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7화
소냐는 조금 전에 보았던 작은 도련님, 조프리에 관한 이야기를 할지, 말지 망설였다. 비밀로 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까?
‘공작 부인께만 비밀로 하면 되겠지, 뭐. 아무리 부주방장님이라고 해도 공작 부인께 시시콜콜 그런 걸 말하러 가시겠어?’
“그게…… 아까 뒤뜰에서 이 댁의 도련님을 뵈었거든요.”
“도련님? 아, 조프리 소공작님을 말하는 거로군.”
헉, 그분이 소공작이었어? 그냥 어린 아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댁의 후계자였다니.
후계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몰래 완두콩을 버리고 있었다고 말을 해도 되는 건가…….
“그게요, 아까 뒤뜰에서 도련, 아니…… 소공작님을 뵈었는데, 그분이…….”
소냐의 말을 들은 요아킴의 표정은 미묘했다. 웃음을 터뜨릴 것 같기도 한 동시에, 왜 그런 것을 나에게 말해 주냐는 부드러운 질책을 담은 눈빛으로 소냐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저, 그래서…… 혹시 공작 부인과 공작님께서 너무 엄하신 건 아닌지. 먹기 싫은 것을 너무 억지로 먹게 하면 아이들이 오히려 식사를 꺼리게 될 수도…….”
“네가 어떤 의도로 내게 이런 고자질을 하는지는 알겠어, 소냐.”
소냐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고, 고자질이라뇨! 그런 게 아니라 저는……!”
“소공작님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지? 그런데 너는 내게 그걸 말했잖아. 그건 고자질이지.”
“그…… 그건 그렇지만, 전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걱정되는 마음은 알아. 그러니까 널 책망하지는 않겠어. 소공작님에 대한 것은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까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 그리고.”
돌아 나가려던 요아킴이 발을 멈추고 소냐를 보았다.
“공작님과 마님께서는 꽤 온화한 편이셔. 아이들을 억지로 학대하거나, 그런 분들은 아니시지. 다만 아이들이 음식을 가리고 함부로 버리는 건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들일 뿐이야.”
“…….”
“그럼 잠시 숨 돌리고 내려와.”
요아킴은 그런 말만을 남기고는 소냐를 빈 방에 혼자 내버려 두고 나가 버렸다.
작은 방 안을 둘러보던 소냐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렇게 큰 집에 살면서, 그것도 고귀한 공작 가문인데 음식을 가리거나 버리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니, 우습기도 하고 믿기지도 않는 일이다.
* * *
짐을 대강 풀어놓을 때까지 함께 방을 쓴다는 루비라는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소냐는 별수 없이 앞치마와 모자를 쓰고 혼자서 주방을 찾아 내려갔다.
고용인 숙소라고는 해도 워낙에 방이 많고 복도가 복잡해 자칫하다가는 길을 잃을 것 같았다. 요아킴과 함께 걸어왔던 길을 되짚으며 주방을 찾아가는데, 갑자기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어린 여자아이가 모퉁이 너머에서 톡 튀어나왔다.
“아!”
놀라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소냐는 순간적으로 여자아이의 옷차림을 눈으로 훑었다. 불꽃 같은 오렌지색 드레스에 곱슬곱슬한 빨간색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아이였다.
“어? 누구지? 새로 온 요리사인가?”
여자아이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냐는 반사적으로 그 아이 역시 공작의 자식임을 깨닫고 얼른 허리를 숙였다.
“소냐라고 합니다.”
“소냐! 그렇구나, 견습 요리사가 한 명 더 올 거라고 하더니 바로 너였어. 루비 있어?”
“네? 아, 저…… 아니요. 심부름을 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뭐야, 빨리 온다고 했으면서. 그럼 별수 없이 소냐가 나랑 같이 가 줘야 하겠네!”
“네? 가, 가다뇨? 어딜요?”
“어디긴? 주방이지!”
여자아이는 소냐가 당황한 것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녀의 손을 잡고 마구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대체 뭐지? 공작의 딸이 아닌가? 아니, 하지만 입은 옷을 보면…… 공작의 딸이라면 왜 주방 같은 곳에……?
“요아킴! 나 소냐랑 같이 단풍 사탕 만들래!”
소냐를 끌고 주방으로 들이닥치다시피 한 여자아이를 보고서도 요리사들은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아마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인 듯, 다들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던 일을 계속할 뿐이었다.
“일레인 아가씨, 말씀드렸잖습니까. 지금은 단풍 사탕을 만들 수 있는 계절이 아니라니까요.”
“수액 모아 놓은 거 다 알아! 그걸로 만들면 안 돼?”
“그건 다른 데에 쓰려고 모아 놓은 수액인지라 사탕 만드는 데에는 사용할 수가 없어요.”
“피이, 뭐야. 그럼 다른 간식거리를 만들래.”
그러더니 일레인이라는 여자아이는 소냐의 손을 톡 놓고는 마치 제 방인 양 주방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칼이며 불, 온갖 위험한 것들이 널려 있는데도 겁조차 먹지 않는다. 오히려 소냐가 안절부절못하며 일레인의 뒤를 따라다닐 지경이었다.
“저, 저기…… 아가씨? 이…… 일레인 아가씨?”
“응, 왜?”
“저어, 여긴 위험한 것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저기, 나가서 노시는 게 어떨까요?”
“난 여기가 좋아. 재미있는 게 많단 말이야. 요아킴, 나 감자 깎아도 돼?”
“괜찮지만 숟가락을 쓰셔야 해요. 감자 깎는 칼은 못 드립니다.”
“좋아, 알겠어.”
소냐는 머리가 핑핑 돌 지경이었다. 지금부터 이 여자아이가 뭘 한다고?
숟가락으로 감자를 깎는다고?
“어이, 소냐! 너도 뭐 하고 있냐! 아까 양파 까 놓으라고 한 건 벌써 잊어버렸어?”
“아, 아닙니다!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소냐는 차가운 물에 손을 씻고 후다닥 양파 더미 옆으로 가 앉았다. 그러고 나니 감자를 까는 일레인과 나란히 앉게 되어, 마치 이제 갓 주방에 들어온 햇병아리 견습 요리사 둘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물론 일레인이 입고 있는 옷으로는 견습 요리사 흉내를 내긴 무리였지만.
일레인은 테두리가 무뎌진 스푼을 쥐더니 흙을 씻어 놓은 감자를 요령 좋게 긁어 가며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보고 있던 소냐는 일레인의 감자 깎는 실력에 너무 놀란 나머지 양파 껍질을 쥔 채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소냐! 속도가 너무 느려!”
“으악, 죄송합니다!”
허겁지겁 양파를 까는데 갑자기 뒤뜰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데없는 소음에 주방의 요리사들이 고개를 번쩍 든 순간, 뒤뜰로 이어진 문이 열리면서 일레인보다 좀 더 작은 남자아이가 도토리처럼 데구르르 굴러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키 큰 여자 한 명이 성큼, 주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마님, 소공작님!”
‘마님?’
소냐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 순간, 감자를 깎고 있던 일레인이 손을 탁 털어 버리고는 여자에게 달려가 치마폭을 싸안았다.
“엄마!”
‘엄마? 그럼…… 그럼 저 사람이 공작 부인이야?’
소냐는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양파를 손에 쥔 채 멍청하게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다가, 얼른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공작 부인은 일레인과 같은 빨간 머리였다. 불타는 것 같은 단풍색, 풀어 놓으면 풍성하게 굽이칠 머리를 하나로 틀어 올려 보다 깔끔해 보인다. 대체 뭘 했는지 드레스 밑단에는 군데군데 흙이 묻어 있었고, 무엇보다도 손에 들고 있는 저건…….
“앗!”
소냐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조그만 신음이 튀어나왔다. 공작 부인의 손에 들린 흙투성이 완두콩과 당근 조각들을 본 탓이었다.
“조프리 너 이 녀석, 당장 일어나서 요리사들에게 사과하지 못하겠어?”
공작 부인이 말했다. 그러자 소공작, 조프리는 울상이 된 채 비틀비틀 일어나 무릎을 톡톡 털고는, 저를 내려다보는 요리사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뭐가 미안한지 똑바로 말해야지.”
“……애써서 만들어 준 음식인데…… 몰래 버려서 미안해요.”
요리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분위기로 보아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수석 요리장인 프레드가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앞으로 나섰다. 그는 조프리의 조그만 손을 꼭 잡아 주면서 그와 눈을 맞추었다.
“도련님, 도련님께서 싫어하시는 음식이 있다는 걸 저희도 압니다. 좋아하는 것만 드시게 하고 싶은 마음도 왜 없겠어요. 하지만 도련님처럼 어린 분들은 싫어하는 음식도 꼭 챙겨 먹어야 어른이 될 수 있답니다. 튼튼한 어른 말이죠.”
“아버님처럼?”
“그래요, 공작님처럼. 그러니 앞으로는 싫더라도 조금씩 드세요. 그리고, 음식을 함부로 버리면 안 된다고 전에도 말씀드렸지요?”
“응…….”
어린 조프리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죄책감을 느낀 소냐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조프리와 소냐의 눈이 마주쳤다.
“아!”
“…….”
축 처져 있던 조프리의 눈매가 위로 휙 치켜 올라갔다. 조프리는 조막만 한 주먹을 쥔 채 소냐 앞으로 다가오더니,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작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 배신자!”
요리사들이, 아니 공작 부인까지도 소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소냐가 당황한 사이 조프리는 귀여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달아나고 말았다.
“아, 저기…… 그…….”
“새로 들어온 요리사니?”
공작 부인이 말했다. 소냐는 긴장한 나머지 얼어붙은 꼴을 한 채 딱딱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소…… 소냐 킨이라고 합니다. 저, 추, 추천서를…… 가지고 왔었는데…….”
“아, 내 앞으로도 한 통 왔어. 아주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다지? 하지만 공작가에서는 누가 들어오든 견습부터 시작하게 되어 있어. 그러니까 너무 억울하게는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해. 실력이 그만큼 좋다면 금방 견습 딱지를 뗄 수 있을 테니까. 알겠니?”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조프리에 대한 걸 귀띔해 준 건 고마워. 저 녀석, 요즘 들어 편식이 더 심해졌는데 눈치 보면서 빠져나가는 기술만 늘어서 말이야. 앞으로는 식사 때마다 옆에서 지키고 있든가 해야지, 안 되겠어.”
왠지 가슴속을 쿡, 찌르는 듯한 말이다. 소냐는 ‘배신자!’라고 외치던 조프리의 억울한 눈빛을 다시 떠올리면서 불편한 마음에 발끝을 배배 꼬았다.
공작 부인은 그런 소냐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거침없이 요리사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 메뉴는 뭐지? 거위와 양이 들어왔다고 하던데.”
수석 요리장인 프레드가 그녀를 뒤따르며 말했다.
“거위를 메인으로 할까 합니다. 예전에 마님께서 왕궁 연회에서 선보이셨던 바로 그 요리요. 안에 치즈도 넣고…….”
“아, 그거. 좋아. 그럼 양은?”
“스튜와 마렌용으로 각각 나누어 두었습니다.”
소냐는 멍한 표정으로 공작 부인과 프레드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대체 왜…… 저런 귀부인이 주방에서 요리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