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어라? 여기가 어디지?’
갑작스럽게 개변한 주변 모습에 시아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숲속에서 아기 천사와 인간이 뛰어노는 태피스트리가 벽면을 가득 채운 고풍스러운 방이었다.
사슴의 헌팅트로피 아래로 잿더미를 품은 하얀색 벽난로, 벽마다 걸린 명화와 촛대.
제 머리 위 샹들리에는 고전 영화에 나오는 귀족의 저택을 연상케 했다.
‘뭐야? 꿈인 건가? 분명 내 방에서 이불과 한 몸이 되어 소설을 보고 있었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빈둥거리며 소설을 읽고 있던 시아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눈 씻고 쳐다봐도 일반 현대의 가정집이 아니었다.
……우리 집 어디 갔어?
퇴근만 바라보는 대한민국 평범한 직장인인 그녀의 이름은 김시아.
그녀는 최근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 푹 빠져 있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오늘도 그랬다.
회사를 마치자마자 쏜살같이 집에 온 그녀는 방금 전까지도 요깃거리를 먹으며 <에르마야의 비밀 일기>를 읽고 있었다.
“으허헉, 말도 안 돼, 디트리히! 죽지 마!”
시아는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코앞까지 바짝 당기었다.
남자주인공인 디트리히는 암살자 때문에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피 웅덩이 속에 몸을 누인 디트리히가 죽어 가는 모습이 생생해 과자가 넘어가질 않았다.
얼마나 정신없이 눈물을 쏟아 낸 걸까.
울음이 멎은 시아는 희뿌옇게 변한 시야를 손등으로 쓱쓱 문질렀다.
흐릿하게 보이는 방 안 풍경이 조금 낯설었다.
의아함을 느꼈을 때, 불현듯 촛불에 양초 타는 냄새가 그녀를 반겼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왠 프랑스 귀족의 방 같은 곳에 있었다.
시아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떴다.
여긴 어디야? 꿈이라도 꾸는 거야? 아니면 순간 이동이라는 게 실재하는 거야?
볼을 꼬집던 그녀는 곧 평범한 사람이면 코웃음 칠 만한 말도 안 되는 가설이 떠올랐다.
“설마…… 내가 읽고 있던 소설에 빙의한 건가?”
보통 사람이라면 꿈이라고 결론을 내렸겠지만, 빙의로 시작하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시아는 책 빙의라는 엉뚱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니, 이건 웹소설 빙의인가? 아무튼.
말도 안 되지만 그것 말고는 갑작스럽게 변한 풍경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에르마야의 비밀 일기> 소설 속이라면 지금 여기는 어디지? 여주 에르마야의 집? 일단 내가 누구로 빙의했는지가 가장 중요한데.”
빙의한 지 1초 만에 적응한 그녀가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는데 따가운 울음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으윽, 흑, 돌, 돌려줘. 흐윽.”
아직 변성기가 채 가시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니, 네모난 테이블 근처에서 두 소년이 한 소년을 에워싼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분위기로 봐서는 덩치 큰 소년 둘이 쪼그마한 애를 구박하는 것 같은데?’
울먹이는 소년은 코끼리 사이에 끼인 소동물처럼 보였다.
그러다 시안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년들이 외국에 놀러 왔나 싶을 정도로 특이한 외향이었기 때문이다.
촌스러운 붉은색 머리칼을 한 코끼리 소년은 크라바트에 브로치를 차고 있었고, 레깅스처럼 짝 달라붙는 희한한 바지 차림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차림도 만만치 않게 요상했다.
가슴께에 큼지막한 리본. 장미와 덩굴이 빼곡히 새겨진 하늘색 치맛자락. 프릴이 생크림처럼 수놓아진 드레스는 로판에 나오는 귀족 그 자체였다.
그러고 보니 손도 조금 작은 것 같…….
혼란스러운 와중에 소년의 울먹임이 커졌다.
“흐으……. 돌려줘. 내, 내 거, 흑. 내 거…….”
소년이 서럽게 울어도 소용없었다. 짓궂게 생긴 소년은 하얀 토끼 인형을 흔들며 더욱 약을 올렸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토끼 인형이야?”
“똑바로 말하라고! 못 알아듣겠잖아!”
인형은 체구가 작은 소년의 물건인 듯했다.
소년이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인형을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세 사람을 찬찬히 살펴보던 시아의 시선이 소년에게 닿았다. 순간 그녀의 심장이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었다.
‘헉! 인형이 인형을 잡으려고 하고 있잖아!’
열 살이 넘어 보이는 소년은 까만 양 인형처럼 귀여웠다.
단정한 검은 머리칼은 구체 관절 인형처럼 단정하고 윤기가 흘렀으며 오뚝한 코와 앵두 같은 입술은 세상 모든 깜찍함을 긁어모아 창조한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벌꿀색 눈동자에서 꿀 대신 눈물이 넘쳐흐르는 모습에 가슴이 미친 듯이 아려 왔다.
“내 거, 내 거…… 돌려줘!”
소년이 토끼 인형에 손을 뻗어 껑충 뛰어올랐지만 헛수고였다.
“흐윽, 어, 어머니가…… 주신 거…… 줘!”
하늘색 리본을 맨 하얀 포엣 셔츠 위로 회색 자국이 뚝뚝 생겨났다.
붉은 머리칼의 두 소년이 악당처럼 키득거렸다.
“공작 부인도 네 저주 때문에 돌아가신 거 아니야?”
“그러니까. 공자 때문인 거 아니야?”
“으극, 아니야. 하지, 마. 윽. 끅.”
공작 부인은 아이의 어머니를 가리키는 걸까.
소년이 엉엉 목 놓아 울자 방 안은 금세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너무하잖아. 자기보다 쪼그마한 애를 괴롭히다니!’
시아는 불의를 보면 눈에 불을 켜는 성격…… 은 아니다.
차가 지나다니지 않으면 무단횡단을 하고, 길거리에 쓰레기가 굴러다녀도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 같은 소년이 눈물을 흘리니 동정심이 일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일단 도와주자.’
더 두고 보지 못하겠다고 결론을 내린 그녀가 두 아이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시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경고했다.
“야. 거기! 너희 둘! 덩치만 커다란 놈들이 작은 애를 울리면 되겠어? ……어라?”
화를 내던 것도 잠시, 시아가 제 목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응? 이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는 뭐야?’
그녀는 24살의 회사원이었다.
그런데 이 소녀같이 가냘픈 음성은 무어란 말인가? 종달새나 꾀꼬리가 노래하는 것처럼 높은 톤이었다.
‘게다가 어째 두 코끼리 꼬맹이들이 나보다 키가 큰 것 같은데…….’
머릿속에 물음표가 둥둥 떠다닐 때, 한 소년이 갑자기 끼어든 그녀에게 노발대발했다.
“뭐야! 아까까진 가만히 있었으면서!”
“맞아! 뭐든지 간에 지켜보겠다고만 했잖아. 얹혀사는 주제에, 가만있어!”
가만히 있어? 얹혀살아? 소설 속에서 얹혀사는 캐릭터가 있었나?
빙의라고 성급히 결론지은 시아는 골몰하기 시작했다.
얹혀산다는 건 빙의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큰 힌트였다.
누구로 빙의한 건지 한참 머리를 굴리는데, 주먹밥만 한 손이 드레스 자락을 붙잡았다.
“후으……. 시안나, 토끼…… 구해 줘.”
한바탕 울음을 쏟아 낸 소년이 그녀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날 시안나라고 부른 거야?’
그녀의 옷깃을 움켜쥔 걸 보니 그런 모양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봐도 시안나라는 인물은 소설에서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아이들부터 말리고 보자.’
그녀는 인형을 가지고 약을 올리는 두 붉은 머리 소년에게 다가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괴롭히던 소년은 작은 소년과 비교해 체구가 머리 하나 이상 차이가 났다.
저보다 조그마한 애를 괴롭히다니, 안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들끓는 속을 꾹 참고 시안나가 좋은 말로 타일렀다.
“너희, 인형 주인이 싫다고 하잖아. 왜 이 아이를 못살게 구는 거니?”
그러자 두 소년의 고개가 시안나에게 돌아갔다. 그들은 훌쩍이는 소년을 척 가리켰다.
“저 애랑 이야기하면 답답하고 짜증 나요.”
“맞아. 쟤는 말도 제대로 못 해서 싫어요.”
아이들이 질 나쁜 웃음을 지으며 킬킬댔다. 아무리 봐도 쉽게 소년과 어울려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음. 요 쥐방울만 한 꼬맹이들의 마음을 어떻게 되돌리지?
두 소년이 어른스러운 분위기였다면 차근차근 대화로 화해를 이끌어 갔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아이들은 척 봐도 장난꾸러기였다.
어떨 땐 아이가 더 잔인할 때가 있다. 어른이라면 겉모습 외에도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 때문에 예의를 두르고 처신하지만 아이들의 세계엔 질서가 없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거로 모든 걸 판단한다.
두 소년은 자신보다 덩치가 작다는 이유로 작은 소년을 한껏 짓밟아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설교한다면 앞에선 수긍하는 척하며 뒤에선 소년을 괴롭힐지도 모른다.
하아, 무슨 수로 이 고집불통인 애들을 잘 설득하지?
그때, 머릿속에서 전구가 번쩍 들어왔다. 잠시만, 쉬운 방법이 있잖아?
그녀가 드디어 입을 뗐다.
“말 못하는 게 왜 싫어? 애가 말 좀 못한다고 피해 주는 것도 아니잖아.”
한 소년이 아기 새처럼 쫑알거렸다.
“싫어하는 게 당연하죠. 말하는 게 답답하잖아요.”
“답답해서 네가 피해 본 거 있어?”
시안나가 막힘없이 되받아치자 소년이 주춤거렸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피해 본 것도 없는데 왜 싫어해? 저 애가 말 더듬든 말든 너랑 상관없잖아.”
“그래도……. 말이 안 통하니까, 짜, 짜증도 나고, 또…….”
소년은 쩔쩔매면서도 제 의지를 끝까지 관철하려 머리를 굴렸다.
이상한 건 눈앞의 소녀였다.
말을 더듬는 사람을 싫어하는 데 무슨 큰 이유가 필요하다고 꼬치꼬치 캐묻는단 말인가.
소년은 소녀와의 말싸움에서 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소녀와의 말다툼에서 밀리면 저 어눌한 남자애에게 지는 것 같았다. 그건 치욕스러웠다.
절대 사과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이미 소년은 그녀의 덫에 걸린 뒤였다.
시아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너, 말 더듬었어.”
“어?”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그제야 소년은 자신이 무의식중에 떠듬거렸다는 걸 깨달았다.
이럴 수가. 설마 아까의 꼬투리는 논리적으로 반박하려던 게 아닌 말실수를 노린 거였나?
시아의 눈동자에 장난스러운 빛이 스쳤다.
“네가 말을 더듬으니까 난 널 무시하고 놀려도 문제없는 거지?”
“그건…….”
“네가 말을 더듬는 사람과 이야기하면 답답하고 짜증 난다고 그랬잖아. 그러면 나도 네게 짜증 내도 되는 거 아니야? 방금 네가 저 소년에게 화냈던 것처럼.”
소년은 바지를 움켜쥐었다.
긍정했다간 자신을 놀리는 걸 허락하는 꼴이었고, 아니라면 제가 소년에게 사과해야 했다.
작은 소년은 어느새 눈물을 그치고 멀찍이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아는 소년의 손을 잡고 두 붉은 머리 소년 앞으로 이끌었다.
그녀가 소년의 어깨를 짚으며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자, 두 사람. 이 아이한테 할 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