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두 소년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시아는 등을 조금 더 떠밀어 주기로 했다.
“말 안 하면 난 말 더듬이인 네게 못살게 굴 거야. 그래도 문제없지?”
그제야 소년 중 한 명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때리고 토끼 인형을 빼앗은 거, 잘못했어.”
“미안해.”
사과의 말이 끝나자 조금 덩치가 커 보였던 소년이 손을 내밀었다.
촉촉했던 소년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잠시 주춤거리던 소년은 내밀린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수초가 흐른 뒤. 소년은 붉은 머리 소년이 자신을 놀리지 않는다고 깨닫곤 언제 울었냐는 듯 환한 웃음을 지었다. 흡사 비가 온 뒤 무지개 같았다.
“헤헤.”
잠시 뒤. 두 소년은 디트리히와 차분히 놀다가 정원을 구경하고 싶다며 방을 나갔다. 소년을 괴롭힌 데에 관해 뒤늦게 창피함이 엄습한 듯했다.
시안나가 말을 걸 때마다 말을 더듬지 않으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 건 덤이었고.
문이 닫히자 방 안은 더없이 고요해졌다.
“휴, 다행이다.”
사과할 줄 아는 거 보면 본성은 나쁜 아이들이 아닌 모양이었다.
시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옆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후으……. 누, 누님.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토끼 인형을 품에 소중히 안은 소년이 다가왔다.
누님이라니. 자신은 이 소설 속세계에서 소년의 누나인 걸까?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일단 그녀는 소년을 달래 주기로 했다.
“이 정도 가지고, 뭘. 너도 앞으로 괴롭히는 아이가 있으면 울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라도 다 해. 그러면 속상한 마음이 좀 풀릴 테니까.”
그녀가 손으로 파이팅 넘치게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소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릴 뿐이었다.
소년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렇지만……. 말, 더듬는 거…… 이상해…….”
“아니, 이상하지 않아. 아까 그 아이들도 떠듬거리며 말했잖아.”
“으……?”
“게다가 나도 말을 자주 더듬는걸.”
“누, 누님도요?”
발갛게 부은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당당하고 할 말을 제대로 하는 소녀가 말을 버벅댈 때가 있었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했다.
시안나의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여러 사람 앞에 서면 손에 땀도 차고 목소리도 제대로 안 나오고, 나도 너랑 비슷해.”
“후으……. 시, 시안나 누님.”
훌쩍거리는 소년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시아를 올려다보았다.
믿기지 않아 하면서도 그녀가 하는 말이기에 용기를 내려고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사건도 일단락됐겠다, 그녀는 이제 이 세계와 그녀가 빙의한 몸의 주인에 대해 궁금해졌다.
시아는 젖은 금안과 눈을 맞추고 친근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음, 그러니까 내 이름이 시안나라고?”
“우으……. 네. 누님.”
작고 앙증맞은 입술이 움직였다.
앞에 붙는 ’우으’나 ’후으’는 소년의 입버릇으로 보였다.
귀엽지만 열 살 넘어간 소년이 말하기엔 어색한 감이 있었다.
“혹시 네 이름은 뭐니?”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의문의 빛이 스쳐 지나간 것도 잠시, 소년은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흐……. 디트리히, 예요.”
“뭐라고? 설마…… 디트리히 아슈토르?”
소년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그녀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디트리히 아슈토르.
눈앞에 있는 소년은 소설 <에르마야의 비밀 일기> 속 남주, 디트리히의 어린 시절이었다.
‘진짜 읽고 있던 소설에 빙의한 거야? 그럼 여긴 디트리히네 집?’
이미 그녀는 확신에 차 있었다.
눈앞에 있는 소년은 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나이로 보였지만, 대답은 느리고 발음도 어눌했다. 저주에 걸려 성장하지 못한 소설 속 디트리히처럼.
소설 속에서 말을 어려워하는 남주는 드물기도 했다.
단순히 어려서 말을 못 한다고 생각했는데 디트리히일 줄이야.
방방 뛰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 낸 시아, 아니 이제 ‘시안나’가 눈물 닦는 소년을 관찰했다.
‘요리조리 뜯어보아도 디트리히 맞네, 맞아.’
칠흑같이 어두운 흑발에 유리구슬처럼 투명한 황금색 눈동자. 전체적으로 흐르는 귀티는 ‘나, 남주요’ 하고 외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아이를 본 순간 온몸에 일어나는 전율은 최애캐인 디트리히라는 것에 쐐기를 박았다.
‘내 심장은 디트리히만이 뛰게 만들 수 있으니.’
음. 방금 생각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발언인걸?
아무튼 최애캐가 나오는 소설에 빙의했다니 계 탄 것 같은 기분에 콧김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나, 시안나는 누구냐는 의문이 뒤따랐다.
문득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전신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홀린 듯 거울에 다가서자 그녀의 몸이 아닌 조그마한 소녀가 거울에 비쳤다.
‘헉. 설마 디트리히의 어린 시절이니까 나도 어린애가 되어 버린 건가?’
그제야 아까 새소리 같은 목소리도, 조막만 한 손도 납득이 갔다.
시안나는 꽃을 걸친 것 같은 예쁜 드레스를 주섬주섬 만졌다. 시폰의 미끈거리는 감촉에 손끝이 찌르르했다.
이번엔 허리까지 오는 긴 곱슬머리를 한 움큼 쥐었다. 나무에 돋은 새순이 이슬을 머금은 것처럼 온화한 연두색이 반짝였다.
“연두색…….”
분홍색, 흰색, 검은색 등…… 주인공 머리 색깔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엑스트라가 많이 하는 색이라니!
그런데 희미한 의식 너머로 누군가가 번개처럼 번뜩 떠올랐다. 그녀는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을 뻔한 걸 참아냈다.
“말도 안 돼!”
시안나 드뷘모르가. 남주를 죽이려다 도리어 죽임을 당하는, 남주와 함께 사는 엑스트라가 몸의 주인이었다.
그녀는 원작을 조금 바꾼 자신의 행동 때문에 혼란에 빠졌다.
‘뭐야? 나 그럼 남주인 디트리히에게 여주가 할 대사를 가로채 버린 거야?’
조금 전 말을 더듬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건 소설 속 여주의 대사였다.
그녀도 가장 좋아하는 대사여서 기억하고 있었다. 현실에서 부당한 상황이 종종 닥쳤을 때 힘을 북돋아 주는 마법의 주문 같았기 때문이다.
시안나는 제가 저지른 짓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일개 엑스트라가 남주가 여주에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결정적인 대사를 건네다니!’
아무리 눈앞의 소년이 디트리히인 걸 몰랐지만 큰 실수였다.
‘일단 진정하고, 시안나가 소설 속에서 어떤 인물인지 떠올려 보자.’
차분해지려는 의도와 달리, 원작을 곱씹을수록 머릿속에 먹구름이 그득하게 끼었다.
시안나는 디트리히를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질투하는 악녀 그 자체였다.
그녀는 어릴 적 불운한 사고로 두 부모님을 전부 잃게 되는데 그녀의 부모님과 친분이 있던 디트리히의 아버지, 긱스 공작을 따라 공작가에 오게 된다.
시안나는 공작에게 감사해하면서도 한편으론 디트리히를 시기한다. 부모의 사랑이 고팠던 탓에 공작의 사랑을 극진히 받는 그가 부러웠기 때문이다.
소설은 디트리히가 성인이 되고 디트리히의 저주를 치료하러 온 여주 에르마야가 공작저에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아까 말했지 않은가? 애증인지 뭔지 시안나는 디트리히를 질투하면서도 좋아했다고.
공작 자리가 탐났던 건지, 디트리히와 에르마야의 사이가 심상치 않아서인지.
시안나는 서브 남주 카릴에게서 독을 받고 디트리히를 독살하려 한다.
그러나 에르마야의 성력에 의해 디트리히는 치유되고 되레 시안나가 암살 혐의로 체포당한다.
최후의 발악으로 왕을 배후로 지목하지만 그게 먹힐쏘냐. 카릴은 꼬리를 잘랐고, 결국 디트리히의 호위 기사 헤이스에게 목숨을 잃는다.
꿀꺽. 눈앞에 제 머리가 댕강 잘리는 그림이 그려져 시안나가 침음을 삼켰다.
‘진정해. 아직 디트리히는 어리잖아. 생각해 보면 디트리히에게 여주 대사를 친 것도 잘한 일이고.’
원작대로라면 시안나는 디트리히 독살 혐의로 생을 마감하지 않는가. 디트리히와 어렸을 때부터 친분을 다진다면 죽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 집에서 시안나의 죽음에 관여하는 사람은 총 셋.’
첫 번째는 독살의 대상이 되는 디트리히. 만약 디트리히와 사이가 돈독했다면 독살 사건은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는 시안나를 직접 죽이는 헤이스.
소설에서 헤이스와 시안나는 약혼 관계였다. 하지만 공작의 명령에 그녀의 시체를 대령한 걸 보면 그저 형식적인 혼약인 듯했다.
만약 헤이스와 친했다면 그가 도피를 도왔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디트리히의 아버지인 공작 긱스 아슈토르. 왜인지 시안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그는 헤이스에게 그녀를 죽이라고 명령한다. 만약 신뢰를 잘 다져 놓았다면 카릴이 배후라는 시안나의 말을 들어줬을지도 모른다.
여주에게 무심해 보이는 약혼자, 왠지 시안나를 싫어하는 남주의 아버지. 그리고 디트리히. 세 사람 사이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직 디트리히 독살 사건이 일어나기엔 한참 이른 시점.
여주 에르마야와 디트리히가 만나기까지 많은 시간이 남았다.
‘10년 동안 모두와 친분을 마련해 두면 문제없을 거야!’
시안나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곁에 있던 디트리히가 그녀의 옷깃을 흔들었다.
“후으? 시안, 나…… 누님?”
“아, 미안. 잠시 생각 좀 하느라.”
상황을 이해한 시안나는 아까보다 더 디트리히를 찬찬히 살폈다.
‘처연해 보이는 속눈썹과 요정이 사는 것 같은 금빛 눈동자라니, 아기 천사 그 자체!’
눈물 젖은 금안에 희미한 신뢰가 엿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본의 아니게 디트리히를 구해 주었으니 조금은 마음을 사로잡은 거려나? 아직 방심하긴 이르지만.
그나저나 저 토실토실한 볼따구 만지고 싶어!
일단 최애캐 디트리히의 호감을 쌓아 숨통이 트였다는 생각이 들자 죽음에 대한 공포는 먼지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시안나의 숨이 저도 모르게 거칠어졌다.
“허억, 허억…….”
“으으……?”
무섭다고 여긴 건지, 디트리히가 한 발짝 물러섰다.
진정해. 애가 당황해하잖아. 근데 어쩜 놀라는 모습도 요정 같지?
“디트리히…….”
그녀는 홀린 듯 디트리히의 볼때기를 콕콕 찌르려 했다. 그런데 그녀의 손끝이 볼에 닿으려는 순간, 디트리히가 부르르 떨더니 몸을 뒤로 뺐다.
“으…….”
금빛 동공이 살짝 흔들린 것도 같았다.
‘어라? 왜 겁먹은 것 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