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저, 주방에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이에요.”
헬레이나가 신기하다는 듯이 주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도 귀족 아가씨인지라 일은 전혀 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체리아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헬레이나에게 루비가 쓰던 모자와 앞치마를 건네주었다.
“자요, 나랑 같이 간식 만들죠.”
“네! 저, 그런데…… 마, 말씀은 편하게 해 주세요. 아무래도 저는 시녀이고…….”
“……알겠어요. 아니, 그래. 알겠어. 그렇게 할 테니까, 너도 날 너무 조심스럽게 대하지 않아도 돼. 알겠니?”
아체리아의 말에 헬레이나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이대가 비슷해서인지 루비와 좀 닮은 구석도 보이는 듯했다.
‘그렇게라도 익숙해져야지.’
그렇게 생각한 아체리아는 헬레이나를 세워 둔 채 직접 선반으로 가 식재료들을 꺼내 왔다. 밀가루, 달걀, 햄, 연어 토막과 양파, 버터와 크림, 초콜릿…….
“저, 아체리아 님. 뭘 만드실 거예요?”
“보다 보면 알게 될 거야. 자…… 초보자는 칼이나 불을 쓰는 게 위험하니까, 이걸 좀 섞어 줄래?”
둥그렇고 움푹한 볼 안에 밀가루와 달걀, 물이 들어가 있었다. 헬레이나는 처음 만져 보는 거품기를 신기해하면서 아체리아가 시킨 대로 열심히 반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아체리아는 속에 들어갈 재료를 준비했다. 햄과 연어 토막에 얇게 썰어 소금을 살짝 뿌린 양파를 섞고, 케이퍼를 더해 마요네즈와 후추로 버무렸다.
‘그리고 한 가지는 좀 달콤한 걸로 만들어야지.’
이번에는 크림과 설탕을 이용해 달콤한 생크림을 만들 차례였다. 따뜻한 물에 우유를 중탕하면서 크림을 살살 녹이자 고소한 향기가 났다.
“아체리아 님…… 그건 뭘 만드시는 거예요?”
“여기에 발라 먹을 크림을 만들 거야. 엄청나게 휘저어야 해서 힘드니까 내가 할게.”
“히, 힘든 일이라면 제가 할게요. 저 이것도 거의 다 된 것 같고…….”
얼핏 보니 반죽은 그새 완성되어 있었다. 아체리아는 좀 감탄하며 헬레이나를 보았다가 저도 모르게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것 좀 저었기로서니 저렇게까지 땀을 뻘뻘 흘릴 일인가…….
“……괘, 괜찮아. 이건 좀 어려우니까 내가 할게. 넌 좀 쉬고 있어, 헬렌.”
“그렇지만…….”
아체리아는 헬레이나가 우물거리는 것을 들은 척 만 척하며 생크림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설탕을 넣고 한참을 휘저을 차례였다. 숙련된 요리사가 아니면 주방 일을 하는 사람도 팔이 떨어져 나갈 만큼 아픈데, 이런 걸 헬레이나처럼 연약한 아가씨에게 시킬 수는 없었다.
“초콜릿 소스도 만들어야지. 헬렌, 이 초콜릿을 살살 저으면서 전부 녹여 줘. 물이 들어가면 안 되니까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아체리아 님.”
도자기 그릇에 들어간 초콜릿을 헬레이나가 중탕하는 동안 아체리아는 계속 크림을 휘저으며 옆을 힐끔거렸다. 이따금 ‘앗!’, ‘앗, 뜨거워!’ 하고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헬레이나가 초콜릿을 거의 다 녹여 갈 때쯤, 크림이 단단하게 뭉쳤다. 거품기로 들어 보니 뿔처럼 솟는다.
아체리아는 한쪽에 놓인 과일 바구니를 살펴보았다. 마침 딸기가 제철인지라, 루비처럼 빨갛고 알이 굵은 딸기가 몇 개나 남아 있었다.
“아체리아 님! 이…… 이제 다 녹은 것 같아요.”
옆으로 가서 살펴보니 도자기 그릇 안에서 녹은 초콜릿이 묵직한 단내를 풍기고 있었다.
“좋아, 그럼 이제 굽자.”
“네? 구워요?”
“그래. 크레이프야. 크레이프 안 먹어 봤니?”
“크레이프…… 아! 축일 기간에 노점에서 파는 걸 본 적은 있어요. 한 번도…… 먹어 본 적은 없지만요.”
하긴 크레이프는 광장 같은 곳에 나가도 요깃거리를 파는 식당 같은 곳에서나 가볍게 제공하는 음식이다. 주머니가 두둑한 사람이나 귀족들은 좀처럼 접할 기회가 없는 음식이기도 했다.
헬레이나가 눈을 빛내며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동안, 아체리아는 기름을 두른 넓은 팬에 반죽을 얇게 부었다. 한 장, 또 한 장. 마치 마법처럼 반죽을 척척 구워 내는 아체리아를 보는 헬레이나의 눈길은 이제 존경에 가까워져 있었다.
아체리아는 다 구워 낸 반죽 한 장에 햄과 연어 샐러드를 넣어 동그랗게 말아 헬레이나에게 주었다. 처음 먹어 보는 것이라 그런지 잠시 머뭇거리는 듯했지만, 곧 한 입을 크게 베어 물었다.
“맛있지?”
오물거리며 크레이프를 맛본 헬레이나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아체리아를 쳐다보고는, 남은 것들을 게 눈 감추듯 얼른 먹어 치웠다. 적당히 짠맛이 나는 얄팍한 햄과 통통하고 촉촉한 연어, 거기에 마요네즈와 톡 쏘는 케이퍼의 맛이 구운 반죽과 함께 어우러지자 멈출 수가 없었다.
“너무 맛있어요, 아체리아 님!”
“그럼 이것도 먹어 볼래?”
그새 아체리아는 크림과 딸기를 넣고 초콜릿 소스를 뿌린 크레이프를 하나 더 만들어 내밀었다. 헬레이나는 머뭇거리던 것이 언제냐 싶게 또 하나의 크레이프도 재빨리 한 입 베어 물었다.
이번에는 앞서 먹었던 것과 완전히 다른 맛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부드러운 크림과 초콜릿 소스의 달콤함이 와락 달려드는가 싶었다가, 한발 늦게 딸기의 새콤달콤한 즙이 입 안에서 불꽃놀이처럼 화려하게 터지는 것 같았다.
“이게 크레이프라는 거예요? 세상에, 왜 이런 걸 여태 먹어 보지 않았을까요? 정말 맛있어요. 크림도 정말 맛있고 초콜릿 소스도…… 딸기랑 초콜릿 소스가 잘 어울리는 건 알았는데요, 바깥의 이 쫄깃쫄깃한 반죽에 싸서 먹으니까 더 맛있어요.”
“더 먹어도 돼. 아직 많이 구울 수 있으니까.”
헬레이나는 남은 딸기 크림 크레이프를 다 먹은 뒤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배가 불러서 더 못 먹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아체리아 님.”
“안 충분해. 널 먹이는 일도 정말 갈 길이 멀구나.”
얇은 반죽을 착착 겹치면서 아체리아는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폭 쉬었다.
* * *
헬레이나와 아체리아의 관계는 생각했던 것보다 어색함 없이 쉬이 친밀해졌다. 그리고 드레스 가봉 일이 되었다.
아체리아의 결혼식 드레스를 맞추기 위해 마일론이 다시 한번 불려 왔다. 이번에는 릴리엇이 아니라 클라우스가 부른 것이었는데, 밀려 있는 예약을 뒤로 미루기 위해 어마어마한 값을 치렀다는 말이 소곤소곤 퍼져 나갔다.
헬레이나는 아체리아가 헤매지 않도록 옆에서 적절하게 도움을 주었다. 처음에는 겁을 먹어 바들바들 떠는 아이였지만, 적응을 하고 난 후부터는 특유의 영민함을 십분 발휘해 아체리아가 곤란한 일이 없도록 온갖 일을 도맡아 해 주었다.
가장 고마운 것은 옷감 따위를 고를 때 옆에서 속닥속닥 조언을 해 주는 일이었다. 덕분에 아체리아는 언제 봐도 속내를 잘 알 수 없는 마일론을 상대로도 무난하게 드레스 원단을 고를 수 있었다.
“아체리아 님은 요리를 잘하신다던데, 이번 결혼식 메인 요리도 직접 담당하셨나요?”
마일론의 물음에 아체리아는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아뇨, 제가 하려고 했는데 요리사들이 다들 말리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손 놓기로 했어요.”
“그렇습니까. 또 재미있는 소문을 들을 수 있으려나 했는데, 이번에는 안타깝게 되었네요.”
마일론이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릴리엇은 헬레이나를 데려다 놓은 이후로도 여러 번 아체리아를 찾아왔다. 아체리아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매일 찾아오지는 못했지만, 이삼일에 한 번씩은 꼭 찾아와 사교계에서 필요한 매너나 중요한 상식 같은 것들을 알려 주었다.
“이것도 사교계에서는 중요한 일이에요.”
릴리엇의 말에 아체리아는 주먹까지 그러쥐며 분개했다.
“도대체 제가 남의 집 가계도를 왜 알아야 하는 거예요!”
“가계도 전체를 다 외우라는 것도 아니고 겨우 3대잖아요! 이 정도는 알아 둬야 한다고요! 알겠어요, 아체리아? 귀족 가문들 사이에는 엄청나게 복잡한 사연들이 숨어 있어요. 서로 원수지간인 가문도 있고, 도저히 떼려야 뗄 수 없는 가문도 있고, 원수지간이면서 또 떨어지지 못하는 가문들도 있죠. 그런 연결고리들을 파악해 놓아야 나중에 실수할 일이 적다고요.”
“전 외우는 거 정말 못해요, 릴리엇. 이것만은 진짜 어렵겠어요.”
아체리아가 손을 놓아 버릴 태세를 취하자 릴리엇의 눈썹이 약간 움찔거렸다.
“외우는 걸 못하다니 거짓말하지 말아요. 그 많은 레시피가 다 머릿속에 들어 있으면서!”
“아…… 아니, 그거랑 이게 어떻게 같아요? 레시피는…… 레시피는 그냥 외워지는 거잖아요!”
“난 레시피 열 개를 외우느니 차라리 남부 전 지역의 가문 가계도를 외우고 말겠어요! 봐요, 상대적인 거라고요. 레시피를 외울 수 있으면 가계도도 외울 수 있고, 가계도를 못 외우겠으면 레시피도 못 외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른요.”
릴리엇이 이마를 바짝 들이밀며 협박인지, 으름장인지 모를 어조로 말을 하는 동안, 아체리아는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을 한 채 축 늘어져 있었다.
* * *
아체리아가 릴리엇의 성화에 못 이겨 수도 귀족들의 가계도와 복잡한 은원 관계를 달달 외우는 동안 결혼식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살면서 한 번뿐일 특별한 경험을 앞두고도 아체리아는 도무지 신이 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벌써 열흘이 넘도록 주방에는 들어가지도 못했고―프레드가 막았기 때문에― 당연히 요리도 하지 못했다. 결혼식에 나올 음식만 안 만들면 되지 않느냐는 아체리아의 항변에도 프레드는 굳건했다. 혹시나 잘못해서 칼에 베이거나 뜨거운 물에 데이기라도 하면 어쩌냐는 것이었다.
설상가상 그녀가 공부를 제대로 했는지, 걷는 연습, 춤추는 연습은 제대로 했는지 검사하러 오는 릴리엇까지 있었으니 아체리아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도 다행인 상황이었다.
“결혼 물러 버릴까 보다.”
지쳐 늘어져 있던 아체리아가 중얼거리자,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클라우스가 팩,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뭐랬어?”
“이게 뭐예요! 결혼하는 거 하나도 재미없어요!”
“결혼을 누가 재밌자고 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좀, 좀 좋은 점이 하나쯤은 있어야 할 거 아니냐고요! 완전히 고생바가지! 요리도 못 하고!”
긴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서러움을 토해 내는 아체리아를 보던 클라우스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책을 내려놓고 아체리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내일이면 끝날 건데 조금만 더 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