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4화 (4/70)

[4]

의문도 잠시 손가락은 벌써 볼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무서워하는 것 같으니 그만두는 게 좋다는 생각은 고양이 발바닥 젤리처럼 몰캉거리는 감촉에 훨훨 날아갔다.

어떡해. 볼살이 너무 뽀송뽀송하잖아!

“귀여워……!”

토끼 귀를 달아 주고 싶을 만큼 앙증맞은 모습에 시안나는 아예 두 손으로 양 볼을 조몰락거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시안나는 심장을 완전히 진정시켰다.

‘이렇게 행복한데 죽는다고? 말도 안 돼. 난 앞으로 디트리히 껌딱지가 돼서 내 눈에 매 순간 디트리히를 새겨 넣을 거라고!’

그러니까…… 날 죽이지 말아 줄 거지?

그녀는 제 생명줄이자 찹쌀떡처럼 찰싹 달라붙어야 하는 디트리히를 응시했다.

무언가를 원하는 은근한 눈빛에 디트리히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아아! 그렇게 보지 마! 볼살을 입에 넣고서 쮸압쮸압 거리고 싶어진다고.’

신체의 제어권을 빼앗긴 사람처럼 손을 뻗는데, 디트리히가 다시 한번 전기를 맞은 사람처럼 움찔거렸다. 끔찍한 두려움이 엿보였다.

“우…….”

‘뭐지?’

방금 전 흠칫거렸을 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반응이 영 찝찝했다.

두려워 보이는 시선이 제 손에 닿아 있었다.

‘설마…….’

충격적인 가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시안나, 이 녀석…… 애한테 손찌검한 거야?

소설에서 시안나는 디트리히를 좋아하는 동시에 시기 질투하고 있었다. 그녀의 추측이 정답인 듯 겁먹은 디트리히의 시선이 시안나의 손을 주시했다.

‘이러니 독살 사건의 진범으로 몰리기나 하지.’

소설에서 말 못하는 거로 창피를 줄 때도 어이가 없었는데 때리기까지 했다니.

속에서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우으…….”

시안나가 낯빛을 굳히자 디트리히의 눈동자가 울 것처럼 젖어 들었다. 그녀가 화를 낼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느낌이었다.

“헉. 미안. 디트리히한테 화내는 게 아닌데…….”

댕그란 눈에서 다시금 눈물 한 바가지가 쏟아질 걸 생각하니 마음이 텁텁해졌다.

입에서 불을 내뿜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시안나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근육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웃으니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던 디트리히의 표정이 펴졌다.

‘휴. 다행이다. 일단은 디트리히에게 내가 폭력을 쓰지 않는다는 걸 알려야겠어.’

디트리히가 놀라지 않게 시안나가 느리다 생각될 정도로 천천히 손을 뻗으며 허락을 구했다.

“디트리히……. 볼, 만져 봐도 되니?”

디트리히는 처음 보는 시안나의 모습에 조금 놀라 하는 듯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안나의 손이 뺨에 조심스레 닿았다.

손바닥에 말랑한 감촉이 느껴진 순간, 시안나는 세상이 멈춘 것만 같았다. 잠시 뒤 디트리히는 뻗어 오는 손에 제 뺨을 완전히 맡겼다.

부비부비.

한참 가만히 있던 디트리히가 어색하게 뺨을 비비어 온다.

선홍빛 볼때기가 복숭아 젤리처럼 뭉개져 손바닥을 말랑말랑하게 간지럽혔다.

“후으……. 누님.”

뭐야. 귀여워. 이 작은 생물체가 진정 나와 같은 인간이라니.

몽글한 기분을 느끼며, 시안나가 디트리히에게 단언했다.

“디트리히, 확실하게 말해 줄게. 이제 난 디트리히에게 못된 짓 같은 건 안 할 거야.”

“후으…….”

시안나에게 괴롭힘당한 게 떠올랐는지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금안에 시안나의 가슴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글자로 표면화되지 않은 디트리히의 어린 시절은 분명 쓸쓸했을 테지.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시안나의 학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으로 뭇 사람들에게 무시를 받았을지도.

시안나가 다짐하듯 디트리히와 눈을 맞추었다.

“걱정할 것 없어. 앞으로 내가 널 행복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남주 디트리히, 디트리히의 호위 기사 헤이스, 공작 긱스의 인정을 받아 제 목숨도 구하고 디트리히의 저주도 풀어 주겠어!

고개를 끄덕이며 결심을 굳히는데, 눈을 동그랗게 뜬 디트리히가 응시해 왔다. 그러고선 입을 오물거렸다.

“이제…… 아야 안 해?”

아야, 라니.

디트리히가 맞은 걸 아야라고 표현하는 걸까.

붉어지려 하는 눈시울을 간신히 참은 시안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아야 안 해.”

“아야 싫어……. 싫어.”

조그마한 입술이 아픈 게 싫다고 칭얼거리자 심장이 선득해졌다.

시안나는 소매로 디트리히의 흥건한 눈가를 닦았다.

“괜찮아. 이제 아야 안 할 거니까.”

“흐으……. 시안나 누님.”

디트리히가 시안나의 품에 안겼다. 동그랗게 몸을 말자 가슴 부근에 온기가 번졌다.

시안나는 이 조그마한 심장을 꼭 지켜 주겠다고 다짐했다.

똑똑.

그렇게 서로를 부둥부둥 껴안고 있는데, 스르륵 문이 열리고 시녀가 나타났다.

“도련님. 시안나 님. 식당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시안나는 디트리히의 손을 꼭 잡은 채 시녀의 안내를 받아 식당으로 향했다.

***

식당 문을 열자 후추 향이 시안나의 코를 자극했다.

식탁에 스테이크며, 스튜며 침샘이 고이는 진수성찬이 펼쳐져 있었다.

‘무슨 영화 촬영장 같네.’

파티에 온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날 정도였다.

“시안나. 앉질 않고 뭐 하는 거냐?”

화려한 만찬을 구경하던 시안나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상석에 앉은 남자를 응시했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은색 눈동자를 지닌, 20대 후반 정도의 남자였다.

시안나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디트리히?”

“뭐?”

남자가 험악하게 되물었지만 남자에 정신을 빼앗긴 시안나에겐 닿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곧 남자의 얼굴에서 어깻죽지까지 떨어졌다.

벨벳처럼 광택이 흐르는 검은색 머리카락. 움푹 파인 눈매에 길게 뻗은 콧날, 날카로운 턱선.

검은색 셔츠와 제복은 그의 인상처럼이나 품위 있고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근사한 외모도 감탄이 나왔지만 정작 그녀가 놀란 것은 따로 있었다.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설 표지에 그려진 디트리히와 판박이였기 때문이다.

‘아, 아냐. 찬찬히 살펴보니 살짝 분위기가 다르잖아?’

창백한 안색과 히스테릭한 느낌마저 드는 안광, 거무칙칙한 눈 밑은 건강한 디트리히와 달리 퇴폐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디트리히는 아직 어린 데 반해 남자는 20대 후반의 외모였다.

시안나는 그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긱스 아슈토르, 디트리히의 아버지인 공작이구나!’

디트리히 독살 사건에서 헤이스에게 그녀를 죽이라고 지시한 냉혈한이기도 했다.

“곧 애피타이저가 나오니 어서 앉거라.”

직접 들은 공작의 목소리는 시안나에게 일말의 흥미도 없는 듯 냉담 그 자체였다.

시안나는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공작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디트리히의 성장 버전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있을 리가.

‘역시 피는 못 속이네. 디트리히가 성숙해지면 저런 느낌이려나?’

시안나는 무심코 옆자리에 앉은 디트리히와 비교하다 음식을 깨작거리는 디트리히를 발견했다.

소년이 쥔 포크가 연어샐러드에 폭 박혔을 때, 시안나는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아참! 디트리히는 해산물을 먹으면 안 되는데!’

시안나가 디트리히 주변에 있는 음식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버터를 녹여 구운 대하구이. 보기만 해도 입 안에서 살살 녹을 것 같은 관자. 해산물을 넣고 푹 끓인 부야베스.

화려한 식탁이었지만, 디트리히에겐 전방에 폭탄이 깔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왕국은 바다와 거리가 있는 데다 동쪽만이 바다로 트여 해산물이 몹시 귀했다. 이 때문에 공작이 일부러 디트리히 주변에 해산물을 배치한 거로 보였지만 문제는 디트리히가 해산물 알레르기라는 거였다.

‘어릴 적이라 그런지 공작은 알레르기에 대해 모르는 것 같아.’

벌떡 일어선 시안나는 디트리히 주변의 해산물 접시를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시안나가 무얼 하나 싶어 지켜보던 공작의 눈썹이 사납게 올라갈 때였다.

영민한 기사가 시안나의 손을 붙들었다.

“시안나 님. 무엇을 하시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시안나의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 물었다.

접시를 치우던 시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밀감이 생각나는 주황색 머리카락, 리본으로 낮게 묶은 장발은 소설 속 중요 인물을 연상케 했다.

시안나의 머릿속에 기사 제복을 입은 남자가 떠올랐다.

“혹시…….”

시안나가 물으려던 찰나, 그녀를 주시하던 공작이 나이프를 내려놓고 경멸 어린 말투를 내뱉었다.

“해산물이 먹고 싶었다면 말을 하지 그랬니. 네가 뭘 모르는 모양이지만 공작저의 재정이 초라하진 않단다.”

그는 시안나가 해산물을 먹고 싶어 일부러 접시를 옮겼다고 착각한 듯했다.

어휴. 역시 시안나는 어릴 적에도 공작과 친하지 않았구나.

시안나는 접시를 옮기려다 말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오해하신 것 같은데, 디트리히는 해산물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금시초문인걸.”

“네. 저도 최근 들어 알았습니다.”

공작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고민에 빠졌다.

시안나의 말이 거짓일 수도 있지만 디트리히에게 알레르기 반응을 테스트해 보기도 영 꺼려진 탓이다.

“……그 말은 진실인 거겠지? 네가 개인적인 욕심으로 그러는 거라면 널 데려온 걸 후회할 것 같구나.”

어쩐지 방금 시안나에게 빙의한 그녀가 듣기에도 비수를 찌르는 말투였다. 눈빛 또한 그녀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 없었다. 시안나의 눈동자가 올곧게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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