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131)화 (131/144)

131화

겨울에 내렸던 눈이 녹고 새순이 돋자마자, 베르데사 왕국은 일주일 내내 이어지는 봄 축일 기간으로 흥성거렸다.

이 시기에는 새롭고 다채로운 일이 많이 일어난다. 새로이 작위를 수여받는 사람들이 나오고, 겨우내 추위가 가시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연인들이 드디어 행복한 결혼식을 연달아 올리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 봄 베르데사의 수도와 사교계를 휩쓴 소식은 따로 있었다.

“얘기 들으셨어요?”

“그럼요, 들었고말고죠.”

“드디어 결혼을 한다네요.”

“비스몽트 공작님이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셨다죠?”

“신혼여행은 공작령으로 간다던데, 거긴 뭐 재밌는 것이 있으려나?”

“뭐가 됐든 이제 공작 부인이 생기는 거예요…… 달라지는 게 하나둘이 아니겠지요.”

파티나 살롱을 찾은 귀족들은 두 사람 이상이 모이기만 하면 비스몽트 공작의 결혼식 소식을 떠들기 바빴다. 공작저의 고용인이자 가족도 없는 몸으로, 지금은 왕에게 귀족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으며 그녀의 말벗까지 되어 주고 있는 화제의 ‘아체리아 클링 양’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녀에게 반한 비스몽트 공작이 아주 오랫동안 구애하고, 청혼을 해 왔다는 소식도 바람을 탄 물결처럼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물론, 그 소문들이 다 진실인 것은 아니었지만.

* * *

“결혼 준비라니! 너무 설레요!”

아체리아는 자기보다 더 신이 난 루비를 보면서 헛웃음을 쳤다. 요즘 루비는 요리사로 일하는 것에 더해, 시간이 빌 때는 아체리아의 시녀를 자처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많은 꽃들, 신부의 꽃다발과 드레스까지! 꽃다발은 무슨 꽃으로 만들까요? 요리장님께는 하얀 백합이 어울릴 텐데!”

“……루비, 리본 너무 당겼어.”

“앗, 죄송해요. 너무 신나서 그만.”

루비는 헤실헤실 웃으며 꽉 졸라매었던 드레스의 리본을 약간 헐겁게 풀었다.

클라우스가 청혼을 한 것은 겨울이 거의 끝나 갈 무렵의 일이었다. 그리 화려하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 둘만의 조용한 자리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떠들썩한 청혼을 기대하지는 않았던 아체리아도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고즈넉한 저녁 무렵, 식사를 마치고 함께 벽난로 앞에서 차를 마시다 이루어진 일……. 그날의 그 저녁을 되새기자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노을빛이 먼저 떠오른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렇게까지 소문이 퍼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요리장님, 그러고 보니 부주방장님이 여쭤보라 하신 게 있어요. 결혼식에 쓸 메인 요리를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느냐고요.”

“뭐? 그걸 왜 물어보라고 해?”

“그야 그 요리를 부주방장님이 하실 거니까 그렇겠죠?”

아체리아가 픽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걸 왜 프레드 씨가 해? 내가 해야지.”

“네? 말도 안 돼요! 약혼식 때도 그러셨으면서 결혼식 때도 그러실 거예요? 안 돼요! 신부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꼭 신부가 되어 본 적 있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루비?”

루비의 조그만 입술이 삐죽거렸다. 어린애 취급에 심통이라도 난 것처럼.

“물론 제가 결혼을 해 본 적은 없지만, 공작저에 오기 전에 여러 번 본 적 있단 말예요. 동네 아가씨들이나 언니들…… 저희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는데도, 결혼식 날은 난리도 아니었어요. 신부는 그 전날부터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였다고요. 얼마나 바쁜지.”

“그럼 그전에 요리를 다 준비해 놓으면 되지.”

“부주방장님이 허락하지 않으실걸요?”

“내가 요리장인데 누구 허락을 받고, 말고 할 필요가 있어?”

아체리아가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루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연 될까? 라는 것처럼.

그리고 루비의 반응이 옳았다.

“안 됩니다.”

주방 앞에 버티고 선 프레드는 완강했다. 마치 성을 지키는 마지막 파수꾼 같은 모양새였다.

“아니, 프레드 씨. 안 되다뇨! 아직은 내가 요리장이라고요!”

“요리장님이 아니라 요리장님 할아버지가 오셔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세상에 어느 신부가 자기 결혼식에 쓸 음식을 직접 준비한답니까?”

“내가요!”

“제발 이번만은 양보해 주십쇼. 약혼식 때도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주연이신 요리장님이 직접 주방에 오신 것 때문에 부담감들이 장난이 아니었다고요.”

거기까지 말을 한 프레드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말을 뱉어 버린 후였다.

아체리아는 뜻밖의 말에 너무 놀라서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더니 눈을 깜빡이며 프레드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부담스럽다니? 제가 말이에요?”

“그러니까…… 요리장님이 부담스럽다는 게 아니라. 아이고, 나 원.”

얼굴을 문지르며 뇌까린 프레드는 제 손으로 닫아 버린 주방의 문을 주먹으로 짚었다가, 그 주먹을 다시 입가에 대었다가 왠지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은 투로 양손을 이리저리 휘젓더니 말했다.

“생각해 보세요. 공작저의 요리사들 중에 요리장님보다 뛰어난 실력의 요리사가 없습니다. 다들 요리장님을 존경하고 따르잖아요. 그런데 그런 분이, 인생에 단 한 번 있는 큰일을 앞두고 꼭 자기가 요리를 하겠다고 하는 게…… 말이죠. 뭐라고 할까…….”

“뭐예요, 프레드 씨. 똑바로 말해 줘요. 나 상처 안 받도록 노력할 테니까요.”

“상처 주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아시죠?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 요리장님이 굳이 전면에 나서시겠다 하는 게, 다른 요리사들에게는 좀…… 마음 쓰이는 일이었습니다.”

“마음이 쓰이다뇨? 왜요? 항상 같이 요리를 해 왔잖아요. 같은 주방 식구인데!”

“저희를 못 믿기 때문에, 저희 실력이 그런 큰일을 감당하기에는 모자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시는 게 아닌가 하고…….”

그 말을 들은 아체리아의 눈은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벌어졌다.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한 적이 없었다. 단지 자신은 늘 그들과 함께 요리를 해 왔고, 공작저에 큰일이 있으면 주방에는 늘 저와 다른 요리사들이 있었으니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또, 좀처럼 해 볼 일 없는 요리―사람들을 많이 초대하는 행사에 필요한―를 해 보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망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요리사들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니, 생각도 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그, 그래서가 아니에요, 프레드 씨. 한 번도 그런 생각 한 적 없는데!”

“저도 압니다. 사실 모두가 다 요리장님에 대해 잘 알죠. 그런데 그…… 사람 마음이라는 게 말입니다, 마음대로 안 되기도 한다는 걸 조금만 알아주시면…….”

“…….”

“그리고, 다들 요리장님의 새 출발을 자기 손으로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이번만큼은 저희에게 맡기고 행복한 신부가 될 준비를 하세요. 네?”

아체리아는 프레드의 말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내 결혼식에 쓸 요리를 직접 만드는 것도 내 꿈이었는데. 프레드 씨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우기기도 좀 뭣 하네…….’

프레드가 조심스럽게 아체리아를 불렀다.

“요리장님?”

생각에 잠긴 표정을 한 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아체리아가 고개를 휙 들어 그를 보았다.

“알겠어요, 프레드 씨.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어요.”

“그렇게 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종전에 비해 활짝 펴진 프레드의 안색을 본 아체리아의 얼굴에도 짧은 미소가 지나갔다. 그녀는 프레드의 손을 양손으로 덥석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그럼, 세상에서 제일 맛있고 보기도 좋은 메뉴를 부탁할게요. 프레드 씨와 다른 사람들을 믿고 말이에요.”

“그거야 당연한 일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 * *

아체리아가 결혼식 준비 기간 동안 주방 출입을 금지당했다는 말을 들은 클라우스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왜 웃으세요?”

“아무리 너라도 주방에서 쫓겨날 때가 있긴 하구나 싶어서.”

아체리아는 뾰로통한 표정을 한 채 팔걸이가 달린 흔들의자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초승달 모양으로 굽어진 다리받침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기울어지며 끽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케이크도 제 손으로 굽고, 메인으로 나갈 요리도 다 생각해 뒀는데.”

프레드 앞에서는 요리사들에게 맡기겠다고 말은 했지만 그래도 역시나 아쉬웠다. 태어나 단 한 번, 자기 자신의 결혼식 만찬을 만들어 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맞은편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클라우스는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매단 채 몸을 일으켜 아체리아에게로 다가왔다. 그가 발치에 앉자, 두 사람의 눈높이는 서로 달라졌다. 아체리아가 그를 내려다보자, 클라우스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들어가서 우기지 그랬어?”

“그럴 수가 없었단 말이에요. 프레드 씨가 하는 말이…….”

“뭐라고 하던데?”

“……제 약혼식 때도 요리사들이 부담스럽게 생각했대요. 제가 그 사람들을 못 믿어서 그러는 줄 알았다고…….”

“실제로 못 믿어서 그런 건 아니잖아.”

“그야 당연하죠! 다들 실력이 좋은데 제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그럼 그렇게 말하면 되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 나니까 또…… 우기기가 좀 뭣 하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안 들어간다고 약속했으니까 어길 수도 없게 됐어요.”

아체리아가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요리 말고도 할 일이 많을 거야.”

클라우스가 말했다.

“할 일이 많다니, 어떤 걸 해야 하는데요?”

“내일부터 릴리엇이 네 개인 교습을 해 주러 온다고 하던데.”

개인 교습이라니? 아체리아는 뜻밖의 말에 놀라 눈썹을 찡그렸다.

“개인 교습이라니…… 뭘 가르치러요? 대체 뭘 배워야 하는 거예요? 결혼식에서 고상하게 웃는 법 같은 걸 배워야 하는 건 아니겠죠, 설마?”

“고상하게 안 웃을 거야?”

“아니! 아뇨!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물론 필요하면 고상하게…… 웃기야 하겠지만 그런 걸 굳이 교습까지 받아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게다가 릴리엇은 이제 란츠호프 후작인데, 할 일도 많을 텐데 왜…….”

“후작이니까 딱 좋지. 원래 공작 부인을 옆에서 보조해 주는 시녀들의 지위가 그 정도니까.”

아체리아의 입이 딱 벌어졌다.

“시녀라뇨, 전 그런 거 싫어요. 집에서 도와주는 고용인들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렇게 말할 거라고 나도 생각은 했지만…… 아마도 릴리엇 생각은 좀 다를걸? 내일 릴리엇이 오거든 둘이 잘 이야기해 보도록 해.”

말을 마친 클라우스는 팔걸이를 지지대 삼아 일어나더니 아체리아의 이마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고 제 방으로 건너갔다.

“결혼하고 나면 방을 같이 쓰게 되는 건 편하겠어.”

……그런 하나 마나 한 소리를 남기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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