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두가 잠든 시각.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어둠만이 가득한 방이었다.
끼익. 서늘한 밤공기를 가르고 문이 열렸다.
작은 소리였건만 곤히 잠든 새벽에는 더없이 날카로운 소음이었다. 침대에 잠들어 있던 시안나의 정신을 일으켜 세울 만큼 컸다.
시안나는 섬찟한 소리에 의식을 차리고 바짝 숨을 죽였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구두 굽 소리가 침대로 다가오자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적막한 공기를 낮은 목소리가 갈랐다.
“누님. 주무시는 겁니까?”
고막이 예민해지고 묵직한 긴장감이 전신을 훑었다.
“아니면, 제가 깨워드려야 할까요?”
시안나는 낯선 침입자의 정체를 눈치챘다.
말소리만으로 심장을 떨리게 만드는 건 디트리히뿐이었다.
밖에 개미 한 마리 지나다니지 않는 야심한 밤.
터져 버릴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며 시안나는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차가운 밤하늘 향기가 그녀의 코끝에 스쳤다.
“디트리히……. 돌아왔구나.”
새카만 어둠 속에서 흑진주처럼 까맣게 빛나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먹물보다 짙은 흑발은 비단처럼 윤기 있고 단정했으며 시리게 끓어 오는 금색 눈동자는 순금보다도 찬란했다. 날렵한 콧날에 미려한 턱선은 그를 조각상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고매한 예술품 같은 그를 보고 있노라면 심장에 서늘한 바람이 들이닥쳤다. 입매가 잔뜩 비틀려 있는 탓에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이다.
시안나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일어나 계셨습니까? 누님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그가 시안나의 손등을 추어올리곤 고개를 내렸다.
연신 입을 맞추는 모습이 꽤 부드러웠다.
애석하게도 그녀를 소중하게 대하고 있었지만 시안나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예의 바른 태도는 맹수가 제 발톱을 숨겨 초식 동물을 안심시키는 것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디트리히 아슈토르.
아슈토르가의 공작이자 오랜 시간 그녀와 함께 자란 남자였다.
어렸을 적 시안나는 아픈 디트리히의 놀이 상대 겸 보호자로 이 아슈토르 공작저에 오게 되었다. 디트리히가 저주로 인해 정신적 성장이 멈춘 탓이었다.
두 사람은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본다면 진짜 남매 사이로 알 만큼 사이가 돈독했다.
시안나의 눈꺼풀에 어릴 적, 닭고기 푸딩을 우물거리며 방긋방긋 웃던 디트리히가 선명히 그려졌다.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 기억이었다.
그래서 지금 시안나를 억압하고 감금하는 게 제 동생 같던 디트리히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슬그머니 손을 뺀 뒤 손등을 문질렀다.
“생각보다 일찍 왔구나. 분명 내일 저녁때에 도착한다고 하지 않았니.”
“제가 늦게 오길 바라셨던 거로 들립니다.”
굵은 눈썹 아래 호박빛 눈동자가 위험한 빛으로 일렁였다. 잠시 뒤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누님…….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시면, 서운합니다.”
그다지 기뻐 보이지 않는 시안나의 태도에 디트리히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할 때면 그는 제 안의 짐승을 다스리느라 안간힘 써야 했다. 그녀를 아프게 만들어서라도 슬픈 표정을 게워 내고 싶은 사나운 충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질색하는 건 당연했다. 그녀를 예고도 없이 가두고 바깥 풍경 하나 못 보게 만든 장본인이 자신이었다.
들끓는 불길을 겨우 잠재운 그는 부스스한 연둣빛 곱슬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제가 보고 싶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떨어져 있는 매시간이 그리웠는데…….”
열기를 띤 손길이 귓바퀴에서 흘러내려 귓불을 지분거렸다. 시안나의 코에 밤하늘 같은 체향이 흘러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였다.
탁!
시안나가 단호하게 디트리히의 손을 쳐냈다.
“영지 외곽을 간 게 아니라 연회에 다녀온 것 같구나.”
당연하게도, 경계 부근선에서 막 귀환한 그는 갑옷 차림이었고, 알코올 냄새는 단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차라리 술에 취한 거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 사실이 시안나의 심장을 더욱 뜀박질 치게 만들었다.
“네게는 에르마야가 있잖니. 얼른 방에서 나가.”
성녀 에르마야.
성력으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건 기본이요. 팔, 다리가 잘린 사람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 주는 등의 온갖 기적을 행하는 여성.
신의 사자라 불리는 그녀의 초월적인 힘은 디트리히의 저주를 치료하기까지 했다. 결국 두 사람은…….
일순 그의 눈동자가 굳어졌다. 조금 이골이 난 것처럼 보이는 그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하하……. 아직도 그 소리이십니까, 누님.”
손바닥 사이로 짙은 허기가 진 금안이 환하게 빛났다.
“성녀 이야기는 더는 하지 마십시오. 제게는 누님밖에 없다고 몇 번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안, 안돼…… 읏!”
픽, 비소와 동시에 검은 장갑이 거미줄처럼 어깨에 들러붙었다. 구속하는 손아귀에 가냘픈 슈미즈가 처참히 구겨졌다.
디트리히가 버둥거리는 시안나에게 고개를 내렸다.
이윽고 쪽, 하고 소리 날 정도로 목덜미가 빨렸다.
파들파들 떠는 모습조차 사랑스럽다는 듯 그의 눈매가 늘어뜨려졌다.
하지만 그건 사냥의 전조 단계였기에, 디트리히는 잽싸게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그는 완전한 포식자였다.
“윽!”
혀가 목선을 기는 감각은 언제나 묘했다. 시안나가 마구 발버둥 쳤다.
“디트리히, 저리…….”
형용할 수 없는 감각에 쿵쿵 가슴을 쳐 보았지만 남자는 어느새 산처럼 그녀를 덮고 있었다. 잘 뻗은 코가 목덜미 깊숙이 박혔다.
피부 가득히 체향을 들이마신 그가 몽롱한 음색으로 속삭였다.
“누님은 모르실 겁니다. 당신과 떨어져 있는 동안 제가 얼마나 누님을 갈구했는지.”
초록 잎 향기가 아른거려서 그 먼 길을 단숨에 달려왔다.
그녀의 숨결이, 목소리가, 체온이 유일한 정신 안정제였다.
“하루만 빼 놓아도 미쳐 버릴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옭아맨 시안나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당연하다고, 디트리히는 속으로 자조했다.
유년 시절, 그는 말을 똑바로 하는 것조차 힘들었고, 누가 뇌를 손으로 헤집어 가지치기 당하는 것처럼 머릿속 생각도 뚝뚝 끊겼다.
그런 그의 곁을 시안나가 미련할 정도로 함께 있어 주었다.
느리고 어눌한 말을 노랫소리처럼 즐겁게 감상했고, 그가 잠이 들 때까지 기다려주는 밤을 파도처럼 반복했다. 시녀들조차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더듬거리는 말을 끝까지 들어 준 사람은 그녀뿐이다.
시안나는 그에게 안온한 바다였으니 갈망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것 말고도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는 더 있었지만…….
이것만으로도 그녀의 발끝만 눈에 담아도 디트리히의 심장이 아플 정도로 휘청이는 건 충분했다. 생사를 오고 가는 전쟁보다 그녀를 안는 순간이 더욱 흥분되었다.
입가에 나온 만족스러운 숨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읏, 하아, 디트리히……. 저리 가…….”
시안나가 허우적거리며 그를 밀어냈다.
계속되는 반항에 디트리히가 얼굴을 떼어 내고 이를 악물었다.
“왜 제게서 빠져나가려고 하시는 겁니까? 저번처럼 왕과 오붓이 밀회라도 나누실 작정입니까?”
“그건 오해…….”
“아니면, 설마 약혼자가 구하러 올 거라고 믿는 겁니까?”
시안나가 다른 남자와 입 맞추는 장면이 그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심장이 문드러지게 아프자 그녀를 온전히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불을 지폈다. 그녀의 신체를 가두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디트리히가 몸에 체중을 실었다.
“아…….”
몸이 완전히 남자에게 짓눌리자 호흡이 막혀 배가 들끓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새까만 어둠에 잡아먹힌 것처럼 헐떡였다.
자꾸만 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반항할 의지를 잃어 벌려진 두 다리 사이를 디트리히가 옆으로 밀었다. 침대가 삐걱거렸다.
“제 마음에 오로지 누가 들어가 있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힐난 섞인 목소리와 함께 여린 살결을 짓씹었다.
시안나의 목덜미가 알레르기가 난 것처럼 부어올랐다.
쪽, 쪽. 눈에 띄게 붉은 자국에 디트리히가 만족스럽다는 듯 얼굴을 들었다.
그다음 그가 향한 곳은 치마였다. 검은 장갑이 시스루 원단 위를 훑었다.
“읏, 그만! 너에겐 에르마야가…….”
이상한 기분에 한숨을 내쉬던 시안나가 발작하듯이 몸을 뒤틀었다.
“그런 여자는 관심 없습니다. 그딴 잡기술을 쓰는 사람보다 오랫동안 곁에 있어 준 누님이 훨씬 좋으니까요.”
어이가 없었다. 자신과 몸을 섞은 마당에 다른 여자 타령이라니.
디트리히가 아랫배를 지그시 누르며 그녀를 억압했다. 장갑 아래로 그녀를 덧대는 것만으로도 디트리히는 가슴이 벅찰 만큼 빠듯해졌다.
시안나는 묵직한 압박감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정신없이 도리질을 쳤다.
“그딴 잡기술이라니. 무려 성녀님이셔. 널 치료해 준 사람에게 무슨 막말을, 읏!”
“저주에 걸렸을 적이 더 좋았습니다. 누님이 저에게만 온정신을 쏟아 낸 그때가……. 그 여자만 없었더라면 누님은 계속 저만 바라보셨겠죠.”
저주에 걸렸을 적이 마음에 든다는 말은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시 저주에 걸리고 싶습니다. 그럼 누님께서 오롯이 저만 바라봐 주실 테니까요.”
시안나와 종일 붙어 있던 어릴 적을 생각해 낸 건지 그의 눈매가 깊어졌다.
어둠 속에서 행복에 잠긴 디트리히의 미소에 시안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우월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 예술품처럼 수려한 외모. 신의 작품 같은 그를 밀어내는 행위는 죄악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결국 시안나는 남자의 숨결을 느끼며 생각에 빠졌다.
‘어째서 남주 디트리히가 여주 에르마야가 아닌, 내게 집착하는 걸까.’
그렇다. 그녀는 빙의자였고, 이곳은 소설 속 세계였다.
그녀는 처음 디트리히와 만났을 적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끝내 그를 거부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