식기가 부딪치는 시끄러운 소리가 뚝 끊겼다.

칼질을 멈춘 긱스가 안광을 형형히 빛냈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올라왔다.

“……어째서 갑자기 가주가 될 공부를 하고 싶은 거냐? 혹시 가주의 자리가 탐이 나는 거냐?”

냉랭한 말투에 낭패감이 들었다. 가주 수업을 받고 싶다고 부탁하는 건 꽝이었나?

아들에게 팔불출인 긱스에겐 가주 수업을 받겠다는 선언이 아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는 듯했다.

보통 로판의 여주는 가문을 살려 보려 아등바등하는데, 정작 그것이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일 줄이야.

마른침을 꿀떡 삼킨 시안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연히 가주는 디트리히입니다. 다만 저는 옆에서 거들고 싶을 뿐입니다. 저를 거둬 주신 은혜를 갚고 싶어서요!”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긱스는 냉정하게 시안나의 요청을 딱 잘랐다.

그 이후, 식사 시간은 무거운 정적만이 가득했다.

긱스의 신뢰를 얻기는커녕 불신만 조장한 것 같았지만 더 이상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대체 무슨 수로 긱스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거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시안나는 시간을 두고 고민을 하기로 했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까.

***

식사 후 제 방으로 돌아가는 길.

시안나는 조금 전의 시간을 머릿속에서 곱씹으며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시안나가 삐뚤어진 원인은 공작이 분명해.”

소설을 읽을 때는 시안나가 바보 같다며 욕하느라 바빴다. 죽임을 당할 것이 뻔한데 왕자와 손을 잡질 않나. 공작 자리가 탐나 디트리히를 독살하지 않나.

그런데 방금 겪어 본 바로는.

“차별하는 공작이 문제야. 그래서 시안나가 디트리히를 질투한 거지.”

부푼 기대를 안고 공작저에 입성한 시안나는 찬밥처럼 대하는 공작의 태도에 실망했으리라.

그녀는 궁지에 몰렸던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긱스가 시안나를 데려온 까닭도 불순했다.

“저주에 걸린 디트리히를 돌봐 주라는 뜻으로 시안나를 데려온 거라면…… 시안나가 흑화한 원흉이잖아?”

가주 수업도 못 받게 할 정도면 정말 데려온 이유가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시안나를 옹호할 생각은 없었다. 소설 세계관에서 절절한 사연을 가진 인간이 한둘이 아니니까.

최애캐를 괴롭힌 인물을 사랑하기엔 디트리히에 대한 덕심이 더 컸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죽음을 피할 고민만 해서 그런지 머리가 아파 왔다.

“에이, 몰라. 일단은 막 빙의했으니까 디트리히랑 원 없이 놀아야지.”

술래잡기를 할까, 소꿉놀이를 할까. 아니면 사심을 넣어서 결혼식 놀이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복도를 걷는데, 주황빛 머리칼의 소년이 길을 막아섰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시안나 님.”

식당에서 그녀의 팔목을 잡은 소년이었다.

끈으로 질끈 묶어 어깨까지 늘어뜨린 주황색 머리칼. 미성숙한 소년을 온전한 기사로 만드는 흰색 기사복은 역시 디트리히의 호위이자 서브 남주 헤이스가 확실했다.

그녀보다 큰 키와 체격은 시안나보다 연상인 헤이스가 맞다고 거들었다.

시안나의 약혼자이면서 서드 남주라 마음을 종잡을 수 없는 사람.

독살 사건으로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저절로 상상돼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날 언젠가 죽일 수도 있는 남자라니…….’

오싹함이 빈말이 아닌 듯 회색 눈동자 너머로 알 수 없는 분노가 넘실거렸다.

아직 독살 시도는 먼 미래의 일이다. 그런데 왜 저리 매섭게 노려보는 걸까?

시안나는 알 수 없는 분노에 대응하려 부러 목을 꼿꼿이 세웠다.

“헤이스, 왜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얼굴로 보는 거야?”

당당한 시안나의 태도에 쥐색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냉기가 감도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련님을 괴롭히실 땐 언제고,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디트리히를 괴롭혔다는 말에 뜨끔했지만 한편으론 우스웠다.

뭐야. 지금 디트리히에게 살갑게 구는 것 때문에 노려보는 거야?

대단한 이유가 있는 줄 알았는데, 김이 팍 샜다.

긴장을 푼 시안나가 다소 여유로워진 태도로 팔짱을 꼈다.

“디트리히가 좋아서 친절하게 대해 주는 게 문제라고?”

“하. 두 번 좋아하시다간 디트리히 님 목숨이 남아나질 않겠군요.”

헤이스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안면을 일그러뜨린 뒤, 성큼성큼 경고하듯이 다가왔다.

두 사람은 한 발자국만 다가오면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가까워졌다.

“저번 주, 디트리히 도련님께 일부러 발을 걸어 넘어뜨린 걸 눈감아 드렸습니다.”

그의 하루는 디트리히로 시작해 디트리히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트리히가 방을 나설 때부터 곁에 따라붙는 것이다.

그런 그가 시안나가 은근슬쩍 디트리히에게 몹쓸 짓을 하는 걸 목도하고 말았다.

“그때, 뭐라고 변명하셨죠? 다가서다 발이 꼬여 버렸다는 황당한 이유였죠.”

증거가 없었기에 따로 공작에게 보고하지는 않았다. 사소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길 벌써 세 번째였다.

“우연이 몇 번이고 반복된다면 그 저의가 의심 가지 않겠습니까.”

그의 안광이 시안나를 찰싹 때렸다.

시안나는 속으로 끙끙거렸다.

‘이 몸은 지은 업보가 많구나.’

차곡차곡 부지런히 쌓아 놓은 업보에 눈물이 주룩 흘렀다.

시안나가 소년이 듣기엔 조악한 변명을 내뱉었다.

“지, 지금까지 행동으로 오해할 순 있겠지만, 이제부터는 동생처럼 대하기로 했어.”

“퍽이나요.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곧 죽을 때라고 합니다.”

“진짜야. 믿기 싫으면 말든가.”

헤이스의 눈꼬리가 뾰족 치솟자 시안나는 쩔쩔맸다.

저런 반응이 튀어나올 정도로 궁색한 변명이긴 했다. 헤이스에겐 디트리히를 은근슬쩍 괴롭힌 게 벌써 세 번째일 테니 말이다.

그래도 빙의했다고 말할 순 없잖은가.

“할 말이 그게 다면 이제 그만 비키지그래?”

그녀를 대하는 헤이스의 태도가 매우 고까워, 시안나는 일부러 어깨를 툭 밀치고 지나갔다.

헤이스에 대한 악감정은 없다. 오히려 서드 남주로서 에르마야와 이어지지 않는 슬픈 미래에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다고, 헤이스가 시건방진 태도로 구는데 그녀가 친절할 이유는 없었다.

곧 두 사람의 거리는 멀찍이 벌려졌다.

“……시안나 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 주겠습니다.”

헤이스가 멀어지는 시안나를 노려보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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